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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Nov 04. 2024

복숭아 나무에서 떨어진 꽃

평생 잊지 못해

 선영의 전화를 받고 한 시간이 좀 안돼 창 밖에서 클랙슨 소리가 두 번 들렸다.


 테라스로 나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은혜의 SUV 차량 창문에서 얼굴이 나와 “안나씨, 내려와!” 라며 소리친다. 그 부름에 신이 나서 가방을 낚아채듯 들고 문을 힘차게 열어 요란스레 달려 나간다.


 유쾌한 기분에 줄곧 미소를 띠운 채 계단을 내려오다가, 순간 누군가 내 팔목을 붙잡는 느낌을 받았고 나는 움찔하여 걸음을 멈춘다. 형체 없는 모리가 내 귀 옆까지 바짝 다가와 말한다. “조심해. 넘어질라.” 밖에선 자동차 경적이 빵빵 2번 소리를 내고, 신경이 곤두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계단을 한발 한발 내디뎌 조심스레 내려간다.


  하늘 가득 낀 구름이 해를 가려 그 위치를 알 수 없었으나 내 바로 위 하늘이 다른 쪽보다 더 밝은 빛을 띠고 있었으므로 나는 어쩐지 그 부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서 있다. 입구 앞에 다다른 나를 모두들 소리 없이 보고 있다가 나를 따라서 하늘을 본다. “왜 그래?”라고 선영이 물어왔을 때에서야 나는 몸을 움직여 걸어 나간다.


 나의 모든 움직임을 모리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거리에 쌓인 눈이 재잘거리듯 반짝거리던 우리가 처음 만난 저번 겨울의 그 밤에서부터, 아직 여름의 기운이 활개 치는 9월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재중인 모리가 나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어서 저렇게 구름으로 가려져서도 빛을 내는지 나는 짐작할 수 없다.


 “어서 타. 모두가 안나를 위해 준비한 게 있어.” 내가 차에 타자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한꺼번에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인다. 나를 에워싼 사람들의 확장된 눈동자가 어두운 차 안에서 번뜩거린다. 맨 뒷자리에 앉은 지연만이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에 묻은 검은 물감을 문질러 지워내고 있다.




 아틀리에로 들어서자 무거운 유화물감내 가운데 떠도는 비릿한 묵향이 공기에 퍼져 있다.


 “안나의 행복을 바라는 모두의 마음을 담았어.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귀 가까이서 들리는 음성은 결코 오만하지 않고 다정한 배려가 묻어 있어 자장가처럼 듣는 이의 긴장을 풀어줬다.


 피부가 하얗고 매끈한 영수가 아기천사 같은 얼굴로 귓가에 흘린 말에 현혹당해 이제껏 가보지 않았던 작업실 깊숙이까지 끌려 들어왔다. 창을 내지 않아 빛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늘 어두운, 하루의 시간과는 무관한 공간에 다다랐다.


 “스톱.” 영수가 내 팔을 잡는다.


 “어두워. 이제 누가 불 좀 켜.” 내 뒤 쪽에서 선영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또각거리며 뒤따르던 구두소리도 멈췄다. 선영의 퉁명스러운 요청에 누군가 움직인다.


 “안나씨, 한껏 기대를 품고 있길 바랍니다. 불 켤게요.” 하원은 사뭇 어른스러운 목소리를 내어 말하고 말과 몇 초간 거리를 두어 행동한다.


 불이 켜지고 좁아지기 시작한 동공을 비집고 들어온 빛 때문에 눈이 부시다. 하얗게 부서지는 천상의 불빛에 휩싸여 찬란한 타계로 떠나가는 느낌이 든다.


 점점 뚜렷해지는 시야에, 비어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맞은편 벽면이 들어왔다. 벽은 수묵화와 같이 검은색 농담으로 효과를 준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그림 속에서 내가 유려하게 춤추고 있었다.


 빛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녹아드는 듯한, 몽롱한 표정의 나 자신이 환각에 빠진 아득한 눈을 하고 피루엣 동작을 하고 있다. 내가 회전하는 방향으로 굽이치는 새까만 머리카락에서는 복숭아향이 풍겨져 와 콧등을 향기로이 물들인다. 춤추는 나의 뒤로 복숭아나무 한그루가 꽃망울을 맺고 있다. 아직 꽃도 피지 않은 저 복숭아나무는 나에게서 복숭아 향을 옮아갔을 것이다.


 ‘그래. 저 정원엔 내가 가 본 적 있었는데…….’


 “모리 오빠 책상에 놓여 있던 그림을 도안으로 썼어. 어제부터 지연 오빠가 혼자 작업하고 있는 걸 모두가 달라붙어서 하루 밤 만에 뚝딱 완성했지. 어때, 근사하지?”


 선영이 으스대며 하는 말을 성민이 가로챈다.


 “어이, 이봐요. 그게 요점이 아니잖아. 이 시점에선 안나랑 훌륭하게 닮았다는 게 중요한 거야. 어때, 근사하지?”


 내가 주인공인 그림이니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만 이 감정은 첫 감상에 불과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이 훌륭한 작품은 높은 완성도만큼 나에게 당혹스러운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외동딸을 예술가로 키워내겠다는 부모님의 포부에 떠밀려 나는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시험을 받았다. 3살 때 피아노와 미술을 시작으로, 바이올린과 플루트, 성악과 발레를 쉬지 않고 배웠다. 딸의 적성을 찾고야 말겠다는 부모님의 욕심이 나의 욕심이 되어, 어렸을 때부터 나는 때 이른 의무감에 신경증을 앓았다. 하지만 하나하나 익혀 나가는 성취감에 들떠 지나치게 생기 넘치기도 했다.


 그렇게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엄마가 나에게 물어보았다.


 “뭐를 제일 하고 싶니?”


 “발레.”


“그렇구나. 엄마도 안나가 발레를 하는 모습이 제일 예쁘더라.”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으나 사실 처음으로 주어진 자율적 선택의 기회에 몹시 흥분했었다. 나는 육체적 고통이 따르더라도 직접 몸을 움직이는 발레가 좋았다.


 엄마는 내가 가장 오랫동안 해온 피아노를 계속하길 은근히 권유하셨지만, 나의 선택에 반박하진 않으셨다. 자율적 선택에 대한 동의는, 엄마가 나의 출생 전부터 계획하고 다짐해 온 교육관에 따른 것이었다.


 예술 고등학교 무용과로 진학한 후 노이로제적 증상은 더욱 심해졌고, 그것의 증거로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향상해 갔다.


 나의 십 대 후반은 시기심 많은 소녀들과의 경쟁과 아무런 강제 없이 자행하는 혹독한 훈련으로 탈진하는 나날의 연속이었고, 나는 서서히 고사해 가는 앙상한 나무에 맺혀 피어보지도 못하고 곧 시들어 떨어져 버릴 꽃망울 같았다.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는데, 혹시 무용 전공했어?” 선영은 호기심에 무례를 무릅쓰고 질문했지만, 내게도 숨길만큼 언짢은 질문은 아니었다.


 “네. 지금은 조금 지쳐서 쉬는 중이에요.”


 “역시 그랬구나. 몸가짐이 꼿꼿하고 유연하다고 생각했어. 혹시 발레 전공?” 영수가 싱글 생글 웃으며 발끝을 세우고 두 팔을 나비처럼 펼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급하게 말을 꺼내어 정정한다. “발레를 전공하긴 했어요.”


 “그럼 이제는 다르단 소리야?”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선영이 이어 묻는다.


 “워낙 지쳐서요.”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 “조만간 다시 시작해야죠.”라고 용기 내 말하여 스스로 결심을 다잡는다.


 벽면 안에 박제된 ‘춤추는 나’ 앞에서 또다시 술판이 벌어졌고, 나는 ‘볼레로’의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전위적인 동작을 음악도 없이 과장되게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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