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밤 아랫배가 아팠다
내가 검사를 받으러 가지 않자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몸의 상태를 묻는 안부 인사를 가장한 독촉 전화였다. 나는 아픈 곳이 없어 검사를 미루고 있다는 대답과 함께 조만간 방문하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검사의 결과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염색체에 이상이 생겨 여성 호르몬을 생성하지도, 여성 호르몬이 작용하지도 않게 되는 몸이 되었다고 여자 1과 2와의 만남에서 들은 바 있다.
내 몸의 이상 작동과는 다르게 컨디션은 무척 좋았다. 매일 밤 잠에 쉽게 들었고, 무얼 먹어도 입맛이 돌았으며 소화가 잘 됐다. 아랫배에 묵직하게 고여있던 덩어리가 빠져나간 듯 몸이 가벼워졌는데 이런 느낌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얼굴 혈색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나의 병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전날 밤 TV를 켜놓은 채 소파에서 잠이 든 나를 본 B가 나에게 얘기했다.
“아무런 걱정 없이 너무 새근새근 자고 있어서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말을 못 했어. 그렇게 기분 좋게 자는 A는 어제 처음 봤어.” 그렇게 말하는 B의 얼굴은 피곤에 초췌해져 있었고, 부러운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안 그래도 모두들 요즘 나에게 그래. 건강해 보인대.”
“응. 정말이야. 자기 몸도 마음도 좋아 보여.” 그가 싱긋 웃었다. 그의 한 손에는 노란 바나나를 들고 있었다.
“바나나는 씨가 없어서 먹기가 좋아.” 나도 그를 따라 바나나 한 개를 집어 들었다.
“신기하지. 바나나는 씨가 없어서 무성 생식으로 키운대. 그래서 멸종 위기가 있는 거고.”
“어머, B와 나 같네. 인간도 곧 무성생식을 해야 할까?”
“우리는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치료제도 개발하고 예방을 위해 백신도 접종하고 말이야.”
“응. 그렇겠지. 인간은 한 번도 위기에서 져 본 적이 없어. 어떻게 해서든 이어나갈 거야.”
“맞아. 바나나도 원래는 씨가 있었대. 지금 먹는 씨가 없는 게 돌연변이인 거야. 변이 된 버전이 인간에겐 더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지. 씨가 없어진 바나나도 존속시키는 게 인간이야.”
“그래. 이용할 가치가 있는 존재가 없어지게 가만히 두고 보진 않지. 근데 바나나는 씨도 없는데 어떻게 번식을 하는 거야?”
“바나나는 뿌리나 줄기를 이용해 재배하고 있는데, 교배가 아니라 유전적으로 동일한 단일 개체가 반복되어 생겨나는 거래.”
“내 자손이 아니라 내가 다시 태어나는 거네. 아! 나 병원에서 유전자 검사를 해야 한다고 연락을 받았어. 일주일 전에 연락이 왔는데 B에게는 얘기할 틈이 없었어.”
“유전자 검사라니, 다른 설명은 없었어? 이번 일주일 우리 얼굴 보기 힘들었지. 이번 주면 바쁜 일은 모두 정리될 거야. 이후에는 P시의 결정만 기다리면 되니까. 다음 주에 같이 병원에 가자.”
“응. 좋아. 같이 가자.”
여자 1, 2, 3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B에겐 전달하지 않았다. 특히 여자 3의 이야기는 B에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임신을 경험한 여자들이라는 사실은 B에게 괜한 불안감과 과도한 고민거리를 안겨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영일 선배 부부와는 어디서 보는 거야?” 영일 선배가 B에게 부부 모임을 제안했다고 한다.
“아마 선배 집이 될 거 같아. 말했던 대로 이번 금요일 저녁에 괜찮지? 퇴근 시간에 맞춰서 내가 데리러 갈게.”
“응. 괜찮아. 좀 피곤한 금요일이 되겠네.”
“즐거울 거야. 두 분 다 똑똑하고 유쾌하시니까. A가 지금까지 영일 선배를 못 만나 본 게 이상하네. 까다로운 사람이지만 B에겐 친절할 테니 너무 부담 갖지 마.”
“좀 무서운 사람일 거 같아. 와이프는 어떤 분이셔?”
“조향사신데 OO화학에서 일하셔. OO화학이 워라밸이 괜찮다고 하더라. 취미로 요리랑 와인, 커피 여러 가지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어. 영일 선배랑 4살 차이라 우리랑 동갑이야. 나는 회사에서 여러 번 뵀어.”
“응. 요리를 잘하셔서 집으로 초대하시는구나. 기대된다.”
B에게는 기대된다고 했지만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사교적인 이벤트는 원래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영일 부부는 나와 접점이 없는 사람들 같았다. 한편으로 영일을 꼭 만나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내가 상상한 영일은 강압적이고 고집을 꺽지 않는 사람이어서, 그런 리더십 아래에서 B만 고생이라는 편파적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B는 영일과의 잦은 의견 불일치 속에서도 영일의 건축학적 역량을 우러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