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사무용 데스크에 의자를 바짝 당겨 앉은 은혜가 턱을 괸 채로 내 말의 키워드만을 골라내어 한 단어마다 길게 늘여 뜨려 천천히 발음한다.
“모리가…… 스페인에…… 친구 집…… 메일을…… 주원이에게…….”
“네. 모리가 스페인에 있는 친구 집에 갔고 거기서 형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나는 은혜의 책상 맞은편에 놓인 3 피스로 구성된 소파들 중 일인용 자리를 차지하고, 그녀가 나열한 단어로 문장을 조합해 같은 이야기를 재차 전했다.
“응. 그럴 수도 있겠네. 모리가 스페인에 관심 있어 했던 거 같아. 근데 언제 적 친구래? 지연이가 모르는 모리 친구도 있나?”
“대학교 친구일 거예요. 대학교 때 친구가 스페인에 있다고 모리가 말한 적 있거든요.”
“고등학교 친구라면 지연이도 알 텐데, 지연이한테 전화 좀 해줄래? 지금 당장 물어봐야겠는 걸.”
그녀의 요청을 받은 나는 간단한 전화업무도 처리도 못하고 상사 앞에서 고개 숙인 개인비서처럼 자신감을 잃었다. 내가 우물쭈물해하니, 은혜는 “지연이 번호를 모르는구나.” 하고 왠지 안도하며 혼잣말한다.
그녀는 탁자 위의 핸드폰으로 손을 뻗어 막힘없이 번호를 누른다.
“얘가 이 시간에 일어나 있으려나 모르겠네.”라고 중얼거리며 탁자를 두드리는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본다. 조용한 그녀의 사무실에 통화연결음 소리가 울리고, 끝내 지연이 아닌 어떤 여자가 전화를 받는다. 그 목소리의 영향권이 나에게까지 미쳐 본의 아니게 남의 통화를 엿듣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여보세요. 선생님,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지연 오빠 아직 안 일어났는데요.” 그녀의 핸드폰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선영이었고 은혜는 아무렇지 않게 알았다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혹시 지연이가 너한테 무슨 말 안 했니?” 은혜가 나에게 묻는다.
“어떤 말이요?” 맥락에서 벗어난 그녀의 질문에 나는 의아해져 묻는다.
그녀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그녀답지 않게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한다.
“역시나 지연이가 또 그랬나 보네. 그 둘 절대 예외가 없구나. 혹시 안나를 좋아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나는 물음에 상응하는 말을 하거나 그녀와 눈을 마주치거나 하지 않고, 그 말을 못 들은 것처럼 그저 바닥을 바라보고만 있다. 은혜는 “진짜 심각하네.” 하며 담배를 꺼내 문다.
“지연이의 어떤 행동에도 동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모두에게 좋을 거야. 지연, 안나, 모리, 너희 세 사람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말이야.”
그녀의 표정은 진지하고, 내 앞쪽의 창에 비쳐 보이는 나의 표정도 마찬가지다.
“또 그런 거라니요? 어떤 의미인지 들려주실 수 있어요?”
그녀는 보고 있던 서류로 눈을 돌려 다시 일을 시작한다. 그녀의 행동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지만 그녀의 불편한 심기가 완벽히 감춰질 수는 없어서 그녀 쪽의 공기에서 내 쪽의 공기로 불안정한 마음의 파동이 전해지고 있다.
“응. 굳이 너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지만, 너도 알아야 내 말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말할 수밖에 없겠지. 그 둘의 오래된 장난을 결국엔 말할 수밖에 없을 거야.”
또래들에 비해 사춘기가 늦게 찾아온 장난기 많은 두 소년은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일의 시작은 마른 소년에게 전에 없던 감정을 품게 하는 소녀가 생기고, 그 상대와 각별한 사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였다. 그러나 얄궂게도 마른 소년은 하얀 소년에게 말한다.
“너만 좋다면 너도 우리랑 같이 놀아도 돼. 그 대신 너도 나에게 그래야 되는 조건이야. 너만 괜찮으면 난 재밌을 거 같은데, 어때?”
마른 소년이 던진 직구에 하얀 소년은 기대감으로 붉게 상기된 얼굴로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입을 뗀다.
“정말 그래도 될까?”
마른 소년은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짐에 긍지를 느끼며 기세 좋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하얀 소년은 또다시 망설이지만 이내 그 손을 맞잡는다.
이렇게 시작된 두 소년의 굴곡된 시간은 그들이 자성하여 죄책감에 휩싸일 새도 없이 유쾌하게 흘러만 갔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길 때마다 그 감정을 공유하더라고. 마치 감염이라도 되듯. 한건도 빠짐없이 애인이 생기는 족족 그러기에 하루는 맘먹고 나무랐는데, 그게 뭐 대수냐고 웃으며 넘어가버리더라. 마치 서로 짜기라도 한 듯이 표정이나 목소리가 똑같아서, 나 그 두 명이 무서워지기에 더 이상 물어보는 건 그만뒀어. 그 후로 오히려 나 자신이 피하고 있을 정도로. 두 번 다시 이야기 꺼낼 엄두도 못 냈어.”
“며칠 전에 지연이 모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모리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할 거라고 말했어요. 어째서 이런 말을 한 걸까 하고 신경 쓰이긴 했지만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이제 조금이라도 신경 쓸 이유는 없겠네요. 그저 지연의 그 말이 진심이면 어쩌지, 하고 그의 마음을 안쓰럽게 여겼던 거니까요. 그 둘 한심한 짓이나 하고 실망스럽기 그지없네요.”
나는 예상치 못한 당혹스러운 이야기에 점차 말이 빨라져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맺는다. 지연의 대사를 인용하며 낮은 목소리에 차분한 말투로 지연을 흉내 내봤지만 그다지 비슷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야. 모리가 너를 지연이에게서 숨겼던 것은 이번에 만큼은 공유를 원치 않았던 거잖아. 모리에게 너는 특별한 거야. 맞지?”
“그렇지만 모리는 나를 이곳에 남겨두었는걸요. 그가 사라지고 지연과 만났으니까, 차라리 그에게 나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지연과 만나게 내버려 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요즘에 모리는 여러모로 힘들었어. 지친 거뿐이야. 모리가 돌아오면 확실히 알게 될 테지만 모리가 소중히 여기는 건 안나 밖에 없어.”
‘어떻게 그렇게 장담할 수 있죠?’하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확고한 태도에 나는 물 한 모금을 목으로 넘겨 말과 함께 삼킨다.
“모리의 그림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은혜에게 묻자 그녀는 한숨을 휴 내쉬며 상림이 가져갔다고 말했다.
“아직 미완성이라고 말했는데도 소용없지 뭐야. 그 그림 선배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어. 애초에 모두가 말리는 오더를 맡지 않아야 했어. 섣부르게 승낙한 나도 잘못이지. 상림 선배 모리에게만큼은 음흉한 구석이 있으니까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 모르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번만큼은 피하지 않는 모리를 보면서 난 대견한 마음이 들었던 거야. 하지만 정말 이해가 안 가. 항상 피해 다니기만 한 주제에……. 심지어 그림도 끝내지 않고……. 괘씸한 녀석. 아! 하지만 안 됐어.”
“제가 모리에게 가보는 게 좋을까요?”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내가 실행에 옮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안나한테 그런 용기도 있어?” 은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외라는 듯이 말한다.
“용기라기보다, 모리의 도피에 제가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응. 어쩌면 그게 모리가 원하는 걸지도 모르고. 일단 네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좋을 거 같아. 모리의 도피라……. 도피라는 표현 굉장히 적절하네. 모리가 돌아오면 말해주자. ‘이제 도피는 그만해!’라고 말이야.”
도피라는 단어에 확신을 담아 몇 번씩이나 내뱉는 그녀의 얄미운 입술을 빨래집게로 잡아 더 이상 도피의 도자도 꺼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아빠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던 엄마에게 기꺼이 장단 맞춰줬을 때 눈을 흘기던 엄마처럼, 설사 딸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가 자신의 남편 험담하는 꼴을 못 보던 엄마의 심리와 동일한 기작의 반응이 일어났다. 이런 논리적이지 못한 메커니즘의 원인을 내 탓으로 하기 싫어서 모리에게 책임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