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잊지 못해
“모리야. 다 끝났어. 죽었어. 우리가 죽였어.”
모리는 아무런 말도, 아무런 눈에 보이는 반응도 하지 않았다.
“모리가 지금 이 상황이 싫다면, 나 혼자 처리한 걸로 할게. 그러니까 좀 나와 봐.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두꺼운 판자는 나의 간곡한 요청을 모두 흡수하고 모리에게 전해주지 않는다. 현왕의 귀를 막아 나라를 수렁에 빠뜨리는 악마 들린 음험한 간신처럼.
침묵이 언제까지나 이어지려던 순간, 지연이 벌컥 문을 열고 다급히 들어왔다.
“밖에 모리 아버지 차가…….”
문밖에서 상림의 기습에 의해 겁에 질린 그가 문안에선 상림의 죽음을 목도한다. 과연 이 광경에 대한 그의 감상평은 비통일까, 안도일까.
“어떻게 된 거야?”
지연이 두 눈을 몹시 커다랗게 뜨고 그 안에 의아함을 가득 품은 채로 점점 내게 다가온다.
그때 계단 위 모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포장된 그림이 주술에 걸린 듯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간다. 순간 지연의 얼굴엔 경악의 빛이 떠올랐으나, 이윽고 그림 뒤편에서 모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떫은 과일을 억지로 삼키는 표정을 짓는다.
“어떻게 된 거야?”
지연이 동일한 질문을 다시 던진다.
“나와 안나가 밀었어.”
모리가 태연스레 머리를 뒤로 넘기며 계단을 내려온다.
여기서 그가 어떤 훌륭한 연기를 펼치던, 나는 예의 그 두려움을 보았다. 그를 한없이 텅 빈 나락으로 밀어 넣었던 거대한 두려움이었다.
“죽일 생각은 없었어. 아버지를 제치고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가득 찼던 거야.”
모리가 집게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말하자면 사고였어.”
그가 지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응.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엄밀히 말하자면 사고일 뿐이야. 어쩜 일이 이렇게 됐을까.”
내가 지연을 향해 변명하듯 모리의 말을 반복한다.
지연은 일이 분 정도의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말한다.
“그래.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네. 우리 셋이 서로서로 도울 수밖에 없어. 항간에 시끄러운 소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안심해도 좋아. 알다시피 난 이 분야에서 무면허 기술자니까.”
지연이 풋하고 웃었고, 모리와 나는 웃지 않았다.
“갓 고인이 되신 이분은 어차피 내일 오시기로 되어있었고, 우리는 이틀 전에 여기를 빠져나가기로 했어. 그건 사전에 지원누나와 상의해서 나온 일정이야. 모리가 여기 은신했음을 아는 사람은 이제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으니 문제 될 일 없어. 우리 둘은 단 둘이서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예정대로 움직인 거야. 다행히 아까 마을에 나갔을 때, 마주친 사람도 없었고. 저 덩치 큰 그림들을 내가 은밀히 처리해야 한다는 점이 좀 성가시게 됐지만 어려울 건 없지. 혹시 모리 아버지가 누나에게 연락을 취했다고 해도 우리는 이틀 전부터 이미 이 별장에 없었던 거야.”
지연과 나와 모리는 그 불운에 휩싸인 곳에 우리가 남긴 나쁜 짓의 흔적을 깨끗이 제거해 나갔다. 짐을 모두 챙겨 저택의 문을 열고 나오자 불같은 태양이 지면을 태워버릴 것처럼 빛줄기를 난사하고 있다.
우리가 저지른 죄 때문에 세계가 지옥 불에 뒤덮이는 건 아닐까. 몇 시간을 되돌려 상림이 들이닥치기 전에 이곳을 떠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이미 현재의 경계선 너머로 흘러간 시간을 불러들일 능력이 나에겐 없다. 지금은 모리와 함께, 우리의 아늑한 보금자리에서, 예전과 같이 생활하고자 하는 열망만이 있다.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모리는 뒷좌석에 몸을 누이고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지연은 한 번도 눈을 뜨지 않고 내리 잠만 자는 모리를 백미러로 확인하고 ‘뉴본 베이비’ 같다 말했다. 그때 지연의 얼굴은 물놀이에 지친 아들을 챙기는 자상한 아빠의 이상적 표본이었다.
지연과 나를 포함한 아틀리에 식구들은 상림의 장례 첫날부터 참석해 빈소를 지켰다. 생전 그가 추구했던 작풍의 스케일만큼이나 거창한 장례였다. 예술계뿐만 아닌 각지각처에서의 조문은 끊이지 않았고, 거장의 안타까운 사고사는 매스컴을 통하여 떠들썩하게 보도되었다.
그리고 모리는 세 번째 날에 찾아왔다.
며칠 동안 나와 떨어져 자신만 아는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던 그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돌아온 탕아처럼.
“모리, 너 어디 갔다가 지금에서야 나타나니? 넌 정말 불효자야.”
검은 상복을 입은 지원이 퀭한 눈으로 절망의 숨결을 내뱉으며 모리를 탓했다. 기세 당당했던 과거의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장례를 치렀는지, 웬 볼품없고 나약한 여자 한 명이 지원을 대신하고 있다. 모리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배다른 누나의 슬픔에 찬 책망을 받아들여 자신의 마음속에 켜켜이 쌓았다.
“도대체 어디 있었냐고. 아버지 속만 썩이더니 마지막까지 변함없구나. 이제 너도 좀 어른이 될 수 있겠니?”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죄송해요. 형에게도, 누나에게도, 아버지께도, 우리 어머니들께도, 너무 죄송해서 눈앞이 캄캄해져요. 누나, 전 어른이 될 수 없어요.”
모리가 얼굴을 들어 지원을 바라본다. 지원이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의 사죄에 와락 울음을 터뜨린다.
그녀는 모리의 다리에 매달리듯 주저앉아, 지금 자신의 모습과는 반대로 “무너지지 않을 거야.”라고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