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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Dec 02. 2024

복도 끝 주인 없는 방의 침입자

평생  잊지 못해

 위층으로 올라가자 북적이는 아래층과 다르게,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주인 없는 집처럼 고요해진다.


 “올라가도 되는 걸까요?” 나는 급격하게 반전한 분위기에 긴장하여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으며 선영에게 물었지만, 모리의 방을 염탐하기를 그만둘 마음은 없다.


 “뭐, 괜찮지 않을까? 넌 모리 오빠 애인이니까, 구실도 있잖아?” 그녀의 말투에선 아까보다 확신이 줄어들었지만, 그녀 또한 걸음을 멈추진 않고 나처럼 그 모양새가 조금 조심스러워졌을 뿐이다.


 “왼쪽 제일 안쪽 방이라고 들었는데…….”


 계단을 오르자, 우리 둘이 서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방들이 줄지어 있다. 서양 고전 영화의 부잣집 저택처럼 방이 많다.


 “호텔 같아.” 선영이 좌우를 번갈아 살펴보며 감탄한다.


 “아! 저기다!” 나는 발걸음을 빨리하여 모리의 방문 앞에 도달하였다. 방문에는 ‘MORI’라는 나무 푯말이 걸려있었다.


 어쩐지 문을 열면 소년시절의 모리가 책상에 걸터앉아 책이라도 읽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쉽사리 문을 열지 못하고 선영에게 도움 청하는 눈빛을 보낸다. 내 뒤쪽에서 손을 뻗어 온 선영이 여기 없는 누군가에게 양해를 구하듯 조심히 문손잡이를 돌린다. 삐걱되는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그 안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모리가 당장 돌아와 생활해도 아무 불편 겪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모리 오빠 취향은 아니네.” 선영이 벽 한쪽에 딱 맞게 짜인 메이플 색상의 책장을 손으로 쭉 훑어가며 말한다.


 “그러게요. 엄마의 손길이랄까.” 나 역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선영이 책장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뽑아보는 것에 호기심이 발동해 성큼 그녀 옆으로 자리를 옮겨간다. 그녀는 구경한다기보다 무엇을 찾는다는 느낌이 강하다.


 “뭐 찾는 거 있어요?” 나는 단도직입적인 물음을 던졌다.


 “응? 별거 아니긴 한데, 난 아는 사람 방에 오면 졸업앨범 보는 거 꼭 하거든. 친구들끼리 그러는 거 관행 아닌가? 우린 그랬는데.” 그녀도 서슴없이 속내를 밝혀왔다.


 나는 친구 집에 놀러 간 경험이 많지도 않지만, 드문 경험 중에서도 그 친구의 졸업앨범을 구경한 기억은 없다. 나는 사고한 즐거움을 발견해 내고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그녀의 사고회로 작동이 나의 기작과는 너무 다르다고 느꼈다. 그 격차는 언제부터 어떻게 벌어지기 시작하여 지금에까지 이르렀을까.


 “그리고 모리 선배와 지연 오빠 동창이라니까……. 궁금하잖아?” 눈이 반짝반짝한 선영이 앨범을 뒤적인다.


 “그러게요. 일석이조네요?” 나는 슬며시 웃음이 났다.

    

 “안나야, 안나야. 찾았어. 이거 봐봐. 3학년 10반.”


 내가 모리의 초등학교 앨범을 뒤적여 또래보다 성장이 더딘 모리를 구경하며 귀여워하는 동안, 선영은 고교 앨범을 꺼내어 1반부터 펴더니 성실하게 모리와 지연을 찾았다. 10반까지 오자 넘어간 장수가 많아져 불룩하게 된 앨범 앞부분이 그녀가 부여잡고 있는 페이지 쪽으로 자꾸 쏠려 넘어간다.


 ‘뒤에서부터 찾았으면 더 좋았을걸.’ 애써 균형을 유지하려고 힘이 들어간 그녀의 손이 가련하게 느껴진 나는 손을 뻗어 점점 기울어지는 두꺼운 쪽을 잡아 지탱한다.

 

 “귀엽네요. 해맑게 웃고 있어.”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귀퉁이 둥글려진 직사각형의 사진 속에서 내가 상상했던 고등학생 모리보다 더 불량해 보이는 모리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면서 카메라 렌즈의 삼십 센티 정도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투른 그 모습이 순수해 보여 자못 낯설게 다가왔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모리다웠다.


 “같은 반에 지연 오빠도 있어.” 그녀의 고조된 상태가 기류를 타고 나에게까지 번져온다.


 “이 사람 봐. 전혀 웃지를 않잖아.” 나는 교복 입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되어 마음껏 촐랑거리고 있는 나 자신에 유쾌함을 느꼈다.


 “응. 무게 잡고 있나 봐. 이 나이 남자애들 딱 그럴 때잖아.” 그녀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소리 내어 웃는다. 그녀의 기분이 좋아 보여 나는 나대로 그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숨김없이 즐거움을 내색하는 여자는 사랑스럽다는 코앞에 당면한 감상에도 불구하고, ‘그렇긴 해도 감정의 작용에 따라 움직이는 건 조금 노골적’이라는 생각은 여간 지우기 어렵다.


 “그룹 지어 찍은 사진에 둘이 같이 나온 것도 있어. 무리 중에서도 특히 각별해 보여.”


 소소한 격정에 휩싸인 선영을 대견한 마음을 갖고 주시하다가, 느닷없이 형광등 불빛을 반사하는 물체에 시선을 빼앗긴 나는 그 반짝하는 한 번의 가격으로 단숨에 활기를 잃고 만다. 그러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줄 모르고 미처 피하지 못한 나의 오른손이 그대로 종이에 베여서 따끔하더니 피가 맺힌다.


 “어떡해! 아프겠다. 내가 이렇다니까, 조급증이 있어서 그래.” 그녀는 내 상처마저도 유희의 연장으로 여기는 것처럼 장난기와 콧소리 섞은 말투로 말했다.


 나는 아무 반응 없이 벌어진 피부 틈으로 새어 나오는 동그란 핏방울을 바라보다가, 눈물 핑 도는 서러움이 북 받쳐 올라 신세한탄과 비슷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모든 게 다 모리가 없기 때문이야.’   


 “안나야, 안나야. 그러지 말고 이 거 봐봐. 정말 대단해. 둘이 떨어져 섰지만, 뭔가 연대감이 느껴진 달까? 서로의 모든 걸 이해하고 있다는 얼굴이잖아. 역시 남자의 세계는 다른 가봐. 그렇지?”


 사진 속으로 빠져들었다가 나의 침묵으로 인해 자각을 되찾은 그녀는 눈을 한번 끔벅인다. 자신이 의견에 동의를 얻기 위해 고개를 들어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나를 보았을 때, 그 눈엔 어떠한 내가 새겨졌을지는 모르겠으나 기묘한 자극이 가해졌음은 분명하다.


 “안나, 울고 있어?”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떼어 물어왔으나 나는 그다지 특별한 대답을 할 마음이 들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안나는 곧잘 우는 거 같네. 혹시 버릇이니?” 그녀는 한순간 낮은 온도의 목소리를 내어 감정조절이 원만하지 않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처럼 정상의 범주에서 비껴 나 보인다.


 “따끔한 순간에 모리가 생각나서요. 이대로 모리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게 정말 버릇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 방금 네 표정 섬뜩했어. 깜짝 놀랐네. 갑자기 나도 모리 선배 보고 싶다.”


 정돈된 어조로 돌아와 말의 끝에 하하 하고 무안한 웃음을 연결시키는 그녀가, 예 나를 질투하던 여자아이들과 닮아 보였고, 좋지 않은 기억이 재생되어 가슴 언저리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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