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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Jan 18. 2024

11. 삶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후적벽부後赤壁賦〉감상 (2)

 이 글은 <10. 그대, 인생이 즐거우셨소이까?>의 후속 편입니다.


계속해서 소동파의 <후적벽부>를 감상하겠다. 지난번에는 필자의 '해설' 없이 번역문과 원문, 그리고 기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각주만을 올려드렸다. 첫째는 글의 분량이 너무 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독자 여러분의 자유로운 작품 감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충분히 감상하셨을 터이니, 이번에는 번역문만 다시 한번 올리고 필자의 개인 견해를 말씀드리겠다. 원문과 기본적 이해에 대해서는 지난번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 제1단락: 기起 ] 유람의 계기


그 해 시월 망일望日이었다. 설당雪堂에서 나와 임고정臨皐亭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는 두 사람의 객客과 함께 황니黃泥 고개를 넘고 있었다.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나뭇잎은 모두 떨어져 있었다. 땅 위에는 사람의 그림자. 고개를 들어보니 둥두렷 밝은 달! 사위를 둘러보다 문득 즐거워진 마음에 걸으며 노래를 부르니, 객客들도 함께 따라 불렀다. 이윽고 탄식이 흘러나왔다.


귀한 손이 오셨건만 마실 술이 없구나! 마실 술은 있다하되 안주거리 없구나!

하얀 달에 맑은 바람, 이리도 좋은 밤을 어인 수로 보낼까나!


한 객客이 말하였다.

“오늘 어스름 저녁 무렵 그물을 올려보니 물고기가 잡혔더이다. 주둥아리 커다랗고 비늘은 잘디 잘은, 그 형태가 영락없이 송강松江 명물 농어와 닮았더이다. 헌데, 술은 어데서 구한다지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상의해 보았다. 아내가 말했다.

“영감께서 불시에 필요할 때가 있지 싶어, 오래전에 술 한 말 숨겨둔 게 있지요.”


그리하여 술과 물고기를 가지고 다시 적벽 밑으로 유람을 나갔다. 


[ 제2단락: 승承 ] 유람


강물은 소리 내어 흐르고 있었다. 절벽은 깎아질러 천척千尺 높이로 솟아있었다. 산은 높아지고 달은 작아졌다. 물은 줄어들고 바위들은 드러나 있었다.  도대체 해와 달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고 이렇게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강산江山이 변한 걸까!     


나는 옷소매를 걷고 육지에 올랐다. 가파른 바위를 타고 올라갔다.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지나갔다. 포효하는 호랑이 바위에 걸터앉아 보았다. 꿈틀대는 이무기 괴목怪木위에 올라가 보았다. 아찔한 나무 끝 송골매 둥지 위에 기어올라가, 강속 어딘가 깊이 숨어 있을 하백河伯, 풍이馮夷의 용궁을 내려다보았다.


두 객客은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 제3단락: 전 轉 ] 만남


휘- 익, 길게 소리를 질러보았다. 초목이 부르르 떨자, 골짜기 안에 산의 울림이 맴돌더니 홀연 바람이 일어나고 물결마저 춤을 추었다. 나는 슬며시 슬퍼졌다. 문득 숙연해져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시릴 정도로 맑고 차가운 느낌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몸을 돌려 다시 배에 올랐다. 강 한복판에 배를 띄우고 파도가 치는 대로 물결이 멈추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때는 바야흐로 한 밤중, 사방을 둘러보아도 적막과 고요함뿐이었다.


그때였다. 저 동녘에서 한 마리의 학鶴이 강을 가로질러 날아오고 있었다. 날개는 수레바퀴, 까만 치마에 하얀 상의를 걸친 듯... 꺼-- 억, 길게 울더니 내가 탄 배를 스쳐지나 서쪽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순식 간에 객客들은 떠나가고 나는 잠이 들었다.


[ 제4단락: 결 結 ] 꿈과 현실


꿈을 꾸었다. 우의羽衣 도복을 입은 한 도사가 표표飄飄한 자태로 임고정 밑을 지나와서 홀연 읍揖을 하며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적벽의 노님이 즐거우셨소이까?”


그 이름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하, 그렇구려! 이제 알겠소! 지난밤에 길게 울며 내 옆을 스쳐 날아간 그 학鶴이 바로 그대가 아니시오?”


도사가 고개 돌려 빙그레 웃었다.

나는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으나, 그는 종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 해설 ] 삶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후적벽부>에 대한 역대의 평가는 전편에 비해 상당히 인색하다. 그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다. 첫째,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 때문에. 둘째, 소극적이고 위축된 언어 때문에. 셋째, 신비주의적인 색채 때문이다. 만일 이 작품을 동파가 쓰지 않았다면, 그리고 <적벽부>의 후편이 아니었다면, <후적벽부>는 지금 이만큼의 평가마저도 받지 못하고 그저 그런 작품으로 역사 속에 파묻혔을지도 모르겠다.


전 후편에 등장하는 동파의 이미지는 얼핏 너무나도 달라 보인다. 전편에서는 수유須臾같은 삶을 슬퍼하는 객客을 허허- 점잖게 웃으며 타이르던 초월의 달관자, 동파가 아니었던가! 그러던 그가 후편에서는 왜 이렇게 뭔가 쫓기는 사람처럼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만을 저지르는 걸까?


홀로 미친 듯이 절벽을 타고 올라가고, 까마득한 나무에 기어 올라가서 고함을 지르고, 그 소리가 메아리치자 갑자기 겁을 먹고 황망히 배를 타고 강 한복판으로 도망을 나간다. 이게 뭐지? 동파가 왜 이렇게 갑자기 소극적이고 위축된 모습이 되었을까?


게다가 난데없이 '학鶴'이 나타났다가 금방 지나가 버린다. 일행들도 덩달아 금방 어디론가 가버렸단다. 갑자기 꿈을 꾸고, 꿈에 도사가 나타나더니 그가 바로 지난밤의 그 '학'이란다. 이번엔 돌연 신비주의 모드가 되어 황급히 글을 끝맺는다.


평소에 동파의 마술 같은 문장 솜씨에 탄복을 금치 못하던 추종자들도, 그의 이런 소극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모습은 당최 못마땅하기만 하다. 이야기의 맥락도 없다. 술과 안주는 대체 왜 준비했는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나 말 것이지. '학'은 또 뭐람. 왜 등장했는지, 무엇 때문에 도사로 변한 것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다. 그들은 전편에서처럼 삶의 철리를 친절하게 일깨워주는 동파가 못내 그립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바로 곧 후편의 사상적 예술적 가치를 감소시킨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아니, 필자는 오히려 <후적벽부>의 문학적 가치가 전편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고 싶다. 후편은 전편의 속편 아닌가. 같은 주인공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주제의 스토리를 계속 이어서 전개하는 게 통념 아닌가. 그런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전편의 성망聲望을 뛰어넘기 어렵다. 그러나 <후적벽부>는 그 한계를 훌륭하게 극복해 냈다.


전후 <적벽부>의 주제 비교


학자들은 <적벽부> 두 편을 《장자》에 비유하기도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후적벽부>의 말미에 등장하는 꿈 이야기가 <제물론 齊物論>의 ‘나비의 꿈 胡蝶之夢’을 연상시키는 점 때문일 게다. 나비가 된 꿈을 꾸다가 꿈에서 깨어난 장자는 문득 의혹을 품는다. ‘나'라는 존재는 나비가 된 꿈을 꾸다가 깨어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된 꿈을 꾸기 시작한 나비가 아닐까... 하지만 노장사상 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또 어떤 이들은 <전적벽부>는 시간의 문제를 다루었고, <후적벽부>는 공간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과연 이분법으로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대등한 성격의 개념일까? 시간의 개념이 없는 세계에서는 공간의 개념도 사라지고, 물질의 개념도 사라지게 마련 아니겠는가?


필자는 <전적벽부>는 '본질'의 문제를 다루었고, <후적벽부>는 '현상'의 문제를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자면 <전적벽부>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설명했고, <후적벽부>는 '삶'의 현상을 보여준 것이다.


<전적벽부>에서 동파는 말한다. 물은 흘러가버렸지만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에서 흐르고 있다고. '죽음'은 물이 흘러가는 것. 바다에서는 '수증기'의 모습으로 구성 원자가 재배치되었다가, 하늘에서는 '구름'으로, 그리고 또다시 '빗물'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서 늘 우리와 함께 한다. '죽음'은 존재계의 변화 흐름의 연속선상에서 나타난 한 현상일 뿐,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영원불멸이다. 동파는 그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후적벽부>는 '삶'의 현상을 슬라이드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준다.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스토리 전개가 대단히 스피디하다. 오밤중에 술과 안주를 구하는 장면, 적벽에 유람 나가 미친 듯이 절벽을 올라갔다가 다시 배를 장강 한 복판에 띄우는 장면, 함께 갔던 일행이 수유須臾 간에 떠나가는 장면, 거두절미하고 꿈을 꾸는 장면, 벌떡 일어나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어젖히는 장면...


어찌나 장면 전환이 빠른지 마치 우리네 삶을 한 편의 영화로 찍고 난 후 특별히 인상 깊었던 몇 장면만을 골라서 돌이켜보는 느낌마저 든다. 사람이 죽을 때는 삶의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한다. 지나간 삶을 돌이켜보니 그 모든 순간순간들이 그야말로 수유須臾라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삶은 스피디하다. 순식 간에 지나가 버린다.


둘째, 행동이 모순적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논자論者들은 동파의 기이한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그 점만은 금방 이해가 되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상당히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논자들은 아니라는 말인가? 내가 왜 그랬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모순된 행동을 절대 저지른 적이 없단 말인가? 그렇게 주장한다면 위선이다. 혈액형이나 성격 유형에 따라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실 모든 사람은 다 마찬가지다.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다.


셋째, '우연'이다. 동파는 후편을 염두에 두고 <전적벽부>를 쓰지 않았다.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았기에 내용과 형식에 있어 서로 짝을 이루게 글을 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선 '적벽'이라는 동일한 공간을 또다시 찾아가 또 한 편의 글을 써야만 하는 창작 동기의 타당성 부여 작업이 쉽지 않다. 그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동파가 찾아낸 창작 동기는 ‘우연’, 그 삶의 신비로운 만남이었다.


우연’, 그 삶의 신비로움


동파가 초겨울의 밤중에 적벽을 다시 찾은 것은 오로지 ‘우연’ 때문이었다. 그날, 음력 시월 보름날 밤의 그 하얀 달만 아니었더라도, 황니黃泥 고개를 넘는 동파에게 두 사람의 동행만 없었더라도, 그 일행 중 한 명이 그날 저녁 농어만 잡아 올리지 않았더라도, 그리고 남편을 생각하는 아내의 세심하고 따스한 마음 씀씀이만 없었더라도, 불후의 명작 <후적벽부>는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연’은 다분히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요소를 띠게 마련이다. 계획된 우연은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파는 '우연'이라는 이 즉흥적 요소로 전편全篇을 이끌어 나가는 뼈대를 삼고 있다.


나뭇잎 모두 떨어진 서리 맞은 대지를 비추는 하얀 달빛! 황량하고 청승맞은 이 풍광을 둘러보던 동파는 문득 마음이 즐거워졌단다. 그래서 그 오밤중에 갑자기 술과 안주를 찾고, 또 갑자기 적벽으로 유람 나갈 생각이 들었단다. 그러나 정말로 즐거웠을까?


잠시 필자의 경험을 말씀드리겠다. 때로 학생들은 인간과 우주의 이치를 설명해 주는 내가 제법 의연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늘 웃으며 행복하실 수 있나요? 묘한 질문을 받기도 한다. 아니다! 그럴 리가 있는가! 나도 여러분과 똑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여전히 힘들고 아프다. 그래서 이 강의의 내용을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들려주며, 그때마다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 거다... 그렇게 고백했다.


혹시 동파도 그랬던 것은 아닐까? 애당초 그가 돌연 적벽을 찾아오고 싶었던 이유는 어쩌면 황니 고개의 황량한 초겨울이 너무도 가슴 시렸던 탓인지도 모른다. 기약 없이 이어지는 궁핍한 귀양 생활, 어느덧 찾아온 ‘지천명’의 나이…. 필경 가슴 한 구석이 스산해졌을 그는, 혹시 <전적벽부>에서 자신이 설파했던 그 우주와 삶의 철리를 같은 장소에서 다시 한번 마음에 간직하여 스스로 위로를 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적벽은 지난가을 자신이 ‘존재의 항상성恒常性’을 설파한 그 공간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수량이 줄어든 겨울의 장강... 그 수면 위에서 바라본 적벽은 그만큼 더 까마득히 높아 보였고, 절벽 끝에 걸린 보름달은 그만큼 더 하염없이 작아 보였을 것이다. 혹시 자신이 설파했던 ‘항상성’이라는 철리도 덩달아서 아득하게 느껴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동파는 외친다.


도대체 해와 달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고 이렇게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강산江山이 변한 걸까!     


이럴 수가! 제아무리 마음대로 가져다가 쓴다 한들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조물주의 무진장한 보고인 줄 알았는데, 불과 석 달만에 이렇게 철저히 바뀌다니! 그 변모한 모습을 대한 동파는 적벽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헤집고 다닌다. 마치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남아있는 어느 한 곳만이라도 꼭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조물주에 대한 항변의 외침일까? 그는 돌연 고함을 지른다. 절규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변해 있음을 확인한 것인지, ‘슬며시 슬퍼지고’, ‘문득 두려워진’ 그는 어디론가 도피하고 싶은 심정에 허겁지겁 배에 올라 황급히 장강 한 복판으로 나아간다.


그때였다. 삶의 신비로운 만남, ‘우연’이 또다시 동파를 찾아온다. 어디선가 학 한 마리가 날아와 동파가 탄 배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혹자는 이 ‘우연의 만남’을 동파의 환상이라고 말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동파의 또 다른 기록을 보면, 그날 밤 학이 스쳐 지나간 그 ‘우연의 만남’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 인간들의 삶에는 얼마나 많은 ‘우연’이 존재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 ‘우연’의 의미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삶을 흘려보내기가 일쑤다. 하지만 동파는 자신이 만난 그 ‘우연’의 의미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삶이란 과연 우연일까 필연일까.


도사로 변한 학의 정체


'학' 이야기를 마저 해보자. '학'은 동파의 꿈속에서 도사의 모습으로 변하여 등장한다. 그런데 '학'이 두 마리라는 판본도 있다. 반면에 도사는 모든 판본이 한 명으로 나온다. 여기서 엉뚱한 논쟁이 등장한다.


[하나 파] 모든 판본이 도사가 한 명이라잖아. 그니까 '학'도 한 마리라고!

[ 둘 파 ] 어떤 판본은 '학'이 두 마리라잖아. 그니까 도사도 두 명이어야 한다고. 적벽에 날아온 '학' 한 마리는 황주로 귀양 온 동파 자신 같아 보이잖아. 그러니까 꿈속에 나타난 도사는 두 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면 너무나 유치한 논쟁이다. [제1단락]부터 [제3단락]까지는 '현상의 세계'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도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제4단락]은 다르다. 시간이 상대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이야기다.(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원리)


나는 30년이 넘게 강단에 섰다. 처음에는 모든 학생들의 이름을 줄줄 외워서 출석을 부를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학기 단위로 세월이 휙휙 지나갔다. 20년이 지나가니 슬슬 세월 감각이 무디어졌다. 30년이 되니 지금 강의실에 앉아 있는 이 학생이 30년 전의 그 학생이 되었다. 숫자도 마찬가지. 그동안 인연을 맺은 학생의 숫자가 백 명이면 어떠하고 천 명인들 무슨 상관이랴!


시간이 무너진 세계에서는 현상 세계에서의 공간과 물질의 개념도 무너진다. 물이 수증기로 구름으로 재배치되는 것처럼, '학'이 인간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그 세계에서 도사가 한 명이면 어떻고 두 명이면 또 어떠랴! 그러고 보면 절벽을 기어오르며 안간힘을 쓰다가 못내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동파의 그 모습은, 바로 <전적벽부>에서 수유 같이 짧은 삶을 슬퍼하며 퉁소 불던 ‘객’의 이미지가 아니던가!


전편에서 동파가 맡은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시라. 삼라만상은 관찰자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라고, 그러니 '불변'의 각도에서 바라보는 달관과 초월의 자세를 배우라고 타이르는 현자賢者의 역할 아니었던가? 그 역할을 후편에서는 학과 도사가 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하, 그렇구려! 이제 알겠소! 지난밤에 길게 울며 내 옆을 스쳐 날아간 그 학鶴이 바로 그대가 아니시오?”


꺼억- 울며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났다가 이내 구름 밖으로 너울너울 사라지는 '학'!

도사는 바로 그 '학'이었다. 그리고 <전적벽부>에서의 동파, 그 자신이었다.

그 연장 선상에서 말해 볼 수도 있겠다.


그 '학'은 바로 '우연' 아닐까?


우리가 삶에서 우연히 만났던 그 모든 존재들 아닐까?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이며, 아껴주고 사랑해 주신 그 모든 분들 아닐까? 동시에 내가 미워하고 나를 미워한 그 모든 존재일 수도 있겠다. 이름조차 모르고 스쳐 지나간 사람일 수도 있겠고, 산길에서 만났던 꿩이나 노루,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일 수도 있겠다. 그 '학'은 우리들 삶에서 만났던 그 모든 '우연'의 상징은 아닐까?


불교에서는 그 '우연'을 '인연因緣'이라고 부른다. <09. 이선균과 '아득히 먼 곳'>에서도 말했거니와, 불가 사상은 '과학'이다. 권선勸善의 기본 이치는 '인과응보 因果應報'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뜻. 다시 말해서 인간의 삶은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개척된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삶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이야기다. 그게 불교의 기본 사상이다.


그런데 '인연'은 '필연'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필연/과학'의 범주에 속하면서도 그 경계를 넘어선, 보다 고차원 영역의 다분히 신비스러운 개념이다. '인因'이란 내가 씨를 뿌리는 것. '연緣'은 내 주변 존재들이 씨를 뿌리는 행위를 말한다. 그 둘이 절묘하게 만난 것이 '인연'이다. 


여기까지는 '필연'이다. 어차피 그 어떤 '인'과 그 어떤 '연'은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인'과 그 '연'이 만났단 말일까. 왜 하필 '나'는, 왜 하필 '20세기'에, 왜 하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났을까. 이건 '필연'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불경에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는 말이 있다. 수백 년 수천 년 만에 물 위에 한 번 올라오는 심해의 눈 먼 거북이가 있다 치자. 그런데 그 넓은 바다에 나무판자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 치자. 그런데 그 나무판자에 조그만 구멍이 뚫려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눈 먼 거북이가 수백 년 수천 년 만에 수면에 머리를 내밀었는데... 하필이면 그 나무판자의 그 구멍이었다 치자. 그게 바로 '인연'이라는 이야기다. 잡아함경經, 제15권 맹구경盲龜經》참조. 그 '인연'은 '필연'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라서 '인연' 이야기를 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지금은 하나만 말하자. '인연'은 '필연'이면서도 '우연'이다. 그게 불교의 불이不二 사상이요, 동아시아의 일원론 패러다임이다. 동파가 <후적벽부>에서 슬라이드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는 '삶'이란 현상 중에서 가장 큰 특색이다.




내가 <전적벽부>보다 <후적벽부>를 더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온기가 있는 현상 세계 이야기여서이고, 둘째는 심오한 주제를 스토리 안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후편의 문학적 가치가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들어도 우선 재미있지 않은가?


<전적벽부>는 죽음의 불멸을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역시 차가운 소재다. <후적벽부>는 삶의 현상을 이야기한다. 얼기설기 인연에 얽혀 있고, 어리석고 모순에 가득 차 있지만 따스한 소재다. 《법화경》은 말한다. 고결한 연꽃은 더러운 연지에서 피어난다고, 깨달음은 어리석은 중생의 삶 속에서 탄생한다고 말한다. 현상 세계를 더욱 중시하는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지 않는가. 나는 <후적벽부>를 더 사랑한다.




정리해 보자.


( 1 )

<전적벽부>는 '본질'의 문제를 다루었고, <후적벽부>는 '현상'의 문제를 다루었다.

<전적벽부>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설명했고, <후적벽부>는 '삶'의 현상을 특징적으로 보여주었다.


( 2 )

<후적벽부>가 보여준 '삶'의 특징은...

① 수유須臾: 너무나 빠르게 지나간다.

② 모순: 합리적이지 않다.  

③ 인연: 삶의 그 모든 만남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 3 )

동파의 문학은 과학이다. 그것도 최신 현대물리학인 양자역학이다. 다른 점? 양자역학이 수치數値를 통한 정량적인 탐구라면, 동파 문학은 쉽고 재미있게 표현하려는 정성적인 접근이랄까...




[ 표지 그림 설명 ]

◎ 남송 시대 조백숙 趙伯驌(1124~1182)의 그림을 명대의 문징명 文徵明(1470~1559)이 모방해서 그린 <후적벽부도>의 일부.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https://theme.npm.edu.tw/exh107/npm_anime/RedCliff/ch/index.html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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