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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Nov 08. 2024

운명론자 모리의 용기

평생 잊지 못해

 새벽녘에 이르러 한바탕 소란스러웠던 기운이 점점 사라지자 모두들 하나같이 목소리 작게 이야기하고, 한창 일 때는 지나치게 기뻐하였다가도 이제는 쉽게 슬퍼한다.


 오늘 나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던 지연에게 어찌 됐건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마음과, 실은 마음속에서 점점 불거져오는 사사로운 의문의 독촉으로 인해,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그가 말상대 없이 혼자 따로 떨어져 조용히 있는 틈을 노린 것이다.


 “그림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일부러 전화준 것도요.”


 “고맙긴. 내가 지나치게 관여한 거 같아서, 미안하기만 한데. 사실 전화 끊고 네가 날 미워할 거 같아,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그는 의식적으로인지, 그 전화상의 위압적이고 다급했던 것과는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일단은 모리에게도 조금의 시간을 주려고 해요. 그 시간도 제가 참을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이겠지만 말이에요.”


 “아니야. 그러지 마. 내 말이 신경 쓰여서 그런 거라면, 네가 결심한 데로 해.” 그는 내가 ‘정말? 그럼 그럴까요?’라고 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였다. 그것에 나는 웃으며 “아니, 일단은…….” 하며 말을 흐린다.


 “아! 그건 그렇고 모리가 그린 그림을 원본으로 했다고 했죠? 그 그림 볼 수 있을까요?”


 나는 얌전히 가라앉힐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궁금증의 재촉으로, 그림 이야기를 꺼낼 적기를 찾다가 불쑥 말을 꺼냈지만 다행히 그것은 그다지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아, 모리가 안 보여줬구나. 잠깐만.”


 그는 팔을 뻗어, 벽에 기대어 세워둔 하드커버로 된 A4용지 크기의 두꺼운 화첩을 집어 든다. 검은색 유화 물감으로 두껍게 칠해진 스케치북 커버의 오른쪽 아래 한 귀퉁이에, 하얀 글씨로 깨알 같이 작게 쓰인 ‘지연’을 발견하고 그것의 주인이 임을 안다.


 나는 그를 힐끔 쳐다보고 그가 뒤적이는 그림들을 들여다본다. 그의 그림은 테크닉 면에선 뛰어나지 않았지만 난색 계열의 색을 잔뜩 사용하여 따듯한 남국의 정취를 풍기고 있었고,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활기찬 기운을 북돋게 하였다.


 그의 알로하셔츠 같은 그림들 사이에서, 반으로 접힌 얇은 종이 한 장이 떨어져 내 무릎 위로 날아와 앉는다. 내가 ‘이거?’ 하고 눈으로 묻자, 그는 ‘응. 그거.’ 하고 고개를 한번 끄덕인다.


 새하얀 형광색의 A4용지에 실낱같이 여린 연필선으로 그려진 그림은 벽면에 거대한 크기로 그려진 것과는 확연히 다른 기운을 가졌다.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나는 한밤중에 은밀한 주술적 의식을 치르는 숲 속 요정인 듯 보이기도 했으며, 멈출 수 없는 무도의 마법에 걸린 소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배경은 기억 속에 남아있어요.” 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뜻밖에도 그는 기특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아, 그래? 어딘데?”라고 말한다. 경쾌하게 끝을 올려 물어오는 그의 말에 비아냥거릴 의도가 숨어있을 리가 없음에도, 의문을 곧바로 내비치는 단순한 형태의 물음이어서인지, 질문을 건네받은 내 기분이  유쾌하지가 않다.


 내가 예상하는 그림 속 배경의 실제 장소가 다르다 한들 그가 득 보는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나와 내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떠보는 걸까. 왜 상대가 오답을 내뱉는 동시에 자신의 승리가 확정되는 퀴즈쇼의 참가자처럼 구는 걸까. 그에 비해 모리는 좀 더 상대방을 배려하며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이라서, 모리와 대화하는 동안엔 언제나 그의 자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틀리에 뒤쪽의 정원. 은혜선생님의 응접실에서 보이는 곳 말이에요.”


 지연은 싱긋 웃으며 “응. 내가 추측하기로도 그래”라고 대답한다.


 “나는 우리 정원의 그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들어. 뒤쪽으로 꺾어져 들어갔기 때문에, 딱 그곳만 분리된 아늑한 분위기가 조성되니까 차분히 휴식할 수 있고.” 그는 양 손바닥을 마주 보도록 평행하게 벌리고 한 구간을 만들어 보이며 말한다.


 “모리도 좋았던 거겠지. 한 번도 보지 않은 광경을 이렇게 상세하게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건, 그 모습을 몇 번이고 상상했다는 증거잖아? 굳이 뒤뜰에 널 집어넣은 이유는 간단해. 상관 관계없는 피사체들을 그림 속에서 연결시키는 건 그것들이 함께 있는 걸 보고 싶다는 작가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니까. 실은 결코 단 한 번도 보지 않았으면서, 그 둘이 최대한 잘 어울리게 표현되도록 애쓰는 거야.” 지연의 눈이 의미심장한 빛을 띠고 있다.


 솔직히 나의 대답은 이랬다. ‘흥,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데?’


 그래서 말했다. “그래서 지연은 모리가 왜 저 배경 안에 내가 있기를 원했다고 생각하세요?”


 “추상적인 내 느낌을 구태여 말로 하자면, 모리의 미적 이상이랄까. 이렇게 유치하게 밖에 설명 못하겠어.” 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미적 이상이라……. 그것 참 이상하네요. 모리는 서정적 아름다움과 서먹서먹한 사이일 텐데요. 이 그림은 메르헨의 삽화 같잖아요. 모리는 열여섯 살 소녀가 아니에요.”


 “아니. 내가 볼 때 모리는 운명주의자에 신비주의 신봉자였어. 이렇게 노트 한 장 찢어서 낙서처럼 그렸지만 모리의 본모습은 이렇게 야들야들한 그림이나 그리는 초식성이야. 모리가 뼈대 굵은 남자어른인 줄 알았는데, 실망했을까?” 지연이 나의 사랑이 그린 그림을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조잡한 상품을 취급하는 장사꾼의 호객행위처럼 볼품없이 흔들어댄다.


 “실망이라뇨? 나를 요정처럼 그려준 애인에게 실망하는 여자가 어디 있어요? 반대로 감동하는 게 맞죠. 그리고 모리가 뼈대 굵은 남자인가요? 모리는 딱 봐도 사슴과 예요.”




 모리와 처음 만났던 날은, 모리뿐만 아니라 그 자리의 여성 남성을 불문한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반했었다고 자신 있게 회상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주인공이었던 날이었다.


 대학교 1학년 학기의 마지막 주, 나는 2학년 선배들을 제치고 여왕 백조를 맡아 무대에 올랐다. 말 그대로 ‘주인공’이었다.

 

 천성이 겁이 많은 나는 역시나 스트레스 상황을 못 이기고 안절부절못하였지만, 어쩐지 악바리 기질 또한 있으므로 이를 악물고 마지막 동작 하나하나 손발 끝에 힘을 줘가며 완벽하게 해 나갔다. 많은 박수를 받고 나조차 만족하여 무대를 내려왔을 때, 지인들부터 일면식 없는 사람들까지 내 주위로 모여 부담스러운 찬사의 말을 쏟아냈다.


 공연 시작 전엔 조금씩 내리던 눈이 그 기세가 점점 세어졌는지 어느새 소복이 쌓여 주위를 뒤덮었고 달빛을 반사해 반짝반짝 빛을 내는 꿈속 같은 환상적인 밤이었다. 모두들 어두운 톤의 코트에 목도리까지 한 차림이었지만, 나는 갓 내린 눈처럼 투명할 만큼 눈부시게 빛나는 깃털로 장식된 튀튀를 입고 있어 한층 돋보였다. 나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꽃다발을 한 아름 안은 채 애써 어색함을 감춘 채로 서있었다.


 그 당시에만 해도 나와 한 지붕아래에서 살던 그날 공연의 담당 교수님이 나를 어느 사립발레단의 단장님에게 소개해주며 우쭐거릴 때에, 그 단장님의 바로 왼편에 모리가 있었다. 모리는 눈싸움을 거는 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나는 그의 기이한 눈빛에 위축되어  눈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모리의 몸매 때문에 당연히 그가 발레단의 단원일 거라고 착각했었다. 내가 의상을 갈아입고 친구들과 격양된 목소리로 수다 떨고 있을 때 누군가가 대기실 문을 똑똑똑 두드렸고, 나를 찾는 익숙지 않은 목소리에 밖을 내다보니 모리가 서있었다. 모리는 문 앞에 서서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고 좀 전과는 사뭇 다른 그의 선량한 눈빛과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에서 거절할 수 없는 호소력을 느꼈다.


 모리와의 첫 대화를 마친 후 문을 닫자마자 십 대 티를 갓 벗은 말괄량이 소녀들은 유난스레 수선을 떨었고, 모리는 문 밖에서 그 소릴 듣고 피식 웃음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지연의 어수룩한 표현에 의하면 운명주의자인 나의 그이는 그때에 나에게 어떤 필연이라도 느꼈던 걸까. 그 짧은 대면의 어느 부분에서 초월적 존재의 개입을 감지했을까.


 내가 모리의 동그랗게 힘줘 뜬 눈에 거부감이 들었었다고 솔직한 감상을 표한다면 모리는 몹시도 서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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