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생각해 보니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오늘 올릴 글을 '서랍'에서 꺼내어 읽었던 생각이 난다.
그래, 맞아. 잠깐 깨어난 적이 있다. 그때 핸드폰 화면에서 뭔가 내 의사를 물어본 것 같다.
비몽사몽 간이지만, 아마 '저장' 단추를 눌렀던 것 같은데... 새벽에 일어나 열어보니...
'글이 삭제되었습니다'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용용 죽겠지, 혀를 내밀며 약을 올리고 있다.
기가 막히다. 하루 종일 멍하니 있었다.
<동아시아의 고전과 글쓰기> 매거진에 매주 목요일에 글을 올리는 것은 누구와 약속한 것은 아니다. 그냥 나 스스로 그렇게 하겠노라 다짐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미 숱하게 경험해 본 일이다. 예전에 사이버강의를 하면서 글을 날려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럴 때마다 힘이 쪽 빠진다. 이번에는 그 충격의 강도가 훨씬 심하다. 맥이 풀려서 다시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멍하니 있었다.
저녁 9시 무렵.
문득 소동파가 쓴 <합포 가는 길 記過合浦>이란 글이 뇌리에 스쳤다.
쓰러질 듯 앉아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져 버린 글을 하염없이 붙잡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새롭게 떠오른 동파의 그 얘기를 먼저 풀어놓는 게 '인연'이 아닌가 싶었다.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동파는 만년인 58세에 혜주惠州로 귀양을 간다. 오늘날 홍콩의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에는 개척이 전혀 되지 않은 밀림 속의 오지였다. 황주 유배 때는 그나마 식솔들도 있어 위로가 되었지만, 이때쯤에는 아내도 죽고 애첩 조운朝雲도 유배지에 도착하자마자 열대병으로 죽었다. 이제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은 오직 막내아들 소과蘇過 뿐. 혜주 유배 생활은 예전 황주 유배생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외롭고 힘들었을 것이다.
모진 유배생활에 간신히 적응할 무렵, 정적들은 또다시 그의 유배지를 더욱 머나먼 오지로 옮긴다. 61세 노인 동파의 새로운 유배지는 중국 대륙 최남단의 섬인 해남도海南島의 담이儋耳라는 곳이었다. 당시 ‘야만인’들인 여족黎族들이 살았던 해남도는 습하고 무더운 열대 기후에 먹을 것은커녕 정갈한 물도 구하기 힘든 오지 중의 오지로, 중원에서 관리를 지냈던 이를 여기로 유배 보낸 것은 동파의 경우가 처음이었다.
더구나 현지의 관리들이 조금이라도 호의를 베풀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중앙 정부에서 반드시 가혹한 보복을 했으므로, 그 어떤 도움을 얻을 수도 없었던 동파는 늘 기아飢餓 선상에서 허덕여야만 했다. 그야말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동파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아래의 기록을 읽어보자.
나도 이제 바다로 쫓겨났으니 사지死地에 조금 더 가까워진 셈이다.
마땅히 이 땅에서 깨달음의 아라한阿羅漢 열매를 거두어야 하리라.
吾竄逐海上, 去死地稍近, 當於此證阿羅漢果。
<수선사의 방생 壽禪師放生> 중에서.
해남도에서의 유배 생활을 시작할 때의 각오다. 죽음을 예감하고 이런 삶의 시련을 통해 반드시 '깨달음'을 얻겠노라고 다짐한다. 유배 생활 2년 째인 62세에 쓴 아래의 글은 더욱 감동적이다.
동파거사는 해남도에 옮겨 살게 되었다. 우환이 겹친 나머지 무인년戊寅年 9월 마지막 날, 여생의 길흉화복을 판단해 보고자 천경관天慶觀 북극진성北極眞聖을 찾아가 영험한 점괘를 얻고자 하였다. 점괘는 이러했다.
믿음으로 도道에 부합하라. 지혜로 법의 첫 번째를 삼아라.
이 두 가지와 헤어지지 않으면, 목숨이 연장될 수 없도다!
읽어보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신도信道’와 ‘지법智法’의 두 가치관과 헤어질 수 없다는 뜻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써서 깊숙이 보관하려 한다. 나, 소식蘇軾은 공경한 마음으로 아래와 같이 생각을 정리해본다... 중략...
도道는 남들이 몰라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 자신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법法은 그 법을 만들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력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믿음으로써 도에 부합하도록 하면 정신이 하나로 모이고, 지혜를 법의 최우선으로 삼으면 법에 생명력이 생긴다. 이리되면 속세를 떠나도 되리라! 구태여 목숨 연장에 연연해 무엇하랴!
참으로 감동적인 글이다. 동파의 말년은 비참했다. 공직은 모두 박탈되고 사랑하던 이들과 헤어져 머나먼 오지, 해남 땅에서 고난의 유배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자신의 여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했던 동파는 마음을 정성스럽게 하고 조심스레 점괘를 뽑아본다. 점괘를 뽑아본 동파는 모골이 송연해진다. 도道와 법法의 가치관과 헤어지지 않으면 목숨이 연장될 수 없다니! 세상에, 이렇게 불길한 점괘가 또 어디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동파처럼 어려운 곤경에 처해 이런 점괘를 뽑게 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아무리 옳다해도 십중팔구 자신의 가치관을 포기하지 않을까? 절망에 빠져 우울증에 걸리거나, 무속인 따위를 찾아가 뭔가 이름 모를 신비한 힘에 의존하려 하지 않을까?
그러나 동파는 잠시 몸을 떨고는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깊이 사색에 잠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원칙이 무엇인지 재확인한 후, 그 원칙을 지극한 정성으로 지켜나갈 것을 다짐한다. 동파는 말한다. 남들이 몰라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 자신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자고.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목숨 연장에 집착하지 않으리라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장면이다.
기왕 이 무렵 동파가 쓴 글을 읽기 시작했으니 하나 더 살펴보자. 귀양 온 지 4년 째로 접어드는 해의 설날 아침에 명상호흡을 한 후에 쓴 짧은 글이다.
원부元符 3년은 세차歲次가 경진년庚辰年이다. 그해 정월 초하루는 무진일戊辰日이요, 그날 진시辰時는 병진시丙辰時이다... 중략...이 시각부터는 꼭 황중黃中의 기운을 키워야 하리라. 이 시간이 지나면 앞으로 또 늘 풀죽을 쒀먹어야 하지 않는가. 하루 종일 좌선한 채 묵언默言을 하고 황중黃中을 키우는 수양을 하였다. 바다 바깥으로 귀양 나와 지내지 않았다면 어찌 이 같은 경사를 맛볼 수 있었으랴!
문명 세계를 벗어난 절해의 고도로 귀양 온 지도 어언 4년째. 그해 설날 아침, 동파는 낡은 초막집에서 좌선을 하며 자신이 처한 '시간'의 의미를 곰곰 생각해 본다. 그의 결론은 황중黃中, 즉 내적內的 수양을 더욱 쌓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다가올 새해에는 더욱 모진 굶주림의 삶이 기다리고 있음이 예측되었으므로.
기막히게 슬퍼져야 할 그 순간, 동파는 그러나 이 시련을 내적 수양을 연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오히려 즐거운 경사慶事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모진 상황을 절실하게 음미해 볼수록 탄복을 금할 수 없다. 도대체 그의 정신세계의 경계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그런데, 그런 동파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었다. 자기 자신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자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아주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일이었다. 대체 동파는 무엇을 두려워했을까?아래에 소개하는 <합포合浦가는 길>을 읽어보시라.
동파는 64세 되던 해의 여름에 사면령을 받는다. 철종哲宗이 죽고 휘종徽宗이 새로운 황제로 등극한 것이다. 병들고 늙은 동파는 천행으로 살아서 해남도를 벗어나게 되지만 귀로에서도 큰 고생을 한다. 천신만고 끝에 바다를 건너니, 이번에는 큰 홍수로 북상하는 길이 끊겨 돌아갈 길이 막막했다. 결국 동파는 다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광서성廣西省의 합포合浦로 우회하는 길을 택한다. 이 글은 그때의 기록이다.
해강에서 합포로 가는 길이었다. 며칠 동안 큰 비가 내렸다. 다리가 대파되고 물이 끝없이 이어졌다. 흥렴촌興廉村 정행원淨行院 어귀에서 쪽배를 타고 관아의 숙소에 도착했다. 듣자 하니 여기부터 서쪽 지역은 모두 큰 물이 들어 더 이상 다리도 없고 배도 없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단족蜑族(수상생활을 하는 현지 소수민족)의 배를 타고 바닷길로 가면 백석白石에 도착할 수 있다고 권했다.
유월六月 그믐날. 달도 뜨지 않은 날이다. 망망대해에서 닻을 내리고 자게 되었다. 하늘과 바다가 서로 만난 수평선, 별들이 하늘에 가득 차 있다. 일어나 앉아서 사방을 둘러보니 탄식이 나왔다. “내 어찌 어려움을 이리 자주 겪을꼬! 서문徐聞으로 건너올 때도 그리하였거늘 여기서 또 이런 재난을 겪는단 말인가!”
어린 아들 과過는 옆에서 코를 골며 자느라, 불러도 대답이 없다. 내가 편찬한 《서전書傳》《역전易傳》《논어설論語說》을 모두 지니고 왔으니, 이 세상에 다른 판본도 없건만…. 책을 어루만지니 탄식이 나왔다. “하늘이 이 어려움에 굴복하게 하지 않을 것이야. 우리들은 이 바다를 꼭 건널 것이야….”시간이 지나니 과연 그러했다. 7월 4일, 합포 땅에서 기록한다. 때는 원부元符 3년이다.
동파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뜻을 펼친 적은 별로 없었고, 괴롭고 억울한 유배생활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조정의 사면령을 받고 해남도에서 육지로 귀환하는 길마저 파란만장하기 짝이 없다.
동파는 현지 수상족水上族의 쪽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며 바다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다. 끝없는 수평선의 광활한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의 세계는 흡사 <적벽부>에 등장하는 장강長江의 밤하늘 같다. 그러나 그 심경이 같을 수가 없다. <적벽부>는 유배생활 도중에 쓴 글이고, 이 글은 유배를 마치고 돌아올 때의 기록이지만, 46세의 중년이 유람 나갔을 때의 정서와 64세의 노인이 재난을 피해 힘들게 귀환하는 심정이 같을 수가 없다.
동파가 건넜던 대륙과 해남도 사이의 경주해협. 왼쪽이 해남도. 오른쪽이 대륙이다.
무사히 육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 전혀 기약할 수 없는 위급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병들고 늙은 동파는 무엇을 두려워했는가.
그가 두려워한 것은 목숨이 아니었다. 글이었다.
자신이 쓴 글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하고 있다.
평생 동안 연구한 학문적 업적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고 그대로 수장되지나 않을까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공연히 눈물이 나오려 한다.
글이란 경국經國의 대업大業이요, 불후不朽의 성사盛事다.
蓋文章者, 經國之大業, 不朽之盛事.
- 조비曹丕,《전론典論 논문論文》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동파에 비길 일은 아니지만, 가난하고 초라한 수준일망정 사라져 버린 나의 글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만에 하나, 브런치스토리 글방이 사라져 버린다면? 상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진다. 눈물이 나온다.
영원불멸까지는 아니로되, 부디 브런치스토리가오래오래 존재해 주길 간절히 바래본다.
또 하나의 새벽이 지나가고 있다.
허정응신 虛靜凝神,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하나로 모아야겠다.
[ 덧글 ]
◎ 동파는 그다음 해인 65세에 강남땅 상주常州의 어느 객사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끝내 정처를 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