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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Feb 08. 2024

14. 동아시아의 창세기 일장 일절

『시경詩經 · 관저關雎』감상


십삼경주소를 읽으셨나요?      



1972년, 잠자던 사자 중국이 드디어 ‘죽의 장막 Bamboo Curtain’을 걷고 일본과 국교를 수립했다. 그 당시 일본 수상은 타나카 가쿠에이 田中角榮. 그가 마오저뚱毛澤東과 정상 회담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날아갔다.


9월 27일 아침, 쭝(→)난(↗)하이(↓), 중남해中南海에 있는 마오저뚱의 거처에 들어선 타나카는 자못 긴장이 되었다. 중국을 이끄는 최고 지도자들이 집단으로 모여 산다는 신비의 베일에 가린 장소, 쭝난하이가 풍기는 묘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메마씨떼! 처음 뵙겠습니다.”  

“환(→)잉(↗)화닝! 환영합니다!”     


양국의 정상은 정중하게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본격적인 회담에 앞서 잠시 덕담德談을 나누는 시간이다. 그런데 마오저뚱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타나카에게는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비서가 곧 무엇인가를 양팔에 한 아름 가져와 두 사람 사이의 작은 책상 위에 공손히 올려놓았다. 한 세트의 책이었다. 어리둥절해진 타나카는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선이 굵은 마오저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닌(↗) 여/메(↗)여오 니엔(↘)구어 쩌(↘)타오/쑤(→)?”

“您有沒有念過這套書?”

“수상 각하께서는 이 책을 읽어보셨는지요?”


타나카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 제목은 《십삼경주소 十三經注疏》!

펼쳐보니 깨알같이 작은 글씨들이 단 한 칸의 공백도 없이 빽, 빽, 이, 들어차 있었다.

한자, 아니, 한문이었다.

무슨 말인지 단 한 구절도, 정말로 단 한 구절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책 제목조차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타나카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왔다. 마오저뚱이 책을 물리며 두 마디 짧은 위로(?)의 말을 던졌다.  

    

“하하, 메이(↗)꽌(→)시! 만(↘)말/라이(↗)!”  

“哈哈, 沒關係, 慢慢來!”

“하하, 괜찮아요. 천천히 하시죠, 뭐!”      


이렇게 중요한 장면에서 멋진 임기응변은커녕 속수무책束手無策, 단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조롱 어린 비웃음이나 불러일으키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타나카는 생각할수록 얼굴이 벌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자.

도대체 마오저뚱은 왜 그런 질문을 던졌을까?

《십삼경주소》란 대체 어떤 책일까? 마오저뚱은 무슨 대답을 원한 것일까?


‘십삼경’이란 13권으로 이루어진 유교의 경전을 말한다. 그러니까 마오저뚱이 던진 그 질문은 유교의 경전을 읽어보셨나요? 그 뜻이 된다. ‘주注 footnote’는 그 경전에 대해 후세의 지식인들이 해설을 달아놓은 것을 말한다. ‘소疏’는 그 ‘주注’에다가 또 그다음 후세의 지식인들이 다시 또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마오저뚱이 타나카에게 던진 질문은 무슨 뜻이겠는가? 진짜로 그 책을 읽어보았냐는 뜻이겠는가? 중국 경학사經學史를 특별히 전공하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그 두터운 책을 완독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유교는 중국 역사를 이끌어 온 중국의 현실참여파 지식인들의 마인드이다. 그러므로 《십삼경주소》는 중국 역사를 이끌어 온 현실참여파 지식인들의 머릿속에 담긴 생각을 한 곳에 모아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마오저뚱의 질문은 다른 뜻이 아니다.


당신, 당신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지도자이지? 나는 우리나라를 이끌어나가는 지도자야. 당신, 나를 만나자고 왔지? 우리 중국과 수교를 하고 싶다며? 그럼, 내 머릿속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시는가? 내 생각을 공감할 수 있으신가?


그렇다. 《십삼경주소》를 읽어보셨습니까? 그 말은 다른 뜻이 아니다.

“네가 중국을 아느냐?” 바로 그 뜻이다. 중국과 국교 수립을 하러 왔다는 당신은 과연 중국을 이끌어나가는 지식인의 마인드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 그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지도자들, 즉 자신과 함께 마음을 열고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수준에 오른 사람인가, 그걸 판단하고자 던진 질문인 것이다. [ 주1 ]  


앞으로 우리가 다방면에 걸쳐 중국과 접촉하다 보면 그와 유사한 질문을 수없이 받을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여야 그들이 입을 쩍 벌리며 무릎을 치고 벌떡 일어날 것인가?




여기서 한번 더 생각해 보자.

마오저뚱이야 그렇다 치고, 필자가 지금 이 시점에서 독자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또 뭘까?

중국 이야기를 하자는 게 목적이 아니다. '우리'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십삼경주소》는 유교의 경전이다. 그런데 유교가 중국만의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가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중국과 우리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동일한 한자 문화권 안에서, 같은 생각의 패러다임으로 동일한 교육 방법과 학문과 문학을 공유해 왔다. 그러니까, 《십삼경주소》를 읽어보셨습니까? 그 질문은, 당신은 '우리의 것'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우리에게는 그 뜻이나 마찬가지다.


독자 여러분께 여쭤보고 싶다. 여러분은 우리 동아시아에 대해 얼마나 아시는가? [ 주2 ] 동아시아의 자연환경은 어떠한지, 그래서 어떤 인문환경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 지리 역사 문화 학문 문학 등등은 어떠한지, 아마도 그다지 많지는 않으실 것 같다. 브런치스토리에 올라온 글만 읽어봐도 그 지식이나 정보의 샘물은 주로 서쪽 동네에서 흘러온 것 일색이다. 당연하다. 우리의 제도권 학교에서 그렇게 교육했기 때문이다. [ 주3 ] 


나는 브런치스토리 작가님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한다. 번뜩이는 재기가 넘쳐흐른다. 어떤 분들은 '크리에이터 creator'라는 단어도 사용하시던데 정말로 공감한다. 그런데, 그 천재적인 작가님들에게도 고민이 있어 보였다. '글감'이 부족해 보였다. 솔직히 나는 그 재주, 그 필력이 너무 부럽다. 나는 동아시아에 대해 하고픈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필력과 체력이 부족하여 따라갈 수가 없다. 정신을 집중하여 글 한 편을 제대로 쓰자면 수명이 단축되는 느낌이다. 나는 천상 '작가'가 재목은 아닌 것이다.


결론: 겸허한 마음으로 '작가'라는 호칭을 반납한다. 그 대신 작가님들의 창작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글감 제공 차원에서 다양한 '동아시아의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알려드리고자 한다. 그럼, 그게 그거지, 전과 뭐가 달라졌느냐고 물으시는가? 다르다. 글의 완성도나 수준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다. 그 대신 내용을 보셨으면 좋겠다. 어디까지나 여러분에게 글감 제공 차원이므로, 그 점을 양해해주시고 내용만 흡수하여 널리 이용해주시면 졸겠다. 그래서 작가님들께서 좋은 글을 창작하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큰 기쁨이겠다.


각설! 《십삼경주소》를 읽어보셨습니까? 그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

다시 말해서 동아시아의 전통 패러다임을 대표할 있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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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1 ]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 출발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이 중국과 수교할 때도 비사秘史가 있다. 자못 창피하기까지 한 그 에피소드는 또 다른 기회에 말씀드리겠다.


[ 주2 ] 우리는 흔히 '동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필자는 '동아시아'라고 말한다. 학계에서도 점차 '동아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동양'이라는 단어에는 동아시아 전체, 특히 한반도를 일본화하겠다는 침략 야욕이 숨어있다. 그 사실을 확인할수록 섬뜩하다. 정확한 어휘 사용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일본제국주의가 번역한 동양 · 문학 · 철학 · 종교 등 인문 분야 대부분 어휘에는 모두 이런 언어의 함정이 숨어있다. 따라서 필자는 과거에 흔히 사용했던 '동양학'이라는 말을 버리고 '동아시아 학문'이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참고: [우리는 동양인이 아니다] 브런치북. 시간 없으신 분은 <우리가 동양인이라고?>만이라도. ^^


[ 주3 ]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인문학'은 우리 것이 아니라 '서양 학문'이다. 일본이 우리의 것인 동아시아 전통 학문을 말살하고 대체한 것이다.

참고: <우리 것으로 학문하기 (1)>, <우리 것으로 학문하기 (2)>

<인문학 엑소더스 (상)>, <인문학 엑소더스 (하)>,

<동양학 엑소더스 (상)>, <동양학 엑소더스 (하)>

<권위주의 엑소더스>, [문학으로 인문학 톺아보기]




동아시아의 창세기 일장 일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미켈란젤로, <천지창조>의 일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온라인 바티칸 미술관에서 발췌.

거룩한 빛과 함께 장중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성경』의 창세기 1장 1절이다. 2천여 년 동안 서구인의 생각 패러다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구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아시아는 어떨까? 창세기 1장 1절의 영향력에 비견할 만한 것이 있을까? 물론이다.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를 이끌어 온 유교의 경전, 《십삼경주소》가 어떻게 시작하는지 살펴보면 되지 않겠는가?

 


關關雎鳩, 在河之州窈窕淑女, 君子好逑。(이하 생략)

관관저구, 재하지주. 요조숙녀, 군자호구...     



『시경詩經 · 관저關雎』의 첫 구절이다. 유교의 경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교는 2천 년 넘게 동아시아 역사를 이끌어온 패러다임이다. 『시경』은 그 유교의 모든 경전 중에서 맨 첫 번째이고, 「관저」는 그중에서도 맨 처음 나오는 노래니까, 바로 이 구절이 동아시아 학문의 창세기 1장 1절인 셈이다.


유교의 경전은 오늘날에는 '13경 十三經'이지만, 공자의 유가儒家 당시에는 '육경 六經'이었다. [ 주4 ]  유가의 목표는 대동사회의 구현이다. 그 실천을 위해 《시詩》 · 《서書》 · 《예禮》 · 《악樂》 · 《춘추春秋》 · 《역易》등 6종류의 책을 경전으로 삼았다. 바로 이 책들이 당시 '학문'의 대상이었다.


모두 공자가 치밀한 의도를 가지고 편찬한 책이다. 그 첫 번째 경전이 《시》다. 문학 책이다. 놀랍지 않은가? 문학 서적이 경전의 하나란다. 게다가 모든 경전의 맨 처음, 첫출발이란다. 문학이 바로 모든 '학문'의 시작이요, '학문하기'의 방법론이라는 이야기다. 왜? 문학이 지니고 있는 초콜릿 같은 순기능 때문이다. [ 주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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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4 ] 유가儒家유교儒敎는 한 글자 차이지만 내용적으로 아주커다란 간극이 있다. 정리해 보자.

▶ '가家': 'family'. 삶과 우주의 원리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스승을 중심으로 모인 가족적 모임. 인지 체계를 중시하므로 사상, 학문의 성격이다.

▶ '교敎': 'group'이다. 스승의 사후에 제자가 스승을 신비화하여 교주로 삼고 숭배하는 대규모 종교 집단. 교단을 이끄는 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스승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 예컨대 석가모니의 불가 사상과 불교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공자의 유가 사상과 유교의 내용은 큰 간극이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유교는 역대의 통치자들이 공자의 이름을 팔아서 만든 것이다. 노장의 도가 사상과 도교의 차이가 가장 크다. 노자의 이름만 도용했을 뿐, 완전히 다르다. 자세한 이야기는 커밍순!


[ 주5 ] 동아시아의 문학文學과 서구의 literature는 큰 차이가 있다. [브런치] <우리 '문학'은 온유돈후> , [브런치북] [문학으로 인문학 톺아보기] 참고.




공자에게는 “정리하되 창작하지 않는다 述而不作”는 글쓰기 원칙이 있었다. 자신은 문화의 여러 분야에 있어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주요 서적의 정리 정돈만 시도할 뿐, 감히 문명의 최초 전기를 마련한 선왕이나 영웅들처럼 무無에서 유有로의 창조를 시도하지는 않겠노라는 겸허한 학문적 자세를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세심한 안배가 들어간 편찬 작업에는 그 어떤 창조 행위보다 더 심원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후세에서는 그것을 '미언대의 微言大義'라고 불렀다. 짧고 사소한 표현 같지만 그 속에 심원한 의미가 담겨있다는 뜻. 으음, 공자님이 이 부분에 숨겨놓으신 의미가 대체 뭘까? 후세 학자들은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그 의미를 찾아 헤맸다.


『시경 · 관저』도 그중의 하나였다. 당연했다. 모든 경전과 모든 학문의 첫출발인데, 그 상징성이 어찌 아니 크겠는가! 그런데 점잖으신 선비님들께서는 우리의 공자님이 떠억~ 하니 모든 경전의 맨 처음에 올려놓은 그 노래 가사가 어째 영 마뜩지 않다. 이 양반들이 왜 그러시는지, 우선 대충 해석해 보자.


꾸욱~ 꾸욱~

물수리 새, 강가에서 우는구나.

요조숙녀는 군자가 그리워하는 짝이로다.   

關關雎鳩, 在河之州窈窕淑女, 君子好逑


[ 갑 ] 아니, 이게 뭐야?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아냐?

[ 을 ] 예끼 이 사람아! 공자님이 설마 하니 경전, 그것도 모든 경전의 제일 앞에 남자 여자가 거시기 응응 짝짓기 노래 가사를 갖다 놓으실 리가 있겠는가! 필시 주나라 문왕께서 왕비 태사太似님과 혼인한 과정을 노래한 것일 걸세.

[ 병 ] 아냐, 아냐. 그게 아니라 훌륭한 신하를 구해 나라를 잘 다스리고 싶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공자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릴 길이 없어 아직도 설왕설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공자가 『시경 · 관저』를 동아시아 모든 경전과 학문의 창세기 1장 1절로 삼은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사실은 별로 어렵지 않다. 진솔하기만 하다면, 공자님의 의도를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소오생의 해설로 있는 그대로 까놓고 얘기해 보자.

  


關關雎鳩, 在河之州窈窕淑女, 君子好逑

관관저구, 재하지주.  요조숙녀, 군자호구.     



關關雎鳩 관관저구 :

▶ ‘關關 관관’은 의성어다. 의성어란 ‘흉내 낼 의擬’, ‘소리 성聲’, 소리를 모방한 글자다. 소오생 버전으로 풀이하자면 ‘소리를 녹음한 글자’다. 옛날에는 녹음기가 없었으므로, 글자로 소리를 녹음해 놓았다는 뜻.

‘雎鳩 저구’는 '작은 물새'를 말한다.

▶ '關關 관관'은 물새가 우는 소리를 한자로 녹음해 놓은 거다. 발음하면 [guānguān ; 꽌꽌]이다. 그런데 물새가 꽌꽌~ 소리를 내며 울지는 않는다. 한자는 뜻글자라서 자연음에 가깝게 표기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렇게 이상하게 표기한 거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뛰어난 소리글자 한글이 있다. 한글로 번역할 때는 당연히 원음에 가깝게 표기해야 한다. 꾸욱~꾸욱~ 물수리 새.” 이렇게.     


窈窕淑女 요조숙녀 :

많이 들어보신 단어일 거다. 사전에 보면 "정숙하고 품행이 단정한 여자"라고 나온다. 아니다! 후세에 점잖은 선비님들이 갖다 붙인 새빨간 거짓말이다. 바로 이런 후세의 '조작질' 때문에 우리가 동아시아 전통 문학/문화에 대해 오해와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이다.


▶ '窈窕 요조’는 의태어다. 의태어란 ‘흉내 낼 의擬’, ‘모습 태(態)’, 그 어떤 모습을 모방한 글자다. 소오생 버전으로 풀이하자면 ‘그 어떤 모습을 찰카닥~ 사진 찍어놓은 글자’다. 옛날에는 카메라 같은 게 없었으므로 글자로 사진 찍어놓은 것이 의태어라는 이야기. 그렇다면 ‘窈窕 요조’는 어떤 모습을 사진 찍은 것일까?  ‘몸매가 기차게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다. 요새 말로 하자면 ‘쭉쭉빵빵’ 정도랄까? 헉, 이럴 수가! 하지만 레알이다. 팩트다.


‘淑女 숙녀’는 무슨 뜻? 정숙하고 품행이 단정한 여자? 아니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니까? 그녀가 정숙한지 아닌지, 스토커가 아닌 이상 어떻게 알겠는가. 숙녀는 원래는 그냥 여성을 일컫는 3인칭 대명사였다. 

‘君子 군자’도 마찬가지. 원래는 그냥 ‘남성’을 지칭하는 대명사였는데, 공자 시대에 ‘덕망과 학식이 높은 점잖고 어진 남자’의 뜻으로 인신引伸된 것이다. 서구의 lady & gentlemen이나 마찬가지!


窈窕淑女, 君子好逑 요조숙녀, 군자호구

‘好 호’ : 여기서는 ‘좋아하다’는 뜻의 동사다.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다. 아주아주 좋아한다. 밝힌다는 뜻.

‘逑 구’ : ‘짝, 배우자’라는 뜻.

窈窕淑女, 君子好逑 요조숙녀, 군자호구:

실감 나게 의역하면 “쭉쭉빵빵 저 아가씨, 총각들이 침 흘리는 짝이로세.” 그 뜻이다.

조금 순화시켜서 앞 구절과 리듬을 맞춰 번역하면... 하늘하늘 예쁜 여인, 총각들이 좋아한다.” 그 뜻이다.


다시 한번 이 첫 구절 전체를 진솔한 버전으로 번역해 보자.


꾸욱~ 꾸욱~

물수리 새, 강가에서 우는구나.

하늘하늘 예쁜 여인, 총각들이 좋아한다.   

關關雎鳩, 在河之州窈窕淑女, 君子好逑


동아시아의 모든 전통 학문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나저나 물새는 왜 우는 걸까? 우리말로는 ‘우는’ 거지만, 영어로는 ‘노래하는 singing’ 거고, 현대중국어로는 ‘상대방을 부르는(叫)’ 거다. 무엇을 위해서?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짝짓기가 하고파서 파트너를 찾는 구애求愛의 소리다. 동아시아의 창세기 1장 1절, 『시경 · 관저』는 남녀상열지사, 남녀 간의 사랑의 노래다. 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성性의 파트너'를 찾는 노래인 것이다. 너무 놀랍지 않으신가?


뭬야? 소오생 이자가 보자 보자 하니... 저놈은 빨갱이가 틀림없어, 점잖으신 독자 여러분은 노발대발하실 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유림 어르신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와 브런치스토리에서 쫓아낼지도 모르겠다. 앗, 뜨거 뜨거... 안 되겠군. ^^;;


다시 정정해서 말씀드린다. 임금님이 왕비와 혼인하는 노래일 수도 있고, 현명한 신하를 그리워하는 노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지구는 돈다. 하나만은 맹세할 수 있다. 『시경 · 관저』첫 구절에 대한 소오생의 해설은 학문적으로 추호의 과장이나 숨김이 없는 팩트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독자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 공자님은 대체 무슨 의도로 이렇게 ‘점잖지 못한(?)’ 짝짓기 노래를 모든 경전의 맨 앞에 안배하셨단 말일까? 여기가 동아시아의 전통 '학문'의 출발 지점이라니... 믿어지시는가? 그 '짝짓는 마음'에 숨겨진 미언대의微言大義는 대체 무엇일까? 독자 여러분의 고견을 듣고 싶다. 적극 참여해 주시길 앙망한다.


<다음 주에 계속>




◎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최근에 강경 작가님의 [연재 브런치북] [시 짓는 마음]을 무척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그중 <죄짓는 마음>은 특히 울림이 컸습니다. 문득 전쟁을 노래한 고대 중국의 민간 가요, 그리고 '죄'와 관련된 작품들을 자료로 제공해드리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브런치 작가용 동아시아 글감 방] 그런 걸 만들어서 모든 작가님들에게 제공해드리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견을 구합니다.


살펴보니 [시 짓는 마음]의 목록 중에 <짝짓는 마음>이란 글이 예고되어 있더군요. 혹시 작가님의 창작에 도움이 될까 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작가님들의 창작 활동에 영감을 제공하는 계기가 된다면 무한의 기쁨이 될 것 같습니다.


◎ 무연고 작가님의 [연재 브런치북] [보구씨의 평범한 하루]도 제가 인상 깊게 읽고 있는 작품입니다. '평범'은 동아시아 전통 패러다임의 대표 정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마무리 짓고 나면 그에 대한 자료도 올려드리고자 합니다.


◎ 이렇게 나눔과 소통의 글쓰기 방법을 일깨워주신 청년 클레어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표지 그림 ]

◎ 국보 제135호, 신윤복의 <월하정인 月下情人>. [문화재청 홈페이지]



참고: 『시경 · 관저』전문


꾸욱꾸욱 물수리새, 강가에서 우는구나.

하늘하늘 예쁜여인, 총각들이 좋아한다.

關關雎鳩, 在河之洲. 窈窕淑女, 君子好逑.


삐쭉빼쭉 마듬풀을 예서 제서 찾는구나.

하늘하늘 예쁜여인, 자나깨나 찾는구나.

얻을 수가 없으니 자나깨나 그리워라.

어찌할꼬 어찌할꼬 잠못이뤄 뒤척이네.

參差荇菜, 左右流之. 窈窕淑女, 寤寐求之.

求之不得, 寤寐思服. 悠哉悠哉, 輾轉反側.


삐쭉빼쭉 마듬풀을 예서 제서 따는구나.

하늘하늘 예쁜여인, 노래하며 다가가네.

하늘하늘 예쁜여인, 춤을 추며 기뻐하네.

參差荇菜, 左右采之. 窈窕淑女, 琴瑟友之. [ 주6 ]
參差荇菜, 左右芼之. 窈窕淑女, 鍾鼓樂之. [ 주7 ]


(소오생 번역. 인용하실 때는 출처를 밝혀주셨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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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6 ] 琴瑟 금슬: 현악기의 통칭  

[ 주7 ] 鼓 종고: 타악기의 통칭

琴瑟友之 & 鍾鼓樂之: 여러 가지 악기를 동원하여 노래하고 춤을 추는 장면. 점잖게 '벗을 한다(友)', '즐거워한다(樂)'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상당히 농염한 장면이다. 청춘남녀가 야외에서 만나 눈이 맞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악기가 어디서 난단 말인가? '풀을 딴다'는 표현과 함께 상상을 자극하는 신박한 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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