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밤 아랫배가 아팠다
영일의 와이프는 차분하고 심플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조향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후각을 예민하게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이 직업을 가진 후로 음식도 자극적이지 않은 걸로 고집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먹는 것이 취미이자 필수가 되었다고 했다.
“컨디션이 안 좋거나 몸에 변화가 있으면 후각에 변화가 생겨요. 5년 전에 한번 자연유산을 겪었어요. 그때는 후각이 특정 냄새에 너무 예민해져서 병원에 갔었는데 임신 3주 차였죠. 그리고 6주 차에 유산되었어요. 그 시기에는 일하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아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행복했었요. 특히 남편이 기뻐했죠. 그 이후로 임신된 적은 없어요.”
그녀는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아무도 그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먼저 침묵을 끝낸 사람은 영일이었다.
“우리는 아기가 안 생기는 부부라고 했거든. 병원에서 틀릴 수도 있구나 했는데, 결국에 아니었지.”
“저희도 불임 판정을 받았어요. 아기를 몸속에서 키우고 낳아서 길러내는 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제가 아이를 키운다고 하면 잘할 자신은 없어요. 한편으론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영일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인지 나의 고백에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우리는 공통점이 많을 것 같네요. 나이도 같고 아이를 원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요.” 영일의 와이프가 나를 보고 말했다.
“저는 없는 장점들을 많이 같고 계시는데요. 저는 이런 근사한 음식들을 만들 솜씨도 없고 테라스의 가드닝 같은 손 많이 가는 취미는 엄두도 못 내는 성격이에요.”
“취미는 일부분이죠. 본질은 비슷한 사람들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번 P시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남편들은 더 바빠질 텐데, 우리 둘이 자주 만나요. 테라스의 가드닝은 남편의 작품이에요.”
그날 저녁 나는 체한 듯 명치가 뻐근해 식사 후 머지않아 영일의 집에서 나왔다. B는 나의 불편함을 감지하고서는 일찍 마무리하자고 먼저 제안했다. 그들의 집에서 나와 들이마신 초가을의 바깥공기는 시원하고 달콤했다.
B와 나는 부지런히 아침을 먹고 미뤄뒀던 숙제를 마치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혈액 채취만으로 간단히 유전자 검사는 끝났고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이틀이 소요된다고 했다. 간호사에 따르면, 보통 검사는 2주 정도 걸리나 나의 혈액은 바로 검사기관에 보내져 다른 케이스보다 먼저 진행될 거라고 한다.
검사가 예상보다 일찍 끝나자 B와 나는 P시의 프로젝트 부지를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길이 막히지 않았고 목적지까지 2시간이 걸릴 거라고 내비게이션은 계산했다. 서울을 벗어나 점점 도로 양옆으로 산이 줄지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고 달리자 바스락거리는 가을의 상쾌한 공기가 차 안을 채웠다. 운전하는 B의 옆모습은 별다른 생각 없이 느긋해 보였다.
요즘 한창 고민에 사로잡힌 표정을 자주 짓고 있던 그였다. B는 나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 운전에 열중해 있었다. B는 걱정이나 불안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고,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들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내 머릿속 복잡하고 쓸데없는 생각들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P시의 부지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다. 도로로 연결된 산 중턱에 위치한 부지는 주변에 어떠한 건축물도 있지 않고 수풀만 무성했다.
“여기서 일하게 될 사람들은 좋겠다. 수도원이나 사찰 부지 같아.”
“좋은 설계안이 선정되어야지. 이런 자연환경을 해지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언젠가 B의 건축물에서 살 수 있겠지?”
“내가 설계한 건물에서 살고 싶어?” B는 의아한 듯 벙찐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응. 방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떠올랐어. B가 우리를 위해 만든 집에서 살아야겠다는. 건축가가 남편이면 당연하게 드는 생각 아니야?” 나는 되묻는 B를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A는 그런 생각 안 하는 사람이니까. 요새 좀 변한 거 같아. A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집은 뭐야? 우리가 살 집은 상상해 본 적이 없어.” B가 심각하게 말했다.
“내가 좀 변했어? 몸이 변해서 그런가 보네. 나도 이상적인 집은 아직 생각 안 해봤어. 왜 그렇게 갑자기 심각해?” 심각하다 못해 넋 나간 듯한 표정의 B가 귀여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가 살 집을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워서.”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런 거 아냐? 결혼 후에 몇 년간 강의랑 다른 설계만으로도 머리가 꽉 차 있었잖아.”
B는 무슨 생각인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지금 집에 만족하고 있긴 해.” B는 혼란스러워 보이다가 느리게 말을 꺼냈다.
“응. 우리 생활 패턴에 딱 맞춰져 있잖아. 둘 다 직장에서도 가깝고.”
“내가 설계한 집에서 살게 되는 건 얼마나 먼 일이 될까.”
“그 시기는 우리가 결정하기 나름 아니야?” 나는 의아함에 그에게 물었다. 그는 그것이 마치 이뤄지기 힘든 꿈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자기 말대로 필요에 의해서라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까..”
“응. 후순위로 밀리긴 하겠다.” 나는 그의 말에 동조했다.
B에게는 단 한 번도 서운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울적함이 밀려왔다. 호르몬의 변화가 나의 기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대단치도 않은 것에 감정이 상하는 내가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B가 설계한 집에 살게 되면 좋겠어.”
B는 나의 말을 못 듣고, 출입 통제 안내문 앞에 서서 부지 안 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해가 들지 않는 울창한 숲 속은 서늘하고 어두침침했다. 숲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차 안의 우리 둘은 조용히 창밖만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