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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Dec 06. 2024

입에 쓰고 몸에 좋은 술

평생 잊지 못해

 졸업앨범 뒤에 몸을 숨겼다가 지금에서야 타이밍 좋게 그 위엄을 드러낸 책장 위의 액자를 보고 있었다.


 백합처럼 싱그러운 미모의 여인이 타이즈와 레오타드에 랩스커트를 두른 차림으로 바를 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림바링 동작으로 길게 늘인 그녀의 몸은 얇은 심의 연필로 한 번에 그려낸 곡선처럼 매끄러웠다. 카메라 렌즈에 깊은 갈색의 그윽한 눈을 맞추고 여유 있는 미소를 뽐내는 그녀가 세기의 여배우처럼 매혹적이었다.


 은혜가 건넨 사진에서 본 적 있는, 5년 전 오늘 날짜로 생명이 끊어진 여인. 숨어든 망령처럼 불온하게 자리 잡은, 어린 모리를 사랑으로 감싸 은 가짜 어머니.


 나에게 이건 날 선 코팅용지에 베인 가느다란 상처를 백만 배도 능가하는 깊고 격심한 쓰라림으로, 눈물을 동반한 아직 가공되지 않은 슬픔이 마음을 뒤덮이게 했다.


 “어째 안 보인다 했어. 눈만 떼면 이런다니까. 두 말괄량이들, 이제 내려가야지. 곧 시작이야.” 아무도 없을 이층 모리 방에 불이 켜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쁘게 급히 올라와본 은혜였다.


 “뭘 그렇게 놀란 눈치야? 왜요? 모리 선배라도 있을까 봐요?” 은혜 들으라는 듯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는 선영이 은혜에게 등 떠밀려 방을 나간다. 나도 그녀들을 뒤따라 나가며 전리품 하나를 주머니 안으로 넣는다. 그것을 만지기도 불길한 적군의 보물로 여기면서.

 

 세 명이서 나란히 난간을 잡고 일층으로 내려갔을 때, 때마침 불이 모두 꺼지고, 대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였다. 해 떠있는 낮과는 다른 금세 차가워진 바깥의 공기가 외투를 입지 않은 나의 어깨를 움츠리게 만든다.


 “이제 대문으로 수연씨가 우리를 만나러 들어오시는 거야. 싸늘하더라도 조금만 참아.” 은혜가 내 한쪽 손을 꼭 잡고 유치원생 딸을 타이르는 엄마처럼 말해서 나도 그에 걸맞게 말 잘 듣는 얌전한 여자아이가 되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말에 반응하여 반자동적으로 대문을 쳐다보자 흰색 안개 같은 물체가 바람을 타고 떠오르는 것을 본 듯한 착각이 인다.


 모리의 아버지가 올린 향의 연기가 방직기에서 뽑아져 나오는 실처럼 천장을 향해 한줄기로 스멀스멀 피어난다. 제주가 두 번 절한 후, 주위 사람들이 뒤따라 절하기 시작하여 나도 눈치껏 무릎을 접고 이마를 땅으로 가져간다. 왜인지 나는 이미 육체 잃은 그녀에게 ‘모리를 돌려보내주세요.’하고 청을 빌고 있었다.


 차례차례 술과 절을 올리는 예식이 끝나고, 모리의 어머니가 식사를 하는 동안 모두가 제사상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엄숙하게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사람들은 좀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하게 인사를 주고받던 사람들과 동일 인물들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지한 얼굴이다. 이에서 어른들을 통해 대대로 이어지는 관습의 쇼적 가장성이 느껴진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은혜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어서 나 또한 정자세로 고쳐 앉고 눈을 감는다. 낮게 조정되었던 조명의 밝기가 서서히 환해지자, 그것을 신호로 모두가 다시 앞을 향하여 몸을 돌린다.


 처음과 같이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합동으로 절을 하여 영혼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상림이 지방과 축문을 태운다. 불에 타서 가볍게 날아오르는 종이가 상림의 손 안에서 재가 된다. 재를 받아 향로에 담는 굵고 커다란 상림의 손은, 그것이 속한 신체와 별개로 의지가 담겨 있는 개체로 여겨질 만큼의 힘이 느껴졌다.      


 “이 술을 마시면 겁이 없어집니다. 유약한 아이는 반 모금이라도 먹어두는 게 좋아요.” 초로의 남성이 소리 없이 다가와 술잔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백설 공주에게 사과를 건네는 마녀를 연상시킨다.


 “귀한 거니까 받아 마셔도 돼. 봐봐. 다들 마시잖아.” 은혜는 곧바로 손을 뻗어 술잔을 받아 들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나를 안심시키며 독려하듯 나의 등을 살며시 밀어낸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비로소 잔을 건네받아 두 손에 쥐고 한입에 밀어 넣는다. 싸한 알코올향이 코끝으로 전해오고 목이 아린 꽤 독한 술이다. 신원 미상의 남성은 인상을 찌푸리는 나를 만족스러운 미소로 휘어진 눈이 되어 흐뭇하게 보고 있다.


 “우리 회사만의 기술로 만드는 특별한 청주야. 어때? 좀 놀랐지? 보통 것들보다 도수가 약간 높거든.” 그는 두 손바닥을 맞부딪혀 딱 소리를 내더니 자긍심 넘치는 표정으로 자랑해 온다. 목을 타고 넘어오는 씁쓸한 향에 나는 무리해서 미소 지으며 빈 잔을 넘겨준다.


 “입엔 써도 몸엔 좋을 거야. 오늘은 내 여동생이 이로운 기를 더해주기도 했으니.” 호기롭게 허허 소리 내어 웃는 모리의 외삼촌은 술에 약해 보이는 다음 타깃을 찾아 나선다.


 “정신이 바짝 들어서 그런지 머리가 맑아졌어요. 그냥 기분 탓인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몸 안에 흘러들어온 액체의 기운에 몰두해 본다.


 “아닐 거야. 몸에 좋은 술도 분명 있기 마련이야. 아들이 사랑하는 귀여운 여자아이에게 유익한 술을 마시게 하고 싶었을 테니까.”



 

 떠들썩한 식사 시간이었다. 남자 어른들끼리 한상에 둘러앉아 상대방의 술잔을 채워주며, 거드름도 피우고 서로 짓궂게 면박도 하는 모습은 오래된 관계에서 비롯된 허물없는 편안함의 표출로 따뜻한 광경이었다.

 

 그에 비해 여자부는 대가족용의 기다란 테이블에 꼿꼿이 앉아 그 괄괄한 광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듯 일모 비웃는 경향을 보이며 서로의 건강을 확인하거나 자녀들의 안부, 여가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내 남편이지만, 술 취해서 목소리 커지면 정말 대책 없게 꼴불견이야. 자기 부인이 여기서 창피스러워하는 건 모르고. 그나저나 언니들, 저번 달에 옮겨 심은 심비디움이 어제 보니까 꽃을 피웠더라고요!”


 식사를 마치고 녹차를 내릴 때까지 화분에 핀 꽃만큼이나 화려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던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부인들이 어느 순간 초점을 나에게로 집중시킨다.


 “처음 보는 아가씨인데, 은혜씨가 새로 영입한 분이신가?” 반백발의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귀부인이 녹차 잔에서 살금살금 올라오는 김에 보조를 맞추는 듯한 느린 속도로 나와 은혜를 한 번씩 보며 물었다.

 

 나는 품질 좋은 녹차의 고급스러운 향에 정신을 빼앗긴 도중이어서 화두가 나에게 돌려짐을 한 템포 늦게 깨닫는다.


 “아니요. 막내 외종질분과 연인사이인 안나양입니다.” 은혜가 예의를 갖춰 허리를 바르게 세우고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소에는 보통 은혜가 제일 연장자이기 때문에 그녀의 공손한 태도를 도통 보지 못했던 나로선, 나와 마주하여 둘러앉은 범상치 않은 눈빛의 여인들이 몹시 고매한 권위자처럼 느껴진다.


 이미 나의 정체에 친숙한 아틀리에 사람들을 포함한 주위의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주의 깊게 나를 바라보는 것이 거북하지만 불편한 티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깊은숨을 들이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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