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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Nov 18. 2024

재회를 기다리며

평생 잊지 못해

 테라스 선베드에서 가을 정오의 햇빛을 받고 누워,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을의 한낮은 일광욕하기 안성맞춤임을 체감한다.


 폭발력 있는 여름의 태양이 그것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가을의 해를 마주하고 있으니 자신 아래의 어떤 생물에도 공격성을 띠지 않는 따스 자상함도 태양의 한 부분임을 깨닫는다. 


 눈을 살포시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뜨겁지 않은 온도로 적당하게 데운 레모네이드의 상큼한 향기를 코로 훌쩍 들이마시고 나서야, 상큼한 한 모금을 입에 물고 조금씩 목으로 넘긴다. 등 대고 누운 선베드가 가끔 맞대고 앉았던 모리의 울퉁불퉁한 척추 뼈처럼 굴곡졌다. 주위가 느닷없이 어두워졌다고 생각했더니 어느새 뭉쳐온 구름 떼가 해를 가려 땅으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모리와 나는 등이 붙은 샴쌍둥이처럼 서로를 뒤로 한  공중으로 붕 떠올라 하늘을 부유한다.


 “무척 오랜만이네. 모리와 몸을 닿고 있는 것이 말이야. 요새는 어때?”


 뒤쪽의 모리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네자 모리는 낮은 목소리로 덤덤하게 답한다.


 “날마다 즐겁게 지내. 하지만 안나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보다 즐겁다고 새삼 느껴. 얼굴을 마주 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아쉽네. 안나는 요즘 어때?”


 모리는 미동 없이 등으로 나에게 자신의 온기를 전한다.


 “응. 나도 즐거워. 아틀리에 사람들과 꽤 친해졌어. 모리의 형과도 두 번이나 만나서 대화를 제법 길게 나눴고. 하지만 모리가 돌아와 줬으면 좋겠다고 언제나 생각해.”


 나는 뒤돌아 그를 보고 싶어 져 몸을 뒤틀어 보지만, 왜인지 그때마다 모리는 덜커덕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서 나는 움직이길 그만둔다.


 “좋아. 여러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는 건 재미있지? 내가 너에게 돌아가지 않아도 어찌 됐든 살아갈 수 있을 거 같지 않아? 어떻게 생각해? 내가 지금의 안나를 보기엔 그런데 말이야.”


 “아니. 지금의 난 모리가 곧 돌아올 거란 믿음을 갖고 있으니까 참을 수 있는 거야.”


 모리의 물음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의 작별 인사인 것만 같아 겁먹은 나는, 그의 말에 설득력 있는 반박을 해내고 싶었다.


 “아. 그래? 그렇게 견디고 있는 거구나. 그래. 나는 조만간 돌아갈 테니까 너는 그때까지 너의 믿음에 확신을 잃지 않고 있었으면 좋겠어.”


 잠시 해를 가렸던 깃털구름은 내성적인 여섯 살 꼬마의 기척 없는 얌전한 움직임처럼 여린 바람에 천천히 흩어져 이동해 갔고, 등 뒤의 플라스틱 선베드는 다시 딱딱한 감촉의 무생물로 돌아왔다. 선베드의 등받이 한 귀퉁이에는 파란 매직펜으로 ‘모리’라는 두 글자가 적혀있고, 나는 그 이름에 눈길을 붙잡힌 채로 나무늘보처럼 한없이 느린 동작으로 손을 뻗어 유리잔을 잡는다.


 불현듯 울적해진 기분을 달래려고 레모네이드를 자못 경쾌하게 홀짝 마셔보지만, 그것은 입안에 강한 레몬 맛을 남기며 둔탁하게 목으로 넘어가는 미지근한 온도의 작은 한 모금으로 오히려 기분을 더욱 언짢게 만들 뿐이다. 자리에서 몸을 천천히 일으켜 테라스의 미닫이문을 열고 방으로 오른발을 내딛는 순간 감기몸살 기운이 도는지 머리가 아찔해져 휘청하고 쓰러지려 하는 것을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어 막아낸다. ‘뭐라도 먹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역시나 그대로 침대로 향해 이불 안으로 파고든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흔적 없이 사라진 뒤였다. 저녁 7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었으나 쓸쓸하게도 벌써 날이 어둑해져 나도 덩달아 침울해지려던 차에 다행히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액정으로 확인한 발신자는 은혜선생님이어서 무슨 일인가 하는 들뜬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나의 집 근처에 업무 차 왔다가 저녁식사든 커피 한 잔이든 뭐라도 좋으니, 같이 시간을 보냈으면 해서 연락을 했다며 보통 때와 다르게 겸연쩍은 분위기로 말했다. 통화 후 삼십 분 정도가 지나자 초인종이 울려 손님의 등장을 통보해 온다.


 은혜는 고급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먹을거리를 들고 “실례하겠습니다.” 하며 문을 통과한다. 몸에 딱 맞는 감색 투피스를 입은 그녀는 대기업의 유능한 비서처럼 보인다.


 “끼니를 잘 챙겨 먹어야 건강하지. 밥만 잘 먹으면 감기라든지 변비라든지 자잘한 병에 시달릴 일은 그다지 없다니까.”


 그녀는 내가 안내한 소파가 아닌 바닥에 앉아 여러 먹을거릴 소파 테이블 위에 내놓으며 말한다. 손으로 김치라도 찢어 밥 위에 얹을 기세로 넉살 좋은 아줌마스러움을 연출하는 그녀의 행동이 평소보다 과장되다. 타인의 공간 안에 있다는 낯섦이 그녀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운동선수 같은 초조함을 유발한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 본다.


 유난히 선명한 핑크빛을 띠는 자몽과 싱싱해 보이는 초록 야채들이 어우러져 식욕을 돋우는 시저 샐러드에서는 고소하고 달콤한 땅콩소스의 향이, 크림치즈가 곁들여진 아직 식지 않아 김이 나는 두툼한 훈제 참치에선 상큼한 레몬향이 풍겨져 나온다. 요즘 모리와 떨어져 혼자서는 만찬을 즐길 의욕이 없었을뿐더러 오늘은 점심마저 거르고 말았기 때문에, 나는  산타클로스의 선물 같은 식사에 한껏 들떴다.


 내가 눈을 반짝이며 은혜가 수저를 들길 기다리고 있자, 그녀는 관대하게 먼저 먹으라는 손짓을 하고선 화이트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다. 각자의 잔에 따라진 옅은 황금빛의 액체는 짧게 일렁이더니 이내 잠잠해지고, 조명을 반사하며 톡톡 터지는 표면의 반짝임은 천사의 웃음처럼 순수하게 보인다.


 식사하는 동안 은혜는 성민의 첫 개인전이 일정이 잡혀서 정신없이 방탕했던 그도 이제부턴 작품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줄 거라는 둥, 연말 시즌에 맞춰서 아틀리에 작가들이 겨울을 주제로 전시를 할 예정이라는 둥의 아틀리에 현황과 계획을 보고하듯 덤덤하게 얘기했다. 딱히 가타부타할 말이 없는 나는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지함 결핍의 그들에게서 어떤 작품이 나올까 하는 기대와 약간의 의구심이 생겨난 것이 전부였다.


 식사가 끝나고 내가 테이블 정리를 하는 동안, 그녀는 잔에 나직하게 깔린 와인을 한 모금에 처리하고 후식으로 준비한 산딸기 타르트와 시트론 무스를 테이블 위로 꺼내놓는다.


 내가 정돈을 모두 끝마치고 다시 제자리에 앉았을 때, 은혜는 이미 비어버린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을 뿐 다른 말을 꺼내려하지 않았다. 은혜가 나의 집에 들른 목적에 대해 단순히 그녀가 가진 계획에 관한 브리핑을 위해서라고 일단락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침착하지만 평온하진 않은 그녀의 표정을 마주하니 이런 내 판단이 조금도 맞지 않다는 생각이 엄습하였다.


"은혜 선생님. 오늘 저희 집에 들르신 이유가 있으신 거죠?"


 그녀가 아득해졌던 기억 속에서 어렵사리 할 말을 찾은 듯이 닫혀있던 떼었을 때, 이상하게 그 입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녀는 입을 벌린 채로 멈추어 묘한 표정으로 한동안 정적을 유지했다. 그녀의 말이 시작되길 기다리며 나는 온몸이 경직되어 손끝이 저려왔다.


 “안나를 보면서 여태껏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말이야.”


 예상치 못한 시점에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는 나의 심리상태와는 어울리지 않게 차분하여 이질감을 느꼈다.


 “저번에 내 사무실에서 잠들었을 때 알아차렸어. 네 얼굴이며 표정이며, 네 몸매에 그 몸가짐까지 하나하나 다 수연 언니를 빼닮았어. 예전에 이야기한 적 있지? 상림 선배 와이프 말이야.”


 그녀는 웃음기 없이 그 사실의 심각성을 강조하며 말했지만, 그 닮음의 정도를 모르는 나로서는 그녀의 유난스러움에 어리둥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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