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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May 17. 2023

인문학 엑소더스 (상)

제1장 - '동양'의 함정 

19세기 후반, 일본은 메이지明治유신으로 근대화를 추진한다. 혹자는 메이지유신을 일본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강대국이 되었던 계기라며 굉장히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메이지유신은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로 아시아 각국을 침략하고 전쟁을 벌여서 결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얻어맞는 일본의 비극을 자초했으며, 오늘날 자민당 일당 정치와 극우 세력이 팽배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도올 선생 말대로 일본 정치의 건강성을 해치고 인류 역사가 과거로 퇴행한 현상인 것이다.


일본의 근대적 국가 체제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아마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일 것이다. 그가 일본 최고가액인 일만 엔 권 지폐의 주인공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위상이 증명된다. 그가 일본인에게 이렇게 추앙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 때문이다. 1885년, 그는 "중국과 조선이라는 아시아의 나쁜 이웃에서 벗어나 유럽과 똑같이 되자"라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는 서양 옷을 입고, 서양식으로 생각하고, 서양인이 되자고 요구한다. 이 말이 일본인에게 씨가 먹힌 것이다. 


'탈아입구론'과 '정한론'을 주창한 후쿠자와 유키치(1834 ~ 1901). 


여기에는 몇 가지 생각거리가 있다. 첫째, 열등감. 개인이든 국가이든 발전을 도모하겠다면 자신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외부의 장점을 받아들여 보완하면 된다. 그게 정상적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굳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철저히 서양인이 되겠다는 것은, 기존에는 장점이 하나도 없었노라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동방의 먼바다 끝 변방에서 살면서 동방 문화의 정수精髓를 맛본 적이 없었기에, 동방인으로서의 자긍심이나 정체성이 조금도 없기 때문에 가능한 발상이다. '나쁜 이웃'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열등감의 발로다.


둘째, 보복심. 열등감은 흔히 보복적인 공격 심리로 이어진다. 일본에는 오래전부터 조선 반도를 점령하고 대륙을 정벌하는 것만이 나라의 위용을 떨칠 수 있다는 소위 '정한론征韓論'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의 '탈아입구'는 '정한征韓'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셈이다. '입구入歐' 즉 '서구식 근대화'는 처음부터 조선 침략이 목표였던 것이다.


셋째, 신학문. 일본은 '탈아입구'의 구체적 실천으로 '서양학' 즉 '신학문'을 수입한다. 지금 우리가 가르치며 배우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신학문'이 아니라 아예 '학문'이라고 부른다. 아니다. '학문'과 '신학문'은 크게 다르다. '신학문'은 '서양학'이고, '학문'은 우리 전통의 것이다.


'신학문' 이전, 우리의 '학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학문'은 원래 '공자를 위시한 동아시아의 현인들이 우주와 대자연과 인간 세상을 바라보았던 생각의 틀’을 말한다. 그러나 19세기 무렵 동아시아 '학문'은 다분히 고리타분하고 현실과 괴리된 한학漢學 위주로 흘러서, 개혁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동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일본이 서구의 '신학문'을 받아들인 것이다.


'신학문'은 성격상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인지 체계를 다루는 '인문학 humanities',

또 하나는 행위 체계를 다루는 자연과학‧사회과학‧서양의학 등이다.


이중 후자後者는 근대 국가를 이루는 초석이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핵심이었고, 전통 '학문'이 거의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체계와 대립하거나 충돌되는 면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예컨대 일본인이 만든 영어‧수학‧물리‧화학‧지리‧경제 등의 학교 교과목 이름이나, 신문‧방송‧기자 등과 같은 근대 사회의 용어는 번역 용어가 아니다. 아예 전혀 다른 세상의 완전히 새로운 단어였다. 그저 어리둥절 신기한 대상이었을 뿐, 기존의 그 무엇과 크게 대립 충돌할 까닭이 없었다.




문제는 '인문학 humanities'이다. '인문학'은 쉽게 말해서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지 체계'다. 누구의 인지 체계일까? '인문학'이 서양 신학문의 하나니까 당연히 서양인의 인지 체계다. 그런데 동아시아인 들도 사람인 이상 나름대로의 인지 체계가 없을 리가 없다. 이천여 년 이상 전해져 내려온 그 인지 체계를 우리의 조상들은 '학문'이라고 불렀다.


뒤에서 다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동東과 서西'는 상반된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생각의 틀'이 정 반대에 가깝다. 따라서 동아시아인의 인지 체계인 '학문'과 서양인의 인지 체계인 '인문학'은 대립 충돌되는 면이 너무나 많다. 심지어 거의 정 반대라고도 할 수 있다.


메이지 시대 일본 학교의 합창단. 서양 옷을 입고 서양식으로 생각하고 서양인이 되자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교육 현장이다. 다토요하라 치카노부豊原周延(1838-1912) 판화.


일본 학자들은 그 엄청난 간극 gab을 모르고, 서양의 인문학 용어들을 기존에 있던 한자 단어로 졸속 번역했다. 예컨대 인문학‧문학‧철학‧종교‧신화 등등,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인문학 관련 용어들 속에는 '동과 서'의 상반된 인지 체계가 뒤죽박죽, 엉망으로 섞여있다. 번역의 오류가 인식의 혼돈과 오류를 낳으면서 점차 집단화된 것이다. 


어떤 것이 더 올바른 인지 체계일까? '학문'일까, '인문학'일까? 독자 여러분의 판단을 미리 강요하지 않겠다. 앞으로 꾸준히 계속 이어질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면 된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는 '교육'이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강요하고 세뇌했다. '인문학'을 교육한다는 것은 서양인의 인지 체계를 강요한다는 뜻. 동아시아인으로 살아온 전통의 인지 체계를 다 버리고 서양인이 되라는 뜻이다. '학문'의 선비 정신으로 무장된 우리의 조상들이 일본인들처럼 그를 냉큼 받아들였을까? 그럴 리가 없다. 조선 땅에서는 치열한 '생각'의 대립과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그 '인문학' 위에 자신들의 군국주의적 사고방식까지 덧씌웠다. 35년 동안 우리가 강요당했던 그 인지 체계는 '학문'도 아니고, 순수한 '서구의 인문학'도 아닌, 그저 '식민지학문'인 '동양학'일뿐이었다. 일제는 그 '식민지학문'을 '학문'이라고 강변하며 우리의 '지식인'들을 끊임없이 세뇌했다. '동양학' 교육은 우리가 살아온 전통의 인지 체계를 다 버리고 일본인이 되라는 뜻과 마찬가지다.  


해방 8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까지 그 '일본 제국 엘리트의 후예'들은 우리 한국인의 인지 체계를 더욱 혼란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일제 잔재의 청산은 정치‧경제‧군사‧사법 등에 있어 그 어느 분야에서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학문의 연구와 교육이다. 생각의 틀이 바로 잡혀야 언어와 행동의 문제를 발견하여 고칠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날 대한민국은 어떤 사회인가. 겉은 번지르르한데 그 이면은 끔찍하다. 전 세계가 온통 K-문화의 열풍에 휩싸여있다는데, 정작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해마다 자살률 1위다. 남북의 분단, 동서 간의 지역감정, 남혐과 여혐, 종교 간의 갈등, 정치와 경제의 극한 대립... 분열과 투쟁의 양극화 현상 속에서 삶의 가치와 의미도 모르고 목적지 없이 무한 질주만 하는 과잉 경쟁 사회, '웰빙'과 '힐링'에 목말라하는 병든 사회다. 


왜,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 ― 생각의 틀이 뒤틀렸기 때문이다. 그 생각의 틀을 올바로 정립시켜 주는 '인문학'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아니, 서양에서 건너온 '인문학'의 패러다임 자체가 지닌 문제점이라고 말해야 더 정확한 것 아닐까.




[ 표제 사진 ]

 ◎ 1889년 메이지 '천황'의 서구식 성문 헌법 공포. 다토요하라 치카노부 판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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