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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Nov 25. 2024

겨울은 예상보다 일찍 시작된다

평생 잊지 못해

 위 통증으로 인해 눈을 뜨니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이 들어있었다.


 상체에 눌린 채 접혀있던 위가 근육통을 호소했고 억지스럽게 돌려져 있던 고개는 그대로 굳어버려 원상태로 돌아오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불편한 자세로 한 시간 가까이 잠에 빠져있었으나,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자 오히려 개운하기까지 해서 안도한다.


 오늘은 하늘 전체가 구름으로 뒤덮여 햇빛 한줄기 비집고 들어올 틈도 보이지 않는다. 간단히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집에서 빠져나와 언덕 아래 우체통을 향해 걸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아침나절 해가 들지 않자 날씨가 급격히 쌀쌀해졌다.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겉옷으로 걸친 니트 카디건을 여미고 몸을 움츠려 팔짱을 낀다.


 “가을이 사라진다는 게 진짜인가 봐. 벌써 완전히 겨울 날씨야.

 “그러게. 우리 빨리 따뜻한데 들어가자.”


 갑작스러운 추위에 미처 대처하지 못한 옷차림의 여자 두 명이 서로 팔짱을 껴 꼭 붙은 채로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간다.


 “드디어 겨울인가.” 빨간 우체통 앞에 걸음을 멈추고 나지막이 혼잣말하는 나를 힐끔 쳐다본 두 여자는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간다. 달력의 날짜는 이제 11월첫째줄을 간신히 가리키고 있고, 본격적인 겨울이라기에는 이른 때다. 


 우체통에 붙은 수거시간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이 마침 안내문에 쓰인 시간이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집배원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편지를 우체통 안에 떨어뜨리고 다시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연어로 속을 채운 크로켓과 애플주스를 사면서 시간을 조금 끌었다.


 큰 도로를 낀 언덕길은 자동차 지나다니는 소리로 항상 소음 데시벨이 높다. 순간 거대한 하얀 트럭 한 대가 ‘빠앙’하고 고압적인 경적소리를 냈고, 나는 이 신경질적 소음이 아닌 다른 이유로 우뚝 멈추어 선다.


 ‘아, 실수했다.’

 


 

익명의 친구 분께


 그동안 안녕히 계셨나요? 이곳은 한창의 가을 날씨인 도중에 오늘은 한층 쌀쌀함을 더하는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지구가 따뜻해진다고 하는데, 오히려 녹아버린 빙하 때문일까요. 이번 해의 겨울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찾아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문장을 정리하고 결심이 확실해진 후에 답장을 하는 편이, 답장을 받자마자 고민할 틈 없이 빠르게 글을 써 내려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임을 몰랐습니다. 친구 분의 편지를 처음 읽었을 때에는 오히려 모리에게 가야 한다고 확신이 선 상태였지만, 시간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쩌면 시기상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로 인해 어리석게도 얼마동안 갈팡질팡하는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곤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고백하건대, 저의 이 결정력 부족한 성격이 브레이크를 걸어 곤란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랍니다. 부끄럽게도 말이죠. 제가 모리에게 힘이 되어줄 거라는 친구분의 이야기에 들떠서 당장이라도 모리를 마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까지, 이중으로 작용하여 부끄러움은 배가 되어버렸어요.


 사실 제가 모리를 이곳에서 떠나게 했음은 자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것이 일종의 자의식 과잉으로, 모리의 세계엔 나만이 존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자만함에 빠져있었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있어요.


근래에 모리의 친구들과 모리의 형을 만나고 나 이외의 사람들과 모리가 맺어나간 관계들의 견고함을 알게 되었지요.


 타인과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 대단한 일은 아닐지 몰라도, 그런 관계 형성에 무지할 정도로 서툰 저로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시간 내에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갖게 되었어요. 모리와 분리되어 버린 것에 마냥 좌절하고만 있지 않을 수 있는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새로운 왕래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모리가 나와 모리 이외에 다른 여러 상황 속에서도 분명 힘든 일이 있었을 것임을 감지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모리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전갈은 믿기로 했답니다.


 ‘오로지 나에게로부터 떠난 것은 아닐 거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리의 집을 나온 몇 달 전의 그날이 완벽히 묘사할 수 없는 꿈처럼 기억의 단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모리에게 전해주시겠어요? 그 여름에 내가 그 집을 뛰어나온 것은 그저 투정부림이었다고. 어떤 미움의 감정도 없었다고.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모리를 뒤에 두고 절대 문을 쾅 닫고 화내는 일 없을 거예요. 모리가 나를 떠나버렸기 때문에 용서를 빌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에요. 정말로 지금의 나라면 ‘나를 언제까지나 돌봐줘.’ 하고 어리광 부리지 않을 거예요. 나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절대로 하지 않을 거예요.


 모리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그 바보 같은 행동들로 인해 창피해져서 한없이 울고 싶어지는 게 너무 싫습니다. 모리와 떨어져 있는 이 생활이 버겁지 않게 되면 모리에게로 갈 것입니다. 틀림없이 많이 지체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야 올 마음이 든 거야.’ 하고 놀려도 좋으니까, 꼭 웃는 얼굴이었으면 좋겠어요. 모리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요. 모리는 분명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을 할 거야. 그 얼굴 정말 보기 좋은 얼굴이야.      

                                                                                                                                     111                                                                                               안나로부터   



  

 해가 지평선을 넘어가면서 굴절된 태양광선은 웬만한 사진기에도 담을 수 없는 색을 발하는데, 아마 그 시점부터 일 것이다.


 그 빛깔을 보고 ‘아름다워.’라고 생각했거나, 입으로 말한 사람은 분명 그날 저녁 조용히 술 한 잔이라도 하고 싶은 감정에 휩싸일 것이다.


 은혜에게서 건네받은 사진 속 어린 모리의 미소에서 어른의 모리가 내게 늘 보여주던 미소가 그리워지고, 이내 머릿속엔 어지럽게 모리에게 전하고픈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늘어나버렸다.


 구름장막에 가려 옅은 달무리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밤사이, 잠시 들여다본 감정의 소용돌이에 발을 헛디뎌 푹 하고 가라앉아버리자 도입 부분에서 반복했던 퇴고가 무색하게 되었고, 기어이 마지막엔 잠에 취해 눈을 반쯤 감은 상태로 엉망이 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여과 없이 모두 글로 적어 내려갔다.


 ‘아침이 되면 마지막 문장은 지워야 한다.’ 오른 손목이 아프도록 힘주어 빼곡히 줄을 채워나가던 어젯밤의 어느 시점에서 어렴풋이 결정했었다.


 ‘모리가 편지를 받아 볼 것을 기정사실하고 있었구나. 마지막 문장을 지워야만 했어.’ 나는 자신의 부주의함을 탓하며 손에 크로켓과 주스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언덕 위에 자리한 집을 향해 타박타박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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