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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Jan 25. 2024

12. 누구든지 아무 때나 어서 오세요

'퇴고推敲'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오늘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다.

때는 서기 823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 중국 중당中唐 시대의 이야기다. [주 1]



밀까요, 두드릴까요?



여기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오늘날의 서안西安. Xī’ān. 시안) 남쪽의 외곽 지역. [주 2] 한 스님이 나귀를 타고 길을 가고 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뭔가에 정신이 홀린 듯, 스님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손으로 이상한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저 스님, 왜 저런대? 미친 거 아냐? 길가는 사람들마다 쳐다보며 수군댄다. 스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스님이 탄 나귀가 어느 네거리에 도착할 무렵. 어떤 고관대작이 지나가는지, 의장대가 풍악을 울리며 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다. 그런데... 아이고, 이걸 어쩌나! 정신이 나간 이 스님, 귓구멍이 막혔는지 나귀를 멈출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앞으로 돌진하네? 어떻게 되었을까? 의장대 행렬과 부딪치고 말았지, 뭐꽝! 


"웬 놈이냐!?" 

"아니, 이 땡중 놈이 감히 누구 행차를...!"


좌우의 포졸들이 득달같이 덤벼들어 스님을 붙들어서 고관 앞에 무릎을 꿇렸다. 그러나 수레를 타고 있던 고관은 온화한 목소리로 스님에게 연유를 묻는다. 


"스님은 무슨 일로 내가 가는 길을 가로막은 게요?''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소승은 무본無本이라 하옵는데 어제 지인을 찾아갔다가 허탕을 치고 하릴없이 돌아가는 길입니다."

"근데 왜..."

"소승이 시詩 한 수를 지었는데, 그중에서 글자 하나를 뭘루 정했으면 좋을지 고민이 되는지라 그 생각을 하다가 그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오호, 그런 일이!"


고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궁금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누구인가? 대당제국의 예부시랑禮部侍郞이자 수도 장안의 총책임자인 경조윤京兆尹(요새 우리의 서울시장 격)이며, 당금 문단文壇의 최고봉인 한유韓愈(768~824) 아니던가! 후세에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라 칭하며 글쓰기의 최고봉, 롤모델로 삼는 바로 그 사람 아니던가! 


"어떤 시인지, 내게도 한번 들려주시겠소?"


한유는 특히 호기심이 대단했다. 스님의 수준을 알고 싶었다. 대체 어떤 시를 짓다가 그런 고민에 빠지게 되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 자신도 비슷한 경험이 너무나 많지 않았던가. 한유의 반응을 대한 무본 스님은 얼굴에 희색이 가득하여 자신의 시를 암송한다. 그중에서 특히 아래의 두 구절이 마음에 썩 들었단다.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묵고,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 밀고 들어간다.

鳥宿池邊樹, 僧月下門. 

조숙지변수,  승월하문. [주 3]


그런데 '밀 퇴推'라는 글자가 어쩐지 마음에 걸려서 다시 생각해 보니 '두드릴 고敲'라는 글자가 떠올랐단다. 헌데 또다시 생각해 보니 '퇴'가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할수록 헷갈리는지라, 손동작으로 반복해서 밀어 보기도 하고 두드려보기도 하면서 넋을 놓고 오다가 그만 무례를 범하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대감 고견으로는 미는 게 좋겠습니까, 두드리는 게 좋겠습니까? 가르침을 주시면 큰 영광이겠나이다."

"아하, 그런 사연이!"


한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님이 이 정도 수준의 시를 짓는다는 것도 범상치 않거니와, 끊임없이 더 바람직한 글자를 찾아 고뇌하는 그 창작 정신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시성詩聖 두보杜甫도 다짐하지 않았던가. "나의 언어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고치고 또 고치리라. 語不驚人死不休[주 4]


"내 생각에는 '두드릴 고敲'가 더 나을 것 같소이다."


그리고 무본 스님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함께 문학과 창작에 대해 토론하며 친구가 되었다는 이야기. 또 평소 불교를 배격하던 한유의 적극 권유로 스님이 환속하였으니, 그가 바로 중당 시대의 고음파苦吟派 시인 가도賈島(779 ~843)라는 이야기다. 글을 쓸 때는 글자나 문구를 정성껏 고치고 다듬어야 한다는 '퇴고推敲'라는 단어가 바로 이 일화에서 탄생했다.  [주 5]

 


각주


 [주 1] 이 일화는 북송 시대의 완열 阮悅이 편찬한《시화총귀 詩話總龜》를 비롯한 몇몇 문학 일화집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몇백 년 동안 문인들 사이에 떠돌던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이라 정확성과 신빙성이 떨어진다. 일화집에는 한유가 경조윤京兆尹일 때 벌어진 일이라고 나와 있다. 그가 경조윤일 때는 823년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801년에 이미 시문을 주고받은 사이였으며, 가도가 환속한 것도 802년의 일이다. 그러므로 사실 이 일화는 후세에 꾸며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주 2] 오늘날 행정구역으로는 서안시 장안구 상녕신구常寧新區의 성남대도城南大道와 신화2로神禾二路의 교차로 지점이 '퇴고' 사건이 발생한 지점이라고 한다. 현장에는 '퇴고원 推敲園'이라는 공원이 있어 이 일화의 탄생을 기념하고 있다. 


 [주 3] 원제는 <숨어 사는 이응을 찾아가다 題李凝幽居>. 오언 율시다. 

 [주 4] 두보의 칠언 율시인 <바다처럼 밀려드는 강물을 대하며 江上值水如海势聊短述>의 한 구절이다.

 [주 5] 우리나라에서는 '퇴고' 또는 '추고'라고도 발음한다.



다시 한번... 밀까요, 두드릴까요?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밀 퇴推'가 더 마음에 드시는가, 아니면 '두드릴 고敲'가 더 마음에 드시는가? 

한유는 '고'가 더 낫겠다고 했다지만, 거기에 구애받지 말고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시 구절의 분위기를 잠시 설명드리겠다. 


(1) 무본 스님이 어느 지인을 찾아가는 길이다.  

(2) 깊은 밤이 되었다. 인적도 없고 새들도 나뭇가지에서 잠이 들었다. 

(3) 달빛이 교교하다.

(4) 황폐한 집을 발견했다. 혹시 여기인가?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이다. 


바로 여기서,

여러분이라면 문을 밀고 들어갈 것인가, 문을 두드릴 것인가? 

'미는 행위'와 '두드리는 행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후세 사람들은 한유가 '두드릴 고敲'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추측했다. 

▶ 모르는 집이니까 노크를 해야 예의가 있는 거 아냐? 그냥 밀고 들어가면 싸가지 없잖아.

▶ 밤의 적막감을 더 부각하려면 두드리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저명한 미학자 주광치엔 朱光潜(1897~1986)은 '밀 퇴推'를 더 선호했다. 그 이유는 이랬다.

▶ '문을 밀고 들어간다'는 은연중에 그 문을 자기가 닫고 나갔다는 이야기. 즉 그곳에 스님 혼자 묵고 있다는 뜻. 그렇게 적막한 곳에서 홀로 면벽 구도의 생활을 하다가 교교한 달빛을 보고 잠시 유유자적 산책하다 돌아가는 광경이 연상되니, 이 얼마나 고승의 풍도가 넘쳐 보이느냐는 것. 

▶ 반면에 '문을 두드린다'는 집안에 다른 사람이 또 있다는 뜻. 즉 적막한 곳에서 홀로 참선하는 고승의 모습이 아니라는 이야기. 더구나 문을 두드리면 잠자는 새를 깨우게 되고, 푸드덕 소리에 정적이 깨져버리면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버린다는 주장이었다. 주광치엔, <문자를 음미하다 咬文嚼字>에서.


그 후로는 많은 학자들이 주광치엔의 의견에 동조하는 분위기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필자는 '두드릴 고敲'를 더 선호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 문을 밀고 들어가도 어차피 소리는 나게 마련이다. 더구나 주광치엔의 말대로 자기 혼자 사는 곳이라면 굳이 소리를 작게 내려고 조심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어떤 소리가 날까? 삐~꺽!

▶ 문을 두드린다면 어떤 소리? 꽝, 꽝, 힘차게 두드리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조심스럽게 두드리지 않겠는가? 똑, 똑, 똑! 어떤 소리가 더 고요한 분위기를 파괴하는 걸까? 


▶ 문을 밀고 들어간다면 주광치엔 말대로 익숙한 자기 숙소라는 뜻.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안에 아무도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누군가 같이 살고 있는 친숙한 사람이 있다면, 굳이 문을 열어달라고 불러내는 게 더 이상하다. 인적 없는 황폐한 곳에 살면서 문을 잠그고 다닐 리가 만무하니, 그냥 자기가 밀고 들어가는 게 더 자연스럽다. 문을 밀고 들어간다고 해서 혼자 수련하는 스님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 문을 두드린다고 해서 참 스님의 풍도가 엿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물씬 강하게 풍긴다. 스님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여러 사찰 등을 돌아다니며 만행萬行을 하기도 한다. 경허 鏡虛(1849~1912) 스님의 구도 행각을 소재로 한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이 좋은 사례다. 


생각해 보시라. 길 없는 길, 구도의 길을 떠난 스님이 밤늦게서야 어느 이름 모를 절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그곳의 문을 두드리는 그 장면을 떠올려보시라. 진리를 찾아 나선 구도자의 간절함과 조심스러움이 엿보이지 않는가. 새가 연못가 나뭇가지에 의지하여 잠을 자듯, 스님 자신도 하룻밤 몸을 의탁할 곳을 찾았다는 안도감도 엿보이지 않는가! 



퇴고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우리가 글을 쓸 때 '퇴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나눔'과 '상생'에 있다고 생각한다. 잠시 고리타분하게 꼰대식으로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글은 무엇 때문에 쓰는 걸까? 동아시아 전통 학문의 관점에 의하면, 글이란 '도道'를 밝히기 위해 쓴다. '도'란 원래 '길, 방법'이라는 뜻. 여기서는 노장사상, 즉 Taoism의 방법을 말하는 게 아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대동大同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그걸 알리기 위해 글을 쓴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대동사회'라는 게 무엇이냐, 요새 말로 하자면 그게 바로 '나눔'과 '상생'과 '소통'이라는 이야기다.


글은 written language다. 즉 '말'을 '문자'라는 도구로 녹음한 것. 그러므로 '퇴고'를 하며 글을 정성껏 다듬어야 한다는 것은, 곧 '말'을 다듬으라는 뜻. 그런데 '말'이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퇴고'란 결국 머릿속에 잔뜩 헝클어진 생각을 가다듬는 행위인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생각을 가다듬어야 하는 걸까? '나눔'과 '상생'과 '소통'이다. 그 방향성이 없는 글은 글이 아닌 것이다. 이 과정에키포인트는 가지다


첫째, 소리 내어 읽으면서 고치고 또 고칠 것. 흔히 퇴고라면 '맞춤법 검사' 기능을 이용하여 철자법이나 맞춰주면 되는 걸로 생각한다. 아니다. 글은 말을 녹음한 것이므로 퇴고를 할 때는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자신의 말로 다듬어야 한다.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읽으며 술술 말이 잘 통하도록, 필요하면 말의 순서도 재배치하면서 어색한 곳의 막힌 혈을 뚫어줘야 한다. 글은 기氣가 잘 통해야 한다는 이른바 '문기론 文氣論'이다. 


둘째, 주제가 선명할 것. 글이 '나무'라면 퇴고는 '가지 치기'다. 불필요한 말은 과감하게 지워버려야 한다. 글쓰기란 10을 써놓고 9를 지워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애써 써놓은 글을 버리기가 너무 아깝다. 좀처럼 지우지 못하고 중언부언 잔뜩 늘어놓는다. 그래서 내 삶에 뼈대를 세우지 못했다. 


셋째, 소통 능력이다. 즉 호소력과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나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다. 최근 내 글을 읽어주시고 라이킷도 눌러주시는 작가 분들의 브런치에 이따금 마실을 나가보면 다들 어찌나 센스 있게 글을 잘 쓰시는지, 의기소침해지기 일쑤다. 


특히 '청년 클레어' 작가님의 언어를 구사하는 센스와 공감/소통 능력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나처럼 늙은 꼰대와는 필력의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도 슬프지는 않다. 나야 뭐, 더 늦기 전에 나름 부지런히 '유서'를 남기고 있는 차원이니까... 아무튼 나눔과 상생과 소통의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는 작가님에게 찬사를 보낸다. 


퇴고의 과정은 너무나 힘들고 고되다. 글쓰기의 99%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전통 학문은 지극 정성의 글쓰기를 통한 실천을 강조한다. 배운 대로 실천하라! 무엇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 실천하라는 것일까? '퇴고'라는 인고忍苦의 과정을 통해서 '나눔'과 '상생'의 정신을 온전한 자기의 것으로 체득하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학문 學問'이다. 우리가 지금 가르치고 배우는 서양학西洋學과는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 


그러나 유가 사상은 그 어려운 행위를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 누구에게 요구하는 걸까?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리더 그룹에게만 요구한다. 한자로 말하자면 사대부士大夫, 프랑스말로 하자면 노블레스 noblesse에게만 요구한다. 글쓰기, 즉 퇴고는 사회 지도층의 책임, 가장 강력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oblige였던 것이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실감 나지 않으실듯. 자, 그럼 사진 여행을 통해서 알아보자. 

[표지 사진]을 편하게 보시라고 이 밑에 다시 가져오겠다. 

여기가 어디인지 아시는가? 강릉 경포대 옆에 있는 '선교장船橋莊'이라는 곳의 입구다. 세종대왕의 형인 효녕대군의 후손이 살았던 전형적인 조선 사대부 가문의 주택으로 국가 민속문화재다. 


그런데 사진을 잘 보시라. 대문이 아주 재미있지 않은가? 대문에 문짝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열려있다. 언제 가서 봐도 언제나 열려 있다. 하긴 옆에 담이 없으니 닫아봤자 뭐 하겠는가. 그런데 왜 이렇게 해놓았을까? 답은 대문의  양쪽 문기둥에 적혀있다. 글씨가 잘 안 보이시죠? 확대해서 보여드리겠다.


문의 이름은 '월하문 月下門'이다. 기둥 양쪽에 걸린 글자도 읽어보시라. 어라? 아까 나왔던 시구네? 그렇다! 바로 가도가 지은 "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이다. 이 시구가 왜 여기 걸려있을까? 


선교장은 한국 민간 전통 가옥 중에서 가장 크다. 가옥 규모가 102칸이고 하인들 방까지 치면 300칸이 넘는 대저택이다. 왜 그렇게 클까? 왕손임을 과시하기 위해서? 아니면, 돈이 많아서 부를 과시하기 위해? 


선교장은 다른 양반집들과는 구조가 아주 다르다. 손님이 묵는 사랑채와 식구들이 사는 안채로 나뉘어 있는데, 사랑채가 훨씬 크다. 집을 지을 때부터 많은 손님을 접대할 목적으로 지었다는 뜻이다. 어떤 손님일까? 


조선 시대 선비들의 가장 큰 소망은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며 시와 글로 그 감흥을 남기는 것이었다. 강릉 선교장은 바로 그 길목 아니던가. 선교장은 처음부터 유람 나온 선비들과 이웃, 가족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려는 목적으로 건축한 나눔과 상생과 소통의 공간이었다. 


사랑채는 무려 3채나 된다. 제일 고급으로 지은 사랑채의 이름은 '열화당 悅話堂'. 도연명陶淵明, <귀거래사 歸去來辭>의 한 구절인 "친지들과 다정한 이야기 나눔을 기뻐한다 親戚之情"의 앞뒤에서 한 글자씩 따온 이름이다. 신선세계나 무릉도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오순도순 친지들과 정겹게 이야기 주고받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라는 동아시아 선비 정신을 실천한 공간이 바로 선교장이었다. 


사랑채의 나머지 두 채는 중행랑과 줄행랑. 손님으로 찾아온 선비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어보고 그 정신적 수준에 따라 열화당에 묵게 할지, 아니면 중행랑 또는 줄행랑에 묵게 할지 결정했단다. 유람 나온 선비들은 대체로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 아예 한두 달씩 눌러앉는 경우도 있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떠날 때는 노잣돈도 두둑하게 챙겨주었단다. 그리하여 선교장은 약 300년 동안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서로 소통하고 교유하는 관동 지방 최고의 문화의 산실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자, 여기서 퀴즈 문제! 선비들은 하루 중에 언제 선교장에 도착했을까? 아침, 점심, 저녁, 밤. 언제일까? 그렇다. 답은 '아무 때나'다. 그들이 도착 시간을 정해놓고 왔을 리가 만무하다. 상황이 허락하대로 도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손님들은 언제쯤 문을 두드리기가 제일 망설여지겠는가? 당연히 밤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손님들이 오밤중에 은근히 염려하며 입구에 도착해 보니, 문이 활짝 열려있네? 게다가 문기둥 양쪽에 대련對聯이 적혀 있네?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묵고,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

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


중국어는 평서문이 명령문이다. 상황에 따라 어울리게 해석한다. 그러니 이게 무슨 말인가? 아무리 깊은 밤, 조용한 밤이라도 상관없으니 문을 두드리라는 말 아닌가! 손님 입장에서 이 시구를 낭송한다면 그만큼 태도가 조심스러워지지만, 주인이 손님에게 이 시구를 들려준다면 아무 때나 상관없어요.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그 뜻으로 바뀌는 거다. 함축어인 한자의 신비한 힘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선교장은 예로부터 지역의 빈민을 구제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흉년이 들 때마다 수천 석의 쌀을 내놓았다. 조선말에는 곳간에 학교를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했다. 최고의 지식인들을 교사로 초빙하고, 학생들에게는 학비 전액을 지원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몰래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여 해방 후에 귀국한 백범 김구 선생에게 감사의 선물을 받기도 했다. 높은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것이다.      


'퇴고推敲'라는 단어와 '노블레스 오블리주'와의 함수 관계는 대체로 이러하거니와,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우리들의 이 브런치스토리 공간이야말로 오순도순 지인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는 또 다른 선교장이요, 또 다른 열화당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청년 클레어' 작가님을 비롯한 여러 작가님들은 사랑채 중에서도 가장 고급인 '열화당'에 묵고 있는 것일 터. 나로서는 이렇게 '줄행랑'의 작공간에 묵는 것도 영광이겠다. 




사족. 50년도 더 지난 옛날 호랑이 담배 필 때 이야기다. 어쩌다 보니 동해안 일대로 혼자 무전여행을 갔다. 경포 호숫가 소나무 숲에 군용 텐트를 쳤다. 쫄쫄 굶으며 밤이 되다 보니 배가 너무 고팠다. 문득 선교장 생각이 났다. 당시에는 적손嫡孫(큰아들로 이어지는 집안) 일가가 살고 있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필자의 이모님 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도착하니 거의 오밤중이었다. 월하문을 지나 활래정 앞에서 기웃대니까 할머니 한 분이 한지로 된 문을 열고 내다보셨다. 오라, 네가 아무개 아들이로구나? 반가워하시며 저녁밥을 내주셨다. 활래정에서 하룻밤을 의탁한 그날, 그 할머니의 따스한 그 목소리를 떠올리니 가슴이 뭉클하다. 어제 일 같다. 


활래정




[표지 사진] 

◎ 2023년 여름, 함께 선교장에 가서 월하문 사진을 찍고 제공해 준 건축설계사 안O성 벗님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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