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성벽

평생 잊지 못해

by 새아

“모리야. 가자.”


나는 열린 방문을 지나 모리에게 다가가 그의 옆에 놓인 작은 갈색 슈트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응. 그래. 가자.”


모리는 커다란 남색 배낭을 짊어 멨다. 동쪽으로 난 창문으로 갓 떠오른 여름의 남성적 해가 아침부터 사납게 울부짖으며 타오르고 있다.


“아들아. 어딜 가느냐.”


주위를 둘러보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 마치 하늘 저 꼭대기에서 들려온 것처럼.


배낭의 어깨끈 한쪽씩을 각각 부여잡고 있는 모리의 뼈마디 두드러지는 두 손이 긴장으로 경직됨을 보았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계단을 올라와 이층 모리방의 문 앞까지 도달한 남자가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뻣뻣한 마직물로 짜인 반팔 흰 셔츠와 같은 소재의 통 넉넉한 짙은 남색 바지를 입고 서있었다. 바지는 관절이 굽혀지는 무릎 뒤쪽부터 주름이 잡혀 단정함에선 거리가 생겼지만, 관리 힘든 마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구김이었다.


높은 습도와 기온이 사람을 골탕 먹이는 가운데, 땀 한 방울 배출하지 않고 오히려 버석거려 보이는 그의 피부는 무슨 영문인가 싶었다. 아마 자동차 안의 에어컨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듯하다.


“네가 누군지 알겠구나.”


나를 향해 부릅뜬 그의 두 눈이 자신이 붙어있는 육체의 주인으로 군림하여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다리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과 우리의 간격이 점점 줄어들었다.


대기의 힘을 흡수하여 동력으로 삼는 듯 그의 움직임은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더욱 거침없어지고, 주변의 공기는 종양이 전이되어 암 덩어리로 변형된 장기처럼 축축 늘어진다. 도무지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강력함이 결코 서두르지 않고 우리에게 밀려들어온다.


“모리는 떠날 거예요. 저와 함께 여기서 나갈 거예요. 제가 데리러 왔거든요.”


두려움 속을 비집고 나온 용맹스러운 나의 말들이 높고 두꺼운 철벽에 부딪혀 효용성을 잃고 나가떨어진다.


“안 돼. 그건 허락할 수 없다.”


우리의 앞에 까지 다다른 그가 모리의 백팩 왼쪽 끈을 폭력적으로 잡고 그것을 벗겨 내기 위해 거칠게 쥐고 흔든다. 그 바람에 모리의 몸도 그 힘에 휩쓸려 기우뚱거린다. 그러나 남자의 눈은 여봐란듯이 여전히 나를 보고 있다.

“내 아들에게서 떨어져.”


나는 투박한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모리가 안쓰러워 죽을 지경이었고, 그 손아귀에서 모리를 구해내야겠다는 악 받친 억울함이 극에 달했다. 급기야 손에 든 왜소한 여행가방으로 남자를 가격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무용지물인 무기는 미련 없이 수중에서 내던져버린다.


‘당신이야말로 이제 내 모리에게서 떨어지세요.’


난 그의 손을 떼어내려 기력을 다해 매달렸지만 역부족임은 불 보듯 뻔했다. 나는 기민하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 힘줄 불거진 단단한 팔을 이로 덥석 깨물었다. 그의 팔은 영겁의 세월 속에 연마된 돌덩이 같아서 내 뭉툭하게 네모진 치아가 박힐 허점은 없었다.


무적의 상대는 다른 쪽 팔로 나를 밀쳐냈다. 나는 천체의 인력에 끌려 나가는 바닷물 속 연약한 해양생물체처럼 저항 한번 못해보고, 가까이 두고 보니 닮은 구석 하나 없는 그 둘과 저만치 멀어져 바닥으로 밀려났다. 그의 눈은 떨어져 나간 나를 놓치지 않고 쫓아와 멸시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때에 모리가 매고 있던 배낭을 벗어 남자의 품으로 내던지고 달려와 넘어진 나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나는 타격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모리가 이끄는 대로 재빠르게 발을 옮겼다.


그 남자는 포효하는 변종 짐승처럼 분노하며 우리를 뒤쫓는다. 그 순간 고개 돌려 마주친 그의 눈에서 이성을 잃은 남성의 야수적인 매력을 느꼈다. 일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다다라 나와 연결된 모리의 팔이 사정없이 붙잡혔다. 그 팔을 뒤로 잡아끌어 모리가 내 쪽으로 쓰러지자 우리는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계단을 가로막고선 남자는 4개의 팔을 가진 힌두교의 신이 골문을 지키는 모습이 연상될 만큼, 뚫고 나갈 엄두 안 나는 막강한 방어력을 구사하고 있다. 돌파의 의지 꺾인 나의 시야로 난간에 기대 세워둔 그림들이 들어온다. 악마가 활개 치는 세상을 구제하는, 게임 속 인간미 없는 히로인 캐릭터처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돌진한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인지할 겨를도 없이 오직 타깃을 향해 달린다. 그러다 직선 궤도에서 15도 정도 이탈하여 오른쪽으로 나아간다. 옆에 서있던 캔버스의 양쪽 모서리를 양팔 벌려 잡으려 했으나, 두 손이 각각 가장자리까지 닿아 그것들을 감아쥐기엔 팔 길이가 부족했다.


그때 모리가 재빨리 나를 뒤따라와 오른쪽 모서리를 잡아들었고, 나는 나머지 한쪽을 맡아 들어 올렸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그림을 방패 삼아 진격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으나, 사전에 작전회의하고 예행연습까지 마친 것처럼 손발이 딱딱 맞는 움직임이었다.


모리와 나는 누가 뭐래도 완벽한 한 쌍이야,라는 오만한 착각이 왼쪽 입가를 실 같은 근육을 사용하여 끌어올리기 시작했을 무렵, 우리 둘 앞을 가로막던 장애물이 조금씩 밀려나갔고 급기야 떨어져 나갔다.


‘쿵’하는 소리가 그림판자 너머에서 들려왔고, 나는 ‘Quest clear’하는 뿌듯한 마음을 표정에 실어 나의 동료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나 내 눈앞엔 몸서리쳐지게 공허한 모리의 뻥 뚫린 두 눈이 떠올라 나의 웃음을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번쩍이는 한줄기 광선이 내 머릿속을 반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한번 생명을 잃었다가 AED의 전기충격으로 심장박동이 재개된 사람처럼 정신이 혼미했다. 갈색 종이에 싸인 채로 시야를 막고 서있는 물체 너머로 얼굴을 내민다.


자신의 의지로 차분히 걸어 내려간 것이 아니다. 외부에서 가해진 힘을 버티다 못해 나뒹굴어진 것이다. 처참한 각도로 고개가 꺾인 상림은 절대 살아있을 수 없음이 분명한 모양새인데도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날 듯한 응축된 생명력을 뿜어냈다. 아마 그가 미처 떨쳐버리지 못한 잡념들이 그들을 묶어뒀던 주인의 파손에 의해 새어 나오는 중이기 때문이리라.


나는 계단난간을 손으로 훑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빠르게 움직일 기력은 없었다. 일층에 도달해 위를 올려다보니, 모리는 아직 견고한 성벽 같은 캔버스에 몸을 숨긴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