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아 Nov 29. 2024

첫눈의 기별

평생 잊지 못해

 “날씨가 어쩜 이렇게 추워?” 은혜는 아틀리에 현관을 빠져나와 종종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지른다.


 잰걸음으로 뛰는 듯 보이는데도 옆에서 는 나와 속도 차이가 없다. 현관을 나서자 덮쳐오는 추위에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려온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의 기일인데 매년 참석하는 것도 실례 아닌가 모르겠어. 그레이 아틀리에 설립자이시지만……. 막상 가도 대화에 끼지 못한 달까, 많은 사람들 속에서 멀뚱하니 좀 민망하달까. 뭐, 그래도 이제 익숙해져서 가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만 말이야.”


 선영의 말소리에 고개 돌려 뒤를 보니 그녀가 추위에 단단히 재킷을 여민 채로 구두 앞코를 바닥에 콩콩 쳐서 고쳐 신고 있다.


 “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 그분 얼굴이 크게 인화된 사진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 주워들으니까, 이제는 종종 예전부터 잘 알고 있던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한다니까요. 사실 단 한 번도 직접 마주한 적이 없는 데도요.”


 하원이 선영을 뒤따라가면서 그녀의 말에 호응한다. 하원의 귀여운 이미지에 정장이 어색하리란 나의 예상은 들어맞았지만, 그 부자연스러움에 귀염성이 한층 부각되어 내 머릿속에 그려졌던 형 옷을 빌려 입은 안쓰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응. 그렇지? 이번이 4주기니까. 그래도 재밌지 않아? 수연씨 무용담 듣는 거 말이야.”


 은혜가 구름 없는 하늘에 간간히 떠 있는 별들을 검지로 하나하나 콕콕 가리켜 아리며 말한다.


 “아무래도 그렇죠. 독보적으로 멋있는 여성이셔서 배울 점도 많고요.”


 선영이 은혜가 들어 올린 손가락 끝에 시선을 맞추며 대답은 무슨 착오를 하고 있는지 현재형이다. 수영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데도.


 여름철에 귀 밑 기장이었던 갈색 머리를 어느새 어깨까지 늘어뜨린 로난은 그 얇고 부드럽게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나 집 지키고 있을게.”라고 띄엄띄엄 어눌하게 말한다.


 고동색 면티 한 장만 입고 우리를 배웅하러 나온 그는 추운 기색도 없이 멀어지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손을 흔들어 인사하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다가 그제야 문득 추위를 감지하여 몸을 움츠리고 아틀리에 대문 안으로 모습을 감춘다.


 “로난은 딱딱한 구석이 있어. 밝게 웃으며 인사해 주면 좋으련만. 작년에도 가지 않았지? 외국인에겐 생면부지 사람의 기일에 참석하는 건 역시 무리인가 봐?”


 백미러로 로난을 보고 있던 선영이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옆자리에서 운전하는 성민을 슬쩍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인다.


 “뭐, 어쩔 수 없지. 제사 자체도 미신이라고 생각하던데…….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야. 종교에 따라 제사를 금기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서도 많고, 실제로 지금 참석하는 우리도 예의상 가는 거니까. 로난이 살갑지 않은 성격이긴 해도, 가지 않는 게 그다지 예의 갖추지 않아서가 아니잖아. 로난 성격이면 진심 없이 격식만 차리는 사람을 상식에 어긋난다고 여길 수도 있어.”


 성민은 계속 앞을 주시한 채 운전을 계속했다.


 “그래도 다 같이 가면 좋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지.”


 아쉬움이 담긴 선영의 목소리가 차의 뒷자리에선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들려온다.


 “그러게요. 서양 사람들 동양 문화에 관심 꽤 있지 않나. 평소에 관심 없어도 막상 경험할 기회 생기면 호기심에라도 따라나설 만도 한데. 뭐, 로난은 워낙 유난스럽지 않은 사람이니까 이상할 건 없지만 말이죠.”


 내 뒷자리에 영수와 함께 앉은 하원이 그 특유의 쿨한 말투로 말했는데, ‘별 수 없지’라는 식의 어깨 들썩임과 같은 목소리였다.


 은혜의 SUV 차량에 두 명씩 나뉘어 세 줄로 앉은 6명은 한동안 말없이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돌연 내 옆에 앉은 은혜가 “모리가 없는데 이를 어째.”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고, 그 혼잣말 같은 낮은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나는 힉하고 딸꾹질을 시작했다.


 은혜 뒤에 자리한 영수가 “네?”하고 묻자, 은혜는 “응? 아냐.”하고 대답하여 물음을 자른다.


 “어머, 안나 딸꾹질해?” 딸꾹질을 멈추기 위해 숨을 참는 나를 보고 은혜가 어쩐지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다.     




 삼십 분가량 달리자 외인을 경계하는 높은 담벼락이 이어지는 부촌으로 들어섰고 이윽고 커다란 대문이 앞을 막았다. 그 저택의 인터폰을 누르자 스르르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니 내착한 자동차들로 이미 만차였다. 저택에서 거리가 있는 곳에 간이주차를 하고 조금 걸어 마주한 곳은, 땅에 발붙이고 올려다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눅 들게 만드는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


 ‘모리의 가족을 만나러 가는 거야.’ 이미 첫인상의 거대함에 압도당한 상태였지만 다시 한번 마음을 바로잡고 어깨를 열고 똑바로 걸어 나간다.


 자장격지 하는 은혜를 필두로 하여, 우리는 어쩐지 나이순으로 입장을 했다. 들어섰을 때 내가 아는 얼굴은 먼저 와 있던 지연과 모리의 형 둘 뿐이었다. 은혜는 여러 낯 모르는 어른들과 살갑게 인사를 나누며 무리에서 멀어져 나갔고, 나는 부모 잃은 세 살 배기처럼 멀뚱하니 서있었다.


 “아! 안나씨 오셨네요.” 주원이 반가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 쪽으로 빠르게 다가온다. 내가 이 공간에 들어선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쳐서 그는 처음부터 내가 온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때는 체격 좋은 어떤 남성분과 미간을 찌푸린 채 심각하게 대화중이었으므로 인사할 틈이 없어 보였다.


 “오실 거라는 연락은 받았지만, 역시 안나씨 우리 집하고는 영 어울리지 않네요. 아, 좋지 않은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워낙 기골장대한 남자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니까요. 품위 있는 여성분에게 제격인 분위기는 딱 봐도 아니죠.” 그는 계속되는 방문객의 접대에 상기되어 원래보다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주원아. 대화 중에 미안한데, 술 주문 한 거 확인하고 받아 놔 주겠니?” 주원의 뒤쪽에 큰 키의 여성이 다가와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어깨기장의 구불구불한 갈색머리를 손가락으로 정리하며 부드럽게 요청했다.


 주원은 그 말소리에 뒤돌아보고 “어라, 술? 늦는다더니 맞춰왔네. 응. 가봐야지. 누나, 이 분은 모리의 안나씨. 안나씨, 이 분은 저희 누나예요. 그럼 숙녀 분들, 저는 급히 심부름거리가 생겨서 실례하겠습니다.” 하더니 서둘러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간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말을 전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동성이기 때문에 모리 형과의 첫 대면 때보다 대응 방식이 한층 신경 쓰였다. 더욱이 한눈에도 그녀는 타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부잣집 마나님으로 보였다.


 “안녕하세요. 들은 대로 예쁜 아가씨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는 두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더니 나를 자신의 품 안으로 꼭 끌어안는다. 그녀가 입은 가슴 부분에 러플 달린 화이트셔츠의 버석거리는 원단이 왼쪽 뺨에 닿는다. 그녀의 뜻밖의 행동에 순간 움츠려 들었지만 그녀가 구부렸던 팔을 피고 내 어깨를 잡은 두 손에 여전히 힘을 준 채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쉽사리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의 그렁그렁 눈물 맺힌 눈에서 포근함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감격스러운 얼굴을 하고 눈물이 흐르기 전에 손으로 닦아낸 후, “편안하게 생각해요. 언니라고 불러요. 지원 언니하고.”라고 말하며 싱긋 미소 지어 보인다. 지원은 폭 좁은 얼굴과 뾰족한 코, 올곧게 다물어진 얇은 입술에서 풍기는 차가운 인상을 뒤로하고, 자신의 감정을 꾸밈없이 전해왔다.


 “뭐, 마실 거라도 갖다 줄까요? 친척 어른들이 많이 오셔서 제가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모처럼 모리 여자 친구가 왔는데 잘 챙겨주지도 못하네요.” 그녀는 다시 한번 화장이 번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손으로 눈가를 살짝 눌러 눈물 자국을 지우더니 “내가 외할머니를 돌봐드려야 해서 지금은 그분께 가봐야 해요. 나중에 또 대화할 수 있을까요?” 하고 내 어깨를 다시 한번 꼭 잡았다가 손을 내리고 자리를 떠난다.


 나는 “네. 그럼요.” 하고 작게 대답했는데, 그녀는 나의 목소리를 소란스러운 중에 용케도 알아차리고서 “착하네요.” 하고 응한다.


 ‘좋은 분이야. 근데 어째서 우신 걸까?’ 나는 그녀의 눈물이 의아했지만 덩달아 그 울렁거리는 기운에 휩쓸렸다.


 “남매 두 분이 성격이 다 좋으셔.” 내 옆에서 멀어져 있던 선영이 나에게 몸을 붙이고 여중생들이 비밀이야기를 하듯이 귀 가까이에서 속삭인다.


 “정말이네요.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배 속 깊이부터 나온다.


 “이렇게 되면 모리 오빠 성격만 따로 인 게 이상하달까.”


 “모리도 성격이 나쁘지는 않은 데요.” 나는 발끈해서 그녀를 장난스럽게 쏘아본다.


 “아니, 나쁘다기보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저 둘이랑은 좀 다르잖아? 어른들한테 싹싹하거나 이리저리 적극적이지 않으니까. 막내라서 그런가? 그나저나 위 층 올라가 보지 않을래? 모리 오빠 방도 구경하고.”


 그녀가 흥미로운 수색거리를 찾은 탐정의 눈빛을 하고 화제를 돌린다.


 “정말요? 그거 재밌겠는데요!” 나 또한 호응하여 왠지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비밀스레 실눈으로 살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