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방불명의 연인

평생 잊지 못해

by 새아

“그래서 이런 산중에 갇혀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단 거야? 너답지 않아. 네가 언제부터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아들이었는데?”


지연이 담뱃갑 모서리에 숨어있던 마지막 한 개비를 우악스럽게 끄집어내며 말한다.


“미안. 이제 도망가기도 지쳐서.”


모리의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가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나는 못 본 새에 어깨 언저리까지 내려온 모리의 얇은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가져댄다. 보드라운 감촉이 손끝에 닿자 모리와 함께 있음이 서서히 실감 나기 시작한다.


“내일 우리랑 같이 나갈 거지?”


지연이 모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묻는다.


“응. 그래.”


모리가 일말의 저항도 없이 눈꼬리 내리고 웃는다.


한 뼘 간격 띠우고 같은 소파에 나란히 자리한 지연과 모리는 오랜 친구가 아닌 애증까지 사랑의 일부분으로 초월한 오래된 연인처럼 보였다. 한 컷에 담긴 그들을 처음 본 나에겐 둘 중 누구에게도 질투 나는 광경이었다.


“안나야.”


모리가 나를 불렀다. 아늑한 목소리가 나를 감싼다.


“응?”


나의 눈 아래 부근에 눈물 고임이 느껴졌지만 다행히 눈 밖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예뻐졌네.”


그의 웃는 얼굴에 감격해서 나는 결국 눈물을 펑펑 쏟는다.




장시간 운전으로 피곤했던 지연이 제일 먼저 잠이 들고, 차 안에서 잠만 잔 나는 눈도 정신도 말똥말똥했다. 아틀리에에서 조우했던 그림이 서명까지 들어가 완성된 채로 벽에 세워져 있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그 그림을 가리키며 본 적 있다고 하자, 모리는 자신의 그림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마치 암세포덩어리 같이 흉물스럽지만 이 형태는 인공위성에서 찍은 지구 사진 같은 거라고 말했다.


“각자 일부분을 이루지만, 결국엔 모이는 수밖에 없어. 그걸 모르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죽어가는 개체일 뿐이지. 우리 모두는 너무 닮아서 서로 다르게 되려고 치장하고 있을 뿐이야. 어떤 색의 옷을 입던 알맹이는 같다고 생각해.”


세포가 증식하는 모양을 한, 제각기 떨어진 그림을 하나로 합치면 거대한 작품이 되었다. 새끼손톱 반만 한 세포들이 모여 180 cmX180 cm 크기의 캔버스를 채웠다. 같은 규모의 것들이 15개 더 있었다. 일 년 동안 자신의 그림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자화자찬하는 모리는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사실은 나 아버지를 닮아서 사이즈로 승부하거든. 이제까지 숨겨서 미안해.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어. 그렇지만 너무 서운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자신에겐 더 철저히 감춰왔으니까.”


그는 자신의 그림을 배경으로 서서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난 내일 같이 나가지 않을래. 마무리할 그림들도 남았고, 이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사는 삶이 편해. 지금이 좋아. 여기, 이렇게, 낙원처럼 조용한 곳에서…….”


“무슨 혼자만 속 편한 소리야? 너 찾으러 일 년 동안 어디까지 헤매고 다닌 줄 알아? 모리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않았구나? 날 내쫓았던 그날에 알아봤어. 그날, 날씨도 얼마나 좋았는데……. 나 하나하나 다 기억나. 네가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날 어떤 눈으로 쳐다봤는지. 그날 같이 외출하려나, 기대하고 있었단 말이야. 얼마나 실망했는지 짐작이나 할 수 있니? 그런데도 이 숲 속 깊숙이까지 찾아왔는데, 넌 일 년이 지나서도 변함없이 날 내쫓고 있어. 내가 모리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모리는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니?”


갓 태어난 아기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현재 생활의 만족감을 표현하는 모리의 말을 도저히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모리에게 화가 나서도, 나 자신이 불쌍해서도 아니었다. 모리가 이상했다. 예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불쾌하게 물컹거리는 어떤 것이 모리 안에 있었다. 그 이물질을 그대로 방치하고 싶지 않아서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방금 말했잖아. 내가 아버지처럼 변해가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난 아버질 점점 닮아가. 아버지 같은 남자 옆에서 안나는 행복할 수 없어.”


날 향한 모리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다.


“모리야말로 알고 있지? 지금 헛소리하고 있어. 모리는 당신 아버지가 고압적으로 심어놓은 망상에 사로잡힌 거야. 빠져나올 수 있어. 아버지처럼 되기 싫다며.”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잔혹한 세뇌 방법으로 모리를 이토록 강렬한 강박관념 안에 가둬버린 걸까. 초현실적 암시 혹은 과학적 최면. 무엇이 됐건 비합법적 방식임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발버둥 쳤지만 헛수고였어. 내가 너에게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니. 나에겐 널 설득시킬 능력이 없어. 넌 내가 아니고, 하물며 나의 아버지는 더더욱 아니니까.”


그의 얼굴이 죽음을 코앞에 둔 산제물처럼 창백하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난 제삼자니까 덜 심각할 수 있어. 사고를 환기시켜 봐.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건 흔하디 흔한 일이야. 집착 담은 미련한 바람을 아들에게 강요하는 거지. 모리 아버지의 경우엔 그 정도가 거세서 사명이나 운명으로 착각될 만큼이지만, 단지 하나의 소망일 뿐이야.”


내 말에 확신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 말을 모리가 순순히 믿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당신을 여기서 데리고 나가고 싶어. 모리를 이렇게 만든 그 사람을 모리의 안에서 없앨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정론 따위에 기대는 게 아냐. 하지만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어.”


원래 고집이 센 모리지만 이번만큼은 어지간히 그만하고 굽혔으면 좋겠는데…….


“내가 그 흐름에 끼어든다면? 내가 방향을 틀겠다고 나선다면? 나를 무너뜨리고 지나갈 거야?”


“네가?”


힘에 부쳤는지 고개 숙이고 바닥에 주저앉았던 모리가 고개를 들어 반응한다.


“그래. 내가 산산조각 날 걸 알면서 나를 뚫고 갈 수 있겠어?”


모리가 초점 잃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갈기갈기 찢겨 흩어지는 내가 그의 눈에 비치는 거라면 다행이다. 돌연 그가 피식 웃는다.


“못하지. 한 발자국도 더는 못 나가지.”




모리가 마음을 정리하고 짐을 꾸릴 때까지 삼일이 걸렸고, 우여곡절 끝에 되찾은 나의 연인이 행방불명의 기간 동안 공들여 완성한 그림들은 하나하나 철저하게 소포지로 싸서 이층 계단 옆 복도 난간에 세워두었다. 지연은 그 덩치 큰 것들을 바깥세상으로 옮기기 위해 용달차를 조달하러 시내로 내려갔다. 덕분에 지원과 약속했던 우리의 일정은 이틀이나 지체됐다.


내일이면 상림이 자신의 보물을 숨겨놓은 이 호젓한 아지트에 들이닥칠 것이다. 발각 전에 도망쳐야 한다. 도둑이 훔쳐간 귀중품의 가치를 곱씹으며 분개하는 그의 모습이 떠올라 지옥의 최저층을 훔쳐본 듯 섬뜩해진다.


밖에서 차바퀴가 흙바닥을 짓이기며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연이 돌아온 것이다. 곧이어 차문을 여닫고 나온 사람의 기척이 현관까지 가까워졌다. 나는 모리 방 앞의 복도 난간에 기대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때를 살피고 있었다.


내 옆에선 모리의 분신과도 같은 그의 그림들이 나를 호위해주고 있다. 모리와 나만의 잠깐의 시간은 다했다. 이제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