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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Nov 01. 2024

바르셀로나에서의 초대장

평생 잊지 못해

 집으로 돌아가니 편지 한 통이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편지를 손에 들고, 평소보다 두근대는 심장박동에 템포를 맞추어 계단을 올라 문을 열었다. 책상 위에 편지를 올려놓고 나서 그것으로부터 등을 돌려 욕실로 향하는 나를, 모리의 향기를 풍기는 온화한 바람이 감싸 안는다. 샤워를 하는 동안, 책상 위에 무방비로 놓아둔 편지가 열린 창문을 통해 휘리릭 날아가 버리는 광경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윽고 책상 앞에 앉아 바르셀로나 소인이 찍힌 얇은 종이봉투를 손에 들었다. 길지 않은 편지는 답장이 늦어 미안하다는 양해의 말로 시작하여 모리는 잘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는 내용이 간략히 적혀있었고, 가까운 시일 내에 꼭 한번 놀러 오지 않겠냐는 초대로 끝맺었다.


 그 초대는 예의상의 것이 아니었고 그 글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오자면, ‘안나씨가 온다면 모리는 무척이나 기뻐할 것입니다. 지금의 모리에겐 어쩐지 침체된 기운이 있습니다만, 그런 모리에게 안나의 방문은 생기를 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듭니다. 큰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부디 귀한 걸음 부탁드립니다.’라며 나의 존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이 필체가 모리의 것과 똑같았고 글 전반에서 나의 칭명으로 ‘안나씨’와 함께 친밀함을 담은 ‘안나’도 빈도 높게 사용되고 있었다. 나의 머릿속에 장난스러운 표정을 한 왼손잡이 모리가 손에 볼펜을 꼭 쥐고 편지를 써 내려가는 괘심하지만 사랑스러운 광경이 떠오른다.


 겁이 나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모리에게 가는 편이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정하니 해야 할 것들이 생겼고, 며칠 동안은 여행 준비로 꽤나 정신이 없을 것이다.


 책상 위의 캘린더를 바라보았다. 달력을 한 장 넘겨 9월 첫째 주에 눈으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나는 인간이 당면한 한정적인 시간의 굴레 안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강박적인 촉박함을 너무도 오랜만에 느낀다. 때마침 책상 위의 핸드폰이 신경질적으로 진동하여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불안증에서부터 나를 해방시킨다.


 “그래서 정말 모리에게 갈 거니?”


 잠에서 완전히 깨어 나오지 못한 무기력한 목소리의 주인이 느릿느릿 묻는다. 가장된 태연함으로 애써 느리게 말해보지만, 내면의 뒤틀린 심사가 수화기를 통해 건너온다.


 “뭐라고요?” 나는 전해지는 속내가 껄끄러워서 따지듯이 되묻는다.


 “은혜 누나한테 들었어. 모리에게 가겠다고 했다며. 너 진짜 갈 생각인 거야? 충동적으로 움직이기보다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차분한 마음을 갖는 게 낫지 않겠어? 지금 상황에선 모리가 충동적 떠난 것처럼 보이지만, 모리가 괜히 문제 일으키는 타입도 아니고, 주변으로부터 떠나야 할 이유가 있어서 떠난 게 분명하잖아. 그렇게 멋대로 따라가 버리면 분명 일이 더 틀어질 거야.”


 지금껏 흐물흐물한 태도를 유지하던 지연이 공격적인 면모를 드러내자 나는 덜컥 겁을 먹었다. 당황한 머릿속에는 적절한 반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도, 이미 확신이 생겨서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걸요. 아마 그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을 거 같은 데요.” 용케도 문장을 만들어 내 의사를 전했으나, 그 기세는 한풀 꺾여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쉬익 가라앉았다.


 “모리는 나랑 10년 넘게 친구였어. 모리는 도망쳐 나온 곳으로 다시 오고 싶지 않을 거야. 아직은 시기상조일 텐데, 지금 안나를 보는 것은 오히려 부작용이 될 거 같아서 걱정이 돼.”


  ‘하지만 모리가 나를 불렀는걸.’ 하고 말할 수 없었다. 빠르게 이어져 가차 없이 귀를 관통하는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에, 모리가 나를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모리는 잠이 오지 않을 때 먹을 요량으로 맥주를 냉장고의 음료수 칸에 가득 정렬하여 놓았는데, 그것은 겨울철 도토리 저장에 열 올려하는 다람쥐처럼 보였다. 나는 모리가 공들여 모아들인 맥주들을 어느 날 갑자기 냉장고에서 사라지게 하는 마법 같은 장난을 치고 싶기도 했지만, 술에 약한 나로선 무리가 따랐고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 채 언제나 상상으로 만족해야 했다. 냉장고 안의 맥주들을 술고래처럼 모두 먹어치우고 기세 등등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나를 일터에서 돌아온 모리가 발견하고 기겁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하루에 몇 번씩 반복해도 질리지 않았다.


 테라스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좋아하지도 않는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 맥주를 좋아하는 모리가 흐릿한 형상을 하고 내 옆에 와 서서 ‘한 모금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오늘따라 밤하늘은 유난히 푸른 남색 빛을 띠어서 비현실적으로 늦게 해 지는 스페인의 여름 밤하늘처럼 보인다.


 지연의 전화를 받고 계획의 실행에 의욕을 상실한 나는, 냉전 중인 두 나라 사이에 낀 약소국이 된 느낌이었지만, 나 자신이 소모적인 다툼에 끼어든 우유부단한 사람이 되기 전, 용기 내 행동을 할 시점이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10년 동안이나 옆에 붙어 다닌 절친이라고 유세 떠는 거야 뭐야!’하고 지연에 대한 반감이 일었다가도, ‘그래. 10년이니 잘 알기도 하겠지.’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기로 한다.


 모리는 지연과의 관계를 정만 남은 노년의 부부로 묘사했지만, 지연은 바람난 남편에게 집착하는 히스테릭한 중년 부인처럼 모리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강력하게 해 왔다.


 타인이 발 들여놓지 않고 모리와 나뿐이었던 그 편협한 세상이 지속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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