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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Nov 15. 2024

만남과 이별의 예감

평생 잊지 못해

 나는 요새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진 피치향 샴푸를 쓰고 머리를 완전히 말리지 않은 채 정원으로 나온다.


 초여름의 산들거리며 부는 바람은 기분전환 삼아 거닐기에 딱 알맞다. 발끝을 세워 바람이 가는 방향을 따라 한발 한발 내디디니 마치 내가 나뭇가지에서 깃털처럼 떨어지는 복사꽃잎이 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연못 가득한 수련이 한낮의 햇빛을 받아 활짝 피어나 있고, 나는 이 아름다운 광경에 녹아들만한 개체가 되기 위해 아라베스크 자세로 다. 머리 바로 위 하늘에선 돌연 커다란 꽃잎모양의 구름이 해를 가려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피케 동작으로 회전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때 나를 부르는 모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우뚝 멈춰 서서 그의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내가 닫지 않고 나온 응접실과 정원 사이의 문을 막 통과하여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모리가 눈에 들어온다.


 “어머니. 직사광선은 피부에 악이랍니다. 이제 식사하러 들어가시죠.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모리는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르게 말을 건네고, 포물선을 그리듯 부드럽게 팔을 뻗어 손을 내민다.


 레이니어 체리색의 매니큐어가 빛을 반사하는 다섯 개의 손톱이 박힌 나의 손가락이, 건물 그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하얗게 빛을 받는 모리의 손 위에 살포시 포개진다.


 ‘그러고 보니 모리가 나를 뭐라고 불렀더라. 왜 나를 그렇게 부른 걸까.’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떨어진 잠 속에서 겨우 의식을 끌어올렸을 때, 반쯤 열린 시야로 들어온 낯선 방안 풍경에 질겁하여 재빨리 상체를 일으킨다. 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스멀스멀 풍겨오는 담배연기를 발견하고 그 끝에서 이 방의 주인을 찾아낸다.


 데스크 앞에 앉은 은혜가 담배를 물고 하얀 서류 뭉치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녀는 깊이 집중해서 방안의 달라진 기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내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조차 듯하다. 내가 기다란 소파에 누운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아 앉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멀리로 초점을 잡아 나를 알아차린다.


 “아! 일어났구나. 몸은 좀 어때? 아픈 덴 없니? 갑자기 기절하듯 잠들어서 깜짝 놀랐다. 얘.”


 은혜는 언뜻 들으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씩씩한 어조로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억지로 가장한 평상심이었다. 그녀의 내면에 침전물이 돼 가라앉은 고민거리는 무엇일까. 어디에서부터 흘러들어온 부유물일까.


 “아니요. 잠을 푹 자고 나니 오히려 피곤이 싹 가셨는걸요.” 나는 순진무구한 개구쟁이 소년의 얄궂은 천진난만함을 가장하여 대답하고 기지개를 크게 한번 펴 보인다.


 “다행이네. 다행이야.” 은혜는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한다.


 “네. 다행이죠.” 내가 그 마지막 말을 따라 하자 그녀는 왜인지 잠시 냉랭한 기색을 드러내 보이더니 다시 업무에 열중한다.     




 오랜만에 모리의 집을 찾았다. 가을 어귀로 들어서 슬슬 하늘이 높아지려나 싶은 아침에, 여자주인공이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훌쩍 긴 여행을 떠나는 내용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지하철 입구 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 역이 모리의 집에서 가깝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내려온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문득 모리의 방 테라스에서 보던 화려한 야경이 그리워져 충동적으로 걸음을 옮겼고 모리의 집으로 가는 내내 두근거리는 마음에 도취된 채였다.


 모리의 맨션 앞에 도착하여 경비아저씨에게 얼굴을 내밀고 인사드리자, 아저씨는 “어이! 오랜만이네.” 하며 귀찮은 기색 없이 반갑게 문을 열어주신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집은 모든 문을 꽉꽉 닫아놓아도 어느 얄팍한 사이로든 비집고 들어온 먼지가, 방치된 간만큼 켜켜이 쌓여 집주인의 부재를 더욱 실감 나게 한다.


 이 집구석구석까지 더러움의 찌꺼기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닦아내던 모리는 돌아와서 어떤 표정을 할까? 기밀하게 몸을 움직여 집안을 정리하며 긴 여행을 후회하고 자책하는 말을 읊조릴지도 모른다. 별안간 온기 잃은 이 빈집에 홀로 쓸쓸하게 서서 모리가 돌아올 순간을 상상하는 나를 가엽느낀다.


 모리가 사는 주택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서도 언덕 위에 위치하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려다보이는 잘 닦인 도로 위를 여러 종류의 차들이 드문드문 달려가고 도로 양옆에 동일한 간격으로 나란히 불 켜진 가로등은 외계의 우주선 유도장치처럼 환상적 이게도, 일렉트로닉 음악에서 반복되는 복제된 기계음이 눈앞에 펼쳐진 듯 혼란스럽게도 보인다.


 교차하는 고가도로에서 들리는 끝없는 소음은 얼굴 모르는 다수의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 가능케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상대역 없는 이인극의 주인공이 된 나의 뒤로 있으나마나한 배경이 되어 흘러갈 뿐이다. 돌연 현관 쪽에서 덜컥 소리가 나더니 모리가 문을 통과하여 성큼성큼 들어오고,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던 사람처럼 활짝 웃는 얼굴로 뒤돌아본다.


 나의 이 억지스러운 상상대로 그가 지금 저 문으로 몸을 들이민다 하더라도 실제 나에겐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을 것이다. 기대 이상의 사건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순간에는 어떤 감흥도 느낄 수 없법이다. 나는 그가 다시 돌아오는 시점의 징조를 알아차리는 기지를 발휘하지 못하고 우리의 재회는 아무런 극적 효과 없이 밍밍하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과 점심 사이의 어중간한 시간대의 한가로운 가게에 홀로 앉아 조용한 식사를 한 뒤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하지만 별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고 메마른 먼지 냄새나는 모리와 나의 침대에 몸을 누인다. 간간이 나타나던 식욕부진 증상은 그 빈도가 잦아졌고, 이제는 공복감 또한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기 일 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배고픔은 사라져 있었다.




 아빠에게 오랜만에 온 전화는 달갑지 않은 명령과 다그치는 어조로 나를 움츠려 들게 만들었다. 야단스러운 진동소리와 함께 붕하고 떠오른 발신번호에 긴장하였으나 그것을 애써 감추고 애교 부리는 목소리로 “여보세요?” 했을 때, 아빠는 괜스레 반항의 마음이 들 정도로 부드러움 없는 엄격함으로 답해왔다.


 “어제 학술회 끝내고 저녁 모임자리에서 김교수와 마주쳐 얘기해보니, 네가 그 집을 나간 지가 꽤 되었더구나. 편안히 학교 다니라고 따로 집도 마련해 주었는데, 아빠에게 상의 한마디 없이 휴학을 하다니. 그런 몰상식한 딸자식은 주위에서 듣도 보도 못했다. 너와 네 엄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탓에 나는 굉장히 창피스러운 꼴을 당했지 뭐냐. 공부를 쉬고 있으면 집으로 당장 돌아오지 않고, 밖에서 도대체 뭐 하고 사는 건지……. 하루 종일 아무리 고민해 봐도 도통 너를 이해할 수 없구나.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내 딸은 잘 살고 있는 거냐?”


 아빠의 말이 끝나자 나는 “” 하고 여름철 지나도록 살아남은 모기의 날갯짓 같이 작게 울리는 소리를 웅얼거리어 대답하였고 아빠는 못마땅해하는 한숨을 내쉬며 얼마동안 정적을 이어나가다가 “어떻게 할 건지 똑바로 결정 내려서 전화주거라. 나에게든, 엄마에게든.” 하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여 매정하게 ‘뚝’하는 소리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세상에 아직도 이렇게 독단적인 아빠가 다 있네. 나를 생판 무관한 사람에게 떠맡길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내가 왜 이러니 저러니 보고해야 하는데?’ 하고 입을 비죽거렸으나, 아빠의 지시에 걸맞은 그럴듯한 계획을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았다.


 며칠 뒤 아빠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을 때, “학교 다니는 건 다음 학기에나 가능하니까, 남은 기간엔 쉬고 싶어요.”라고 내 의사를 전달하며 우물우물 말끝을 흐렸다. 일단은 크게 혼나지 않고 사태를 무마시키고자 고심한 끝에 선택된 대답이었다.


 아빠는 “애초에 어른과 상의도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휴학한 것이 잘못이다.”라고 전과 같은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 기억에 존재하는 가장 어렸을 적의 첫 장면부터, 아빠는 지금과 같은 목소리로 등장했다. 칭찬할 때마저도 훈계할 때와 다름없이 강압적인 말투였다. 큰소리 낸다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가장은 아니지만, 가족이든 누구에게든 자신의 아랫사람에겐 아무렇지 않게 독설을 내뱉어 정신적 학대를 일삼았다.


 전화라는 매개 수단을 통해서도 희석되지 않는 한결같은 비정함에 속이 메스꺼운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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