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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Nov 22. 2024

그가 나에게 원한 것

평생 잊지 못해

 “꽤 놀랐어. 안나는 수연 언니와 굉장히 닮았어. 하필 닮은 사람이 모리의 어머니라니. 낳아준 어머니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어머니라고 불러온 사람과 똑 닮은 여자를 애인으로 둔 것은 좀 불온해. 둘 다 발레리나인 것도 말이야. 엄마에게 집착이 강한 사내아이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을 수 없대. 예전부터 어쩐지 묘한 부자관계라고 생각해 왔어. 상림 선배는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니까, 모리는 껄끄러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선배는 자신의 감정에는 충실하지만, 그만큼 타인의 감정에는 무뎌서 폭압 하는 경향이 있거든.


 앞에 앉은 은혜는 잘 정돈된 머리를 강박적으로 쓸어내리며 나를 보지도 않고 말을 맺는다. 그녀가 설명하는 ‘닮음’은 늑대와 여우는 닮았다.’ 하는 외적인 분석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모리가 사랑한 것은 내가 아닌 그의 양어머니라는 것이다. 나는 얼굴이 붉어짐을 느낄 정도로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인다. 내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이 민망한 듯 덩그러니 있다. 지금 은혜 앞의 나는 모르는 아줌마의 손을 ‘엄마’라고 부르며 잡아버린 유치원생 아이와 똑 닮아 보일 것이다. 놀람을 넘어선 두려움과 나 자신이 바보 같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울적한 기분에 휩싸인다.


 “모리가 저를 좋아한 것에,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나의 의도와 무관하게 따지는 듯한 물음이 되어 아차 싶었으나, 그것을 받아들인 은혜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 쪽을 바라보지 않은 채, 눈썹을 찌푸려서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경우의 수의 미궁에 빠진 아마추어 탐정처럼 무언가의 혼란스러움에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안나가 그렇게 정리해서 말하니까 내가 너무 오버한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


 은혜는 겸연쩍게 웃어 보이며 ‘아리송해.’라는 뜻으로 어깨를 크게 으쓱한다.


 “하지만 네가 수연씨를 쏙 빼닮은 걸 모리가 모르지 않았음은 확실히 장담해. 그래도 오늘의 확대 해석은 미안. 불쑥 찾아와서는 확인 안 된 말이나 하고 경솔했어. 좀 상처가 됐으려나. 틀림없이 실례였지?”


“아니요. 전혀요.” 나는 ‘풋’ 웃는다.


 언제나 확고한 입장을 취했던 은혜가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이 내겐 상처로 남을까? 아니면 그녀도 흔들릴 수 있음에 위로받을까?


 모리가 나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았든지 간에 상처가 될 건 없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와 보낸 시간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온전히 나와 함께였고, 다른 누군가의 개입을 느낀 적 없었다.


 웃음으로 휘어지면서 시야가 가려진 내 눈에 무릎 위에서 가련히 포개져있는 오밀조밀한 나의 두 손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손이 어른의 것인지 아이의 것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다.




 “이걸 내 증거물로 제출하겠어. 모리 책상에서 가져온 건데, 이거 보면 오늘 내 행동 이해하고도 남을 거야.”


 은혜가 벼르고 벼르다 현관을 나서기 직전에 건넨 것은 손바닥만 한 액자에 담긴 어릴 적 모리의 사진이었다. 가을 단풍나무에서 떨어진 마른 낙엽이 두껍게 깔린 공원을 배경으로 수연과 모리, 둘이서 다정히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누구나의 앨범에 두어 장씩은 끼어있을 법한 가족사진이었고, 성인이 된 피사체가 이 사진에서 느낄 유년시절에 대한 향수를 평범하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없는 것은, 오늘에서야 내 손에 들어온 이 사진 속에서 모리의 키에 맞춰 무릎을 굽히고 앉아 모리의 아직 덜 자란 자그마한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맞대고 행복한 미소를 띤 여자에, 나 또한 내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것. 모리 옆의 여자가 내가 아님은 한 치도 의심할 나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나로 되어버림은 그것을 모리가 원하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생겨난 원인 모를 귀울림 증상으로 인해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사이, 시야에 들어온 창 너머의 밤하늘이 미약하게나마 빛내는 별 하나 띄우지 않고 새카만 바리케이드 같이 모리와 내 사이를 가로막고 서있다.


 커튼은 젖히면 건물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서광이 보이리라 단정했지만, 가을의 어둠은 갑작스럽게 길어져 아직 아침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은혜가 돌아간 뒤 밤 시간 내내 책상에 앉아 기어이 완성시킨 두 장의 편지는, 미처 다듬어지지 못한 글씨체로 빼곡히 채워짐으로써 그 내용의 진부한 진지성이 은닉될 것이다.


 요령 없이 밤을 새우는 버릇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다. 한번 손을 댄 일은 중단 없이 끝을 내야 하는 성격이 상류의 물이 하류로 흘러들 듯 졸졸거리며 어릴 때부터 여전히 이어지기 때문이다.


 손끝에서 발끝까지 ‘완벽함’에 몰두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돌릴 여력 없이 홀로 발레 연습을 하던 나는 내 주변 공기를 날이 선 팽팽한 상태로 만들곤 했다. 그런 나를 어떤 이들은 걱정스레 보는 반면, 어떤 이들은 아니꼬운 시샘으로 가득 차서 수군거렸다.


 항상 나 자신에게 시달려 주위를 둘러볼 력이 없었지만, 종종 나를 둘러싼 흐름을 알아차릴 때에 후자의 사람들에겐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억울함을 견디다 못한 어느 날 모리에게 “왜 나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는 거야? 난 외골수일 뿐이잖아.”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모리는 “그래. 네가 외골수니까.”라고 내 말을 려주었다.


 “그게 나쁜 거야?”


 “네가 돋보이는 게 나쁜 거야. 사실 시기는 합리화시킬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없어.”


 모리는 담배 연기를 내 반대쪽으로 내뿜으며 나에게 뒤통수를 보이고 말했다. 그럼에도 연기는 바람을 타고 내 쪽으로 흘러와 눈에 눈물이 고이게 했다. 나는 매운 연기를 만드는 모리가 아닌 여기 없는 다른 이들에게 화가 나서 모리의 등에 박치기 했다.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을 미워하다니, 바보 같아.”


 딱딱한 모리의 등에 머리를 기대고 불만을 털어놓자, 그 등이 자신을 울리며 대답해 왔다.


 “응. 다들 바보야.” 등은 스스로 전지 하다는 착각에 빠진 오만한 사람처럼 득의양양한 목소리를 냈다.


 “난 바보 아니야.” 등의 우쭐함이 너무나도 꼴 보기 싫어서 ‘다들’의 예외를 들었다.


 “응. 넌 아니야.” 등은 쉽게 인정해 왔다.


 “모리도 아니야.”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건 아닐걸.” 이번에는 쉽게 부정해 왔다.


 ‘뻔한 사실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기는!’라고 등을 업신여기며, 모리의 군살 없는 딱딱한 허리에 두 팔을 감아 조이듯 꽉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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