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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Dec 09. 2024

매년 찾아오는 살인자

평생 잊지 못해

 “우리 막내 조카 녀석과? 과연 그렇군요. 나는 모리 엄마의 큰 언니 되는 사람이에요. 여기 나와 닮은 3명은 내 여동생들이죠. 오늘의 주인공 우리 막내까지 여자만 5명에 모두 6남매랍니다. 저기 남자들 중 맨 왼쪽 자그만 체구의 남자가 내 다음으로 둘째지요. 동생들에겐 큰오빠고요.”


 그녀는 나에게 영적 조미료가 가미된 술을 권했던 유쾌한 신사 분을 가리켰다.


 “안나양, 나이는 어떻게 되지요?”


 “스물한 살입니다.” 나는 면접자리의 취업준비생처럼 머뭇거림 없이 또박또박 발음해 대답한다.


 “아, 그렇군요. 동생 제사에는 이번 해에 처음 참석하는 거지요? 우리는 이렇게 제사 때마다 모두 모여서 같이 식사도 하고 수다도 떠는 것이 낙이랍니다. 조금 별나 보이겠지만 4년째에 들어서니 거지반은 행사가 되었네요.”


 “우리 자매들은 명절에도 얼굴 못 보고 지나갈 때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수연이 제사가 시기상 적당하지.”


 야위어 광대뼈가 도드라지는 여성이 냉소적인 말투로 큰언니의 말을 이었다.


 “남편과 나는 하루 밤은 이 집에서 꼭 묵고 가요. 처음에는 수연이 생각에 잠도 제대로 못 들었는데, 저번 해부터는 꽤 잠이 오더라고요.”

 

 첫째의 왼쪽에 앉은 유독 살결이 하얀 여인이 애달픔을 애써 감추려는 듯 자못 명랑하게 말했다.


 “응. 나도 언니처럼 첫제사 때엔 벌써 일 년이나 되었나 하고 뒤척였는데, 이젠 푹 잘 수 있게 되었어. 그렇게 되고, 5년이 흘렀으니까.”


 4명의 자매들 중 가장 팽팽한 피부의 여인이 5년이나 하고 재차 되뇌며 말을 흐린다. 오늘이야말로 명절에도 만나지 못하는 다섯 자매가 모두 모이는 날이다.


 세 명의 자매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에 비해서 다른 한 부인은 께름칙한 표정으로 불쾌함을 들어낸다.


 급기야 그녀는 “그런데 모두들 못 느꼈어? 저 여자애 우리 수연이 어렸을 때랑 똑 닮았잖아. 근데 모리는 어디 멀리에 갔다고? 어째서 이런 날에까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라고 말하여 그 불편한 심기를 표출해내고 만다.


 신경과민 증세에 시달리는 충혈된 눈으로 주위 사람들을 쏘아보는 부인의 뚜렷한 광대뼈와 걸걸한 목소리가 크루엘라 드빌을 연상케 한다. 다시 보니 그녀만이 자신의 앞에 스트레이트 잔을 놓고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날 선 말에 순식간에 팽팽하게 당겨져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실처럼 조마조마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언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처음 인사하는 자리에서 무턱대고 그런 걸 말해도…….”


 큰언니가 자신의 왼쪽 여동생에게 ‘그만’ 하는 의미로 한숨을 푹 쉬어낸다.


 “뭐가 중요하지 않아? 정말 중요하지 않아서야? 그래서 모른 척하는 게 아니잖아? 분위기 망치는 악역 맡기 싫으니까 다들 외면하는 거잖아? 쭉 그래 왔듯이.”


 술기운에서 인지, 흥분해서 인지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그녀의 입에선 끝이 날카로운 고드름 같은 차가운 분함이 뚝뚝 떨어졌다.


 “여기서 그게 무슨 말이야? 이날 이때껏 까지 언니 이러는 것 정말 못 견디겠어.” 셋째로 판명된 부인이 얇고 긴 잔에 자기 손으로 술을 채우는 둘째 언니에게 반격을 가한다.


 “내가 뭘 어쨌게? 내 말이 틀렸다고 하는 거니? 나를 못 견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다들 아무 말 않고 넘기기에 급급한 거에 나도 마찬가지로 질렸어.”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치며 잔을 들어 한숨에 목으로 위스키를 넘긴다.


 나는 슬쩍 은혜의 손등에 나의 오른손을 뻗는다. 은혜가 나를 진정시키려는 의도로 깍지 껴서 나의 손을 꼭 맞잡는다. 거실의 남자들 상에서 흘러 들려오는 큰 웃음소리가 뒤숭숭하게 우리를 휘감았다.


 “저희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보겠습니다.” 은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우리 언니들 더 험악해지기 전에 가보세요.” 막내 부인은 사색이 된 얼굴로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야, 또 그러는 거야? 이번에도 그날 사고사로 위장된 살인처럼 모른 척 해 버리는 거야?


 결국 한계까지 취해서 꼬이는 혀로 겨우 해낸 둘째의 말은 비아냥거림의 의지를 담은 것이 확실했지만, 의도치 않게도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겐 그녀의 비통한 마음이 전해졌다.


 “둘째야. 많이 취했구나. 자네들에겐 미안하게 됐네. 오늘은 그만 돌아가도록 하게.”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위엄을 잃지 않는 그녀에게서 맏이의 강인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 숙여 인사하고 서둘러 그 공간에서 떨어져 나온다.


 “난 겁이 나서 그래. 해마다 찾아오는 만면희색의 살해자가…….”


 뒤통수에서 들리는 중얼거림은 내 고막을 진동시키며 머릿속까지 들어와 소용돌이쳤다.


 ‘사고사로 위장된 살인? 만면희색의 살해자…….’


 미처 흘려보내지 못한 말이 마음에 남아 엉뚱하게도 눈치 없는 궁금증이 인다.


 한밤중에 줄지어 도망치듯 문밖을 빠져나간 우리 4명의 여자는, 정원에 서서 상쾌할 정도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얼떨떨함을 떨치지 못하고 조용히 서있었다. 그러다가 한 명씩 현 상황을 인지하고 서로 눈이 마주치자, 웃음이 터져버렸다.


 “우리 신발은 제대로 신었니?” 은혜가 도무지 우스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배를 잡고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집안에 남겨진 남자 세 사람에게 연락을 취한 후, 여자들은 먼저 돌아가기로 했다. 함께 왔던 성민과 하원은 지연의 차로 이동하면 되므로 걱정할 일 없지만, 어른들께 제대로 인사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정원의 돌길을 밟으며 저택을 나서는데, 티끌 같은 하얀 털 뭉치가 코끝에 떨어지더니 서서히 투명해져 자취를 감춘다.


 내가 “눈?”이라고 중얼거리자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된다.


 “응? 눈?”

‘얘가 무슨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선영의 눈앞으로 눈 한 송이가 지나간다.


 “어머, 정말! 나도 지금 봤어!” 선영이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환하게 웃는다.


 가속도 붙은 눈물방울처럼 점점 많은 양이 하늘에서 쏟아진다. 몸으로 원을 그리고 선 네 사람은 두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손안에 눈송이를 받아내고 서있다.


 매년 보는 첫눈이지만, 첫눈 나이 먹은 어른도 세상에 와서 눈이라는 물질을 처음 본 아기로 만들어버리는 신통한 재주가 있다. 혀를 빼꼼 내밀고 눈을 받아먹는 영수의 얼굴은 눈만큼 하얘서 눈의 여왕의 저주로 그 자리에서 얼어버린 눈사람 같다.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니 슬로우 영상처럼 느릿느릿 떨어지는 무수히 많은 눈들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


 “오늘이구나. 올해 첫눈이 오는 날은.” 나의 오른쪽에서 은혜의 꿈에 잠긴 몽롱한 목소리가 들렸다.


 “쌓였으면 좋겠다.” 장단 맞춰 뒤따르는 선영의 말.


 “여간해서는 쌓이지 않잖아. 첫눈은 찔끔찔끔 오는 맛이지요.” 혀를 내밀어 반응했던 만큼 첫눈의 맛을 찾는 영수였다.     


 은혜가 운전하는 승차감 좋은 차 안에서 알맞은 세기의 히터 때문인지 깜빡 잠이 들었다.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부스스 일어나 잠이 덜 깬 채의 뿌연 의식 상태로 친숙한 얼굴의 세 여자에게 꾸벅 꾸벅 꾸벅, 인사를 하고 계단을 오른다.


 “꿈같아.”


 뭐가 뭔지 모르겠는, 따라갈 수 없는 흐름이 몇 달 동안 지속되었다. 발레를 하지 않는 나도, 어느새 친근해진 여러 사람들도, 스페인으로 훌쩍 떠나버린 모리도.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상황에서 첫눈을 맞은 오늘이 뒤틀린 꿈같았다. 이상한 나라에 뿌리내려 원래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게 된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로 쓰러졌다. 그때 창밖이 번쩍하고 빛나더니 하늘에서 요란하게 분열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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