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이야기꾼들과 함께 - 뮤지컬 '판' 리뷰글
공연은 현실을 잊게 해주는 하나의 꿈과도 같다. 그래서일까, 대극장의 뮤지컬들은 종종 건물 전체를 극의 콘셉트에 맞춰 화려하게 디자인하여 관객을 입장하는 순간부터 압도하곤 한다. 나 또한 그 웅장한 스케일에 감탄하며 심장이 뛰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뮤지컬 ‘판’은 화려한 하드웨어 대신, 조금 다른 방식으로 관객을 19세기 말 조선이라는 꿈의 세계로 초대했다.
극장 문을 들어서는 순간, 안내원들은 관객을 ‘뻐꾸기’라 부르며 사극 말투를 건넨다. 무대와 객석을 오가는 ‘산받이’는 직접 관객에게 “얼쑤!”, “좋다~!”같은 추임새를 가르친다. 결정적으로,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들이 객석 뒤에서 등장해 자신들의 판을 보러 온 뻐꾸기들에게 직접 말을 걸며 이 공간에 익숙해지라는 듯 소통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과 호흡으로 극장 공기를 19세기 말 조선으로 둔갑해낸 것이다. 덕분에 익숙하지 않은 추임새도 곧잘 할 수 있었고, 콘셉트에 맞는 재치 있는 기획이 보여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여성이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의미가 ‘지식을 생산하고 남기는 것’이라면, 이 작품 속 인물들은 그 행위가 금지된 시대에 ‘이야기’라는 꿈을 꾼다. 뮤지컬 ‘판’은 19세기 말 조선, 이야기가 세상을 어지럽힌다며 금지된 시대에 굴하지 않고 흥겨운 난장을 벌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품은 양반가 자제 ‘달수’가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 전기수 ‘호태’를 만나며 시작된다. 달수는 과거 시험보다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인물로, 낮에는 주막이지만 밤에는 비밀리에 금기 소설이 유통되는 ‘매설방’에 발을 들이며 이야기의 맛에 빠져든다. 극의 절정, 사또의 검열로 매설방의 존재가 드러나고 달수와 호태는 투옥되지만, 달수가 벌이는 판의 “새가 날아든다”와 함께 민중들이 봉기하며 관아는 무너진다. 갈등이 노래 한 곡으로 해소되는 전형적인 뮤지컬 식(어쩌면 ‘꿈같은’) 해결이지만, 그 통쾌함만큼은 확실하다.
이 꿈결 같은 판을 지탱하는 독특한 존재가 바로 ‘산받이’이다. 그는 탈춤이나 판소리, 풍물놀이의 악사처럼 무대 위의 연희자와 객석을 연결한다. 비중이 아주 크지는 않지만, 1인 3역을 소화하며 악기 연주까지 해내니 극에서 중요도가 매우 높다. 산받이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 즉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서서 중재자이자 연출자의 시선을 견지한다. 관객이 궁금해할 법한 질문을 대신 던지기도 하고, 관객에게 말을 걸기도 하며 우리 모두를 이 화려한 꿈의 일부로 들여보낸다.
뮤지컬 ‘판’은 내용상으로도, 무대 구조적으로도 ‘극중극’ 형식을 취한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있고, 무대 속에 또 다른 무대가 있는 이 뮤지컬은 인물들이 다양한 시공간에서 노래를 부른다. 손때가 탄 소설 속 이야기를 노래할 때는 무대 속 무대로 들어가 직접 인물이 되어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이때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배우의 관객화’였다. 한 인물이 “이야기를 들어보시오~”하며 판을 벌일 때, 나머지 인물들은 무대 밖 의자에 앉아 관객이 된다. 그들은 잠시 땀을 닦기도, 숨을 고르기도 하며 무대 안 인물을 경청한다. 무대 위 주인공이 관객이 되고, 다시 주인공으로 돌아가는 순환 구조. 이를 보며 객석에 앉은 나 또한 이 거대한 이야기판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다는 묘한 일체감을 느꼈다. “사는 게 다 소설이지!”라는 마지막 대사는 결국 우리의 인생 또한 한 편의 긴 꿈이자 소설과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로도 다가왔다.
연출적인 부분에서도 이곳이 현실의 법칙에 지배받지 않는 비현실적 공간이라는 감상을 받았다. 배우들은 대나무 봉 하나로 춤을 추다가 순식간에 봉으로 달수와 호태를 가두는 감옥을 만들고, 다시 그 봉에 뻐꾸기를 꽂아 판을 벌인다. 화려한 장치 없이 배우들의 신체만으로 여러 시공간을 창조하는 연극적 약속이 돋보이는 안무였다.
물론 꿈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매끄러운 것은 아니다. 메인 서사는 조선 시대 옛이야기인데, 코믹 요소를 위해 차용된 현대적인 밈(meme)이나 말투가 다소 튈 때가 있다. 무대의 톤이 급격하게 바뀌어 몰입이 깨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 톤 자체가 정통 사극보다는 드라마 '퐁당퐁당 LOVE' 같은 퓨전 사극에 맞춰져 있기에, 이 또한 유쾌한 퓨전극의 묘미로 받아들이면 거슬림 없이 즐길 수 있다.
극의 엔딩, 인물들은 무대 안의 무대로 들어가 천막이 내릴 때까지 손을 흔든다.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사라지는 그들을 볼 때, 나는 지금까지 즐거운 구전 설화 한 편을 온몸으로 읽어내었고, 그들은 나에게 충분한 유희를 선사하였으니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지, 글을 쓰기 위해 그때의 기억을 되짚는 지금도 그저 한바탕 꿈꾼 듯한 착각이 든다.
관아를 무너뜨린 것은 위대한 이야기꾼 호태도, 메인 서사의 주인공 달수도 아닌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서민들이다. 평범한 인생 평범하게 살다 가도 좋지만, 인생은 어차피 한바탕 꿈이고 소설이라면, 기왕이면 신나게 판을 벌이다 떠난 이들처럼 신명 나게 놀아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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