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위의 사건

어느 밤 아랫배가 아팠다

by 새아

P시에서는 영일의 회사의 설계안을 연구소 조성 목적에 가장 부합한다고 평가하며 최종 선정작으로 결정했다. 내년 상반기 착공, 2년 뒤 완공을 목표로 시공한다고 한다.

결과 발표가 나온 날, 영일의 집에서 축하 파티를 가졌고, B와 영일은 완공 때까지 P시의 프로젝트에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적어도 2년 반 동안은 둘 다 각오를 좀 해야겠다. 지금만큼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할 거잖아.”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내가 침묵을 깨고 입을 뗐다. B는 보기 드물게 술에 취한 상태였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야지. 시간이 될 때마다 같이 밥 먹고 1년에 한 번은 여행도 가자. 그리고 시간은 금방 갈 거야.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어느새 완공되어 있겠지.”


B가 심호흡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술기운에 숨이 가빠오는 모양이었다.

“무섭지는 않아? 대규모 프로젝트는 처음이잖아.”

“물론 걱정은 되지. 워낙 바쁘게 돌아갈 테니 체력적으로 버텨낼 수 있을지도, 시공 중에 일어날 셀 수 없고 자잘한 변수들에 잘 대처할 수 있을 지도 그렇고. 하지만 나 혼자 하는 일도 아니니, 영일 선배뿐만 아니라 관계사들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완성시킬 거니까 그들을 믿기도 해.”

“그래. B가 너무 부담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 B의 그런 마인드셋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 처음부터 지금까지.”

B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나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가까이 다가온 B의 숨에서는 술 냄새가 났다. 빠르게 잠이 든 그를 깨울 수는 없어 술 냄새를 참은 채 집에 도착했다. 고작 샴페인 2잔에 취해버린 B가 귀엽고 안쓰러웠다.


집에 돌아온 그는 힘들게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일찍 회사로 향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 미열이 있었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다. 하지만 점차 컨디션이 안 좋아져 오후에는 반차를 내고 동네 내과에 가서 감기약을 처방받았다.





완공은 목표했던 2년에서 1년 반이 지연되었다. 아무런 인프라가 없던 산 중턱에 대규모 시설을 세우는 일에는 공사 초반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예산도 예상치를 상회해 P시에서 자금 조달을 하느라 공사 중반에 한동안 작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B는 사이트 근처에서 머물며 지내는 날이 많았으나, 중반 이후 현장이 안정되자 서울 시내의 개인 프로젝트를 병행하며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늘려나갔다.

나의 병은 무성화(Sexual monomorphism)라는 병명이 붙여졌고, 나날이 환자가 늘어 사회적으로 문제가 커지고 있었다. 무성화를 앓고 있는 여성들은 면역력이 크게 약화되고 정상 세포가 쉽게 암세포로 변이 되었다. 우리가 암에 걸릴 확률은 평균적으로 15배나 높았다. 이는 유전적 변이 보유자가 암에 걸리는 확률과 비슷한 수치였다.

“A가 진단을 받고 4년이 넘었죠?” 여자 3과는 주말마다 함께 테니스를 치고 점심을 먹었다. 테니스를 시작한 지는 2년이 다 되어가고, 그녀와는 같은 취미를 공유함으로써 부쩍 가까워졌다.

“네, 이제 이 병에도 적응이 된 거 같아요. 이제 아주 희귀한 병도 아니고 잘 관리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생각이에요. 이제야 제 주위 사람들에게도 내 병을 알릴 수 있게 되었고요.”

나는 점심 메뉴로 선택한 익힌 채소와 버섯을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우리의 이야기 주제는 언제나 우리의 병이었다. 운동과 식단, 스트레스 관리, 인간관계 등 모든 대화는 우리의 병에 귀결되어 마무리됐다.

“우리 남편이 무성화를 연구한 지도 4년이 넘었는데 임신 경험이 없는 A와 같은 경우는 극히 드문 케이스예요. 그건 꼭 염두해둬야 돼요. 전 세계에서 몇 케이스 안된다고 들었어요.”


여자 3은 가끔 이 사실을 나에게 상기시켰다. 그때마다 나는 “신기하네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 남편도 어제 들은 소식인데, 남편의 연구소가 P시의 새로운 연구단지로 이전하게 됐대요. A의 남편이 설계한 그곳이요. 세상 돌아가는 게 참 묘하죠?”


그녀는 그녀의 접시를 비운 후 중대 발표를 하듯, 긴 숨을 들이마시더니 나에게 말했다. 나는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막연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무성화를 진단받았고, B는 P시의 연구소를 설계했다. 아무런 연결점이 없던 2가지 일에, 여자 3의 개입으로 상관관계가 생긴 느낌이 들었다.

“신기하네요.” 나는 어렵게 입을 뗐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우리는 사택으로 들어가기로 했어요. 여기 집은 전세로 내놓을 거예요.”

“잘 됐네요. 남편 따라 저도 몇 번 가봤는데 그곳은 너무 아름다워요. 분명 마음에 드실 거예요.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볕이 잘 들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장소거든요.”

“A의 남편이 설계에 참여했다니 더 신뢰가 가네요. P시로 들어가기 전에 부부 동반으로 식사 한번 해요. 내년 3월에 이사할 예정이라 이제 우리가 이렇게 매주 만날 날도 몇 달 안 남았어요. 너무 아쉽네요. 꽤 오래 봤는데 우리. 꽤 잘 맞았고.”


그녀가 나에게 시선을 멈춘 채로 빙긋 웃었다.

“네, 남편에게 얘기해 놓을게요.”


연신 미소 띤 얼굴의 여자 3에게서 왜인지 석연치 않은 일의 예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