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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Nov 11. 2024

물과 관련된 사건

평생 잊지 못해

 “내가 그림 도구들을 안쪽으로 가지고 들어가니까 다들 하이에나 같은 눈을 하고 따라 들어오는 거야. 나는 사실 안나에게 줄 선물을 오로지 혼자 준비하고 싶어서 달갑지 않았어. 완성 시간이 짧아진다 해도 내 입장에선 의미퇴색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어제 네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어제 그의 전화는 괜한 참견이었고, 확실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아 쓸데없는 감정 소비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미소 지으며 대답한다.


 “괜찮아요.”


 ‘당신이 어떤 말을 하던지 나에겐 중요치 않아요. 괜찮아요.’


 “산책할래요? 지연이 좋아하는 그 정원으로 가요.”


 나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서 괜스레 추워하는 몸짓으로 어깨를 움츠려 팔짱을 끼고 그에게 넌지시 말한다. 그는 “그럴까.” 하고 따라 일어나더니 앞장서서 뒷모습을 보이고 걷는다.


 그는 나와 처음 만났던 날에도 뒷모습을 보이고 곧장 걸어 정원으로 나갔다. 그가 그때처럼 중간에 걸음을 멈춰 고개 돌려 나를 한번 본다. 그 순간 모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와 함께 지내도 좋을 거란 불길한 충동이 나의 머릿속을 스쳐, 차마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자기 혐오감이 든다.


 밤의 균형이 깨진 새벽하늘은 신선하고 청명하여 화창할 오늘의 날씨를 짐작 가능케 하지만, 공기 중에 떠다니는 물기 젖은 비릿한 풀 냄새는 비가 내리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온다. 아직 빛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한 이른 새벽은 조각난 유리처럼 날카로운 위태함이 있어 어느 계절에나 싸늘함을 풍기고, 나는 그 쌀쌀맞은 시간에 불쾌함을 느끼며 정원으로 한걸음을 내딛는다.


 지연이 키 큰 나무 옆에 위치한 벤치에 앉는 것이 눈에 들어와 그 자리가 이슬에 젖지 않았을까 신경 쓰였지만, 그는 엉덩이를 살피는 낌새 없이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일 뿐이다. 나는 그를 따라 의자에 앉으려다가 방향을 틀어 오른쪽으로 걸었다. 내 발길이 멈춘 지점은 의안이 빠져 뻥 뚫린 눈과 같이 생긴 구덩이 앞에서였다. 지연은 왼편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과 따로 떨어져 텅 빈 연못 안을 쪼그리고 들여다보는 나를 무심히도 바라보고 있다.


 테두리에 나무 울타리가 쳐진 이 텅 비워진 연못은 1미터 조금 더 되어 보이는 깊이에 아틀리에 건물과 평행하는 가로 폭의 길이가 세로보다 더 긴 타원모양으로, 아담한 규모가 아니었으며 흉물스럽기만 하여 이 정원의 뛰어난 심미성에 어울리지 않는다.


 “왜 물이 없는 거야?” 나는 연못 안의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그 바닥을 보는 시선을 흩트리지 않고 지연에게 묻는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 침묵 동안에 나는 메마른 연못 주위에서 음산한 이끼 내음을 맡았다. 고개를 들어 한참 아무 말 없는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는 어색하게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물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있었으니까.”


 지연은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느닷없이 그 연기로 도넛 모양을 만들어 내보낸다. 나의 물음이 그의 마음에서 평정을 꺼내 달아난 것이 분명했지만, 잔인하게도 그런 모습에 더욱 궁금증이 동한 나는 그 ‘안 좋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연의 입안에서 끄집어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곤란함이 스쳐 지나가더니 자신을 주시하는 나를 보고 픽 웃는다.


 “그렇게 궁금해할 것 없어. 별일 아니니까.”


 그는 휴대용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꺼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을 회피할 목적으로 오직 정면만 주시한 채 한 걸음 내딛는다. 두 걸음을 내딛으려는 찰나에 갑자기 흠칫 놀라며 엉덩이를 탈탈 털어댄다.


 “아, 차가워. 다 젖었네.” 지연은 모던타임스의 찰리채플린처럼 과장스럽게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해 보인다.


 ‘그럴 줄 알았어.’ 나는 코미디를 연출하는 그에게서 눈길을 돌려 불온하게 내 시선을 붙잡는 구덩이를 힐끔 쳐다본다. 그러다가 석연치 않은 어두움을 풍기는 연못의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내 몸을 일으킨 나는, 성큼성큼 걸어서 지연보다 빨리 응접실로 통하는 미닫이문을 덜커덩 소리가 나도록 힘차게 열어젖힌다.


 한겨울 도둑고양이처럼 재빨리 실내로 발을 들인 내가 획하고 뒤돌아 지연을 보니, 그는 점점 과업에 태만해져 느지막이 업무를 시작하는 9월 말의 아침 해를 뒤에 두고 멍하니 나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서있다.




 밤낮이 뒤바뀐 그레이 아틀리에의 예술가들은 성실하게 하루를 끝맺고 환한 아침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고, 나 또한 피곤함이 엄습했지만 낯선 행성에 떨어진 어린 왕자처럼 어리둥절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푹신한 일인용 안락의자에 파고들어 몸을 숨기듯 앉아, 눈을 반만 뜬 헝겊인형처럼 미동도 없이 잠에 빠져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때에 은혜가 독백을 읊으며 아틀리에 안으로 들어섰다.


 “참나, 문단속도 안 하고 어디들 간 거야.”


 그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작업실 안을 둘러볼 기색도 없이 그녀의 사무실로 곧장 가려고 하기에, 나는 얼굴을 슬그머니 내밀고 “은혜선생님. 은혜선생님.” 하고 소리를 내본다. 은혜는 “어머, 뭐야. 있었어?” 하면서 잰걸음으로 다가와 어느새 내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민다.


 “우리 안나는 여기서 뭐 해? 딱하게 혼자만 빨간 토끼 눈이 되도록 잠도 못 자고.”


 그리곤 싱글싱글 웃으며 널브러져 자고 있는 성민을 발로 툭툭 건드린다. 성민은 동사한 거리의 부랑자처럼 움직임이 없지만, 은혜는 애초에 깨어나길 바라지도 않은 듯 그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 대신 그녀는 위화감을 풍기는 처음 마주한 벽면의 그림에 정신이 팔려있다.


 그녀는 그림 속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머, 저기 벽에 안나잖아? 안나지? 응?”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에게 물음을 건넨다. 나는 은혜의 손끝이 유난히 뾰족하고 길다는 생각을 하며 그 섬세한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에 초점을 맞춘다.


 순간 현재가 과거인 듯한 기시감이 일고 머릿속이 아득히 까매지더니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네. 네. 저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이 대답이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머릿속에서만 공허하게 울리는 것인지를 알아내지 못한 채 그림 안의 나에게 동화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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