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밤 아랫배가 아팠다
영일 부부의 집은 아파트였다. 각 세대별로 테라스가 있는 고급 아파트이기 했지만, 건축 철학이 뚜렷한 영일이 남들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공간에 사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아파트를 싫어하신다고 하지 않았어? 투자 목적으로 사신 건가?” 집으로 들어가기 전 지하 주차장에서 B에게 물었다.
“형수님이 이 아파트를 너무 마음에 들어 하셨대. 선배도 집이 사무실에서 가까우니 지금 생활 패턴에는 맞나 봐. 집마다 구조가 달라서 획일화된 일반 아파트하고는 다르긴 한 거 같아. 근데 투자 목적도 있었을 거야.”
“분양받으셨으면 많이 올랐겠다. 서울 중심지에 테라스 있는 아파트라니. 많이 올랐대?”
“선배랑 돈 얘기는 잘 안 해.”
“주식 얘기는 자주 하잖아. 집 얘기는 안 해?”
“얼마 벌었는지는 서로 얘기 안 하게 되더라. 요새는 집값이야 인터넷으로 다 알 수 있으니까, 알고 싶으면 찾아볼 수는 있지만.”
“돈 얘기 함부로 하면 위험하기는 하지. 그래도 둘은 워낙 친하니까 다 얘기할 줄 알았어.”
“응. 좀 쉬쉬하는 편이야.”
“그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어떤 남자들은 너무 수다스러워. 그나저나 선물은 맘에 들어하실까? 요리를 좋아한다고 하시니 이 그릇 이미 갖고 계신 건 아닐지 걱정이네. 이 그릇 작가가 요새 부쩍 유명해졌거든.” 집들이 선물로 은으로 된 4 PCS짜리 그릇 세트를 준비했다.
“갖고 있어도 어쩔 수 없지. 영수증 있으니까 다른 걸로 바꾸셔도 되니 걱정 마. 올라가자.”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는 건 오랜만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사적인 공간에 간다는 것에 심적 부담감이 느껴졌다. B는 몇 번 온 사람처럼 이 환경에 익숙해 보였다.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기 전 B가 “좋은 분들이야. 잠깐만 어색하지 곧 편해질 거야.”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문을 연 사람은 영일이었다. 그는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체구가 컸다. 사진에서는 호리호리한 인상이 있었는데, 실제로는 강인한 느낌이 들었다.
“반가워요. 약속시간에 딱 맞게 오셨네.” 영일이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말씀 너무 많이 들었어요.” 맞잡은 그의 손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집안에서는 이미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두 분 언제 꼭 집에 초대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성사됐네요.” 높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리고 현관 복도 끝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의 모습이 보였다. 영일의 와이프는 작고 활기차 보이는 인상이었다.
안내를 따라 들어간 식사 공간에는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리코타 치즈가 올라간 샐러드와 흰 살 생선을 이용한 카르파초, 커다란 볼에 담긴 토마토 냉파스타와 먹기 좋은 두께로 슬라이스된 로스트비프가 테이블 가운데에 있었다.
영일은 우리를 경치가 보이는 창가 맞은편 자리에 앉게 했다. 창 밖으로는 서울 도심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금요일 밤의 들뜸이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도로에는 속력을 줄인 차들이 줄지어 가고 있었다. 도로의 소음이 소거된 내부에서 바라본 바깥은 가로등과 자동차, 빌딩의 주광색 조명들로 물결치는 나른함이 느껴졌다.
“가까운 곳에 사는데 식사 한번 대접해 드릴 생각을 못했었네요.” 나의 앞자리에 앉은 영일이 말을 건넸다.
“B에게 얘기만 듣고 꼭 만나 뵙고 싶었어요. B가 많은 영향을 받은 분이라 항상 궁금했거든요. 이렇게 집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영일의 와이프가 밥과 국을 들고 테이블에 자리했다. 그릇은 우리가 준비한 집들이 선물 작가의 작품이었다. 그릇을 본 B가 그녀에게 선물을 건넸다.
“이 작가 제가 너무 좋아해요. 이 플레이트는 안 갖고 있는 사이즈예요. 너무 잘 쓸게요.”
그녀가 손수 준비한 음식은 깔끔하고 간이 잘 맞았고, 식사 후에는 치즈케이크와 과일을 디저트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레 프로젝트 이야기로 넘어갔다. 영일은 프레젠테이션 때 반응이 좋아 자신의 설계안이 채택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는 유려한 화법으로 듣는 사람에게 신뢰감을 주었고,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힘이 있었다.
P시에서 제시한 필수 시설은 연구동 타워 2채와 연구원들을 위한 기숙사 1 채였고 나머지는 참여하는 각 건축사의 자유로 맡겼다. 산 중턱에 위치한 3만 평 규모의 부지에, 영일의 사무소에서는 커뮤니티 센터를 추가로 구상했다. 건물 4개 동은 모두 내부 통로로 연결되었으며, 건물의 입지는 기존 수목의 제거를 최소화하는 위치에 선정됐다. 부지의 식생은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대부분이었다. 훼손되지 않은 숲 속에서 연구원들이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정하는 것이 P시와 영일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지향점이었다.
영일의 자신감 실린 주장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를 설계안대로 성공시킨다면 앞으로 조성되는 친환경 거주지의 표준안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