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서귀포에서
저녁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실 일이 몇번 있었고 그때마다 은근히 말을 많이 했다. 한번 보고 말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한번 보고 말 건데 뻔뻔해지면 또 어떤가 싶을 때도 있는 법이다. 한편으로는 속물적으로 보여도 할 수 없지 싶을 어떤 소망들, 어떤 욕심들을 때로는 약간 과장되게 끄집어내기도 한다. 그건 나 뿐만이 아니라 술을 마신 그들 모두가 그랬던 것 같다. 알코올이 증폭시키는 일종의 연극적 과장기는 행동이 아니라 각자의 말에 실렸다.
"난 결국 좋은 글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글을 쓸 수 있을 만큼의 체력을 필요로 하는 올레길을 거뜬히 걷고 있거든요. 그리고 보고 있어요. 그리고 꽤 많이 마시고 있어요... 자의식은 충분히 한심할 만큼 과잉이에요 자존감결핍과 자의식과잉은 결국 같은 거 아닌가요 (하하) 그리고 난 여전히 쓰고 있어요. 감수성이 무뎌지는 것 같단 생각이 들 적마다 불안하긴 하지만은...결과적으론 단순히 생각만 하던 옛날하고 다르게 지금은 구체적인 행위들을 하다보니 감수성의 예민함이 다른 신체부위로 분산되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묵묵히 듣고 마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이런 사람들은 이따금 신경이 쓰인다. 속으로 무슨 생각인가를 하고 있는게 역력해보이니까- 어떤 사람은 꽤 분석적으로 접근한다. 매일의 잘 곳만큼은 정해놓고 다니는 나를 두고 모 게스트하우스의 투숙객이 그랬다.
"자기 말로는 별로 계획이 없다고 하는데, 혼자 여행 다니는 남자치고 숙소를 미리 정해놓고 여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하지만 이토록 '깨알같은' 계획들은 많은데 막상 남들이 말하는 삶에 대한 '큰 틀의' 비전이 없어보인다는 사실이 특이했단다.
"좋은 작품 하나 쓰고싶다는 말은 사실 계획이라고 말하기가 어렵죠.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고 싶다,를 얘기하면 모를까... 그냥 아무 계획이 없는 거죠."
그는 다소 냉정하게 얘기했다.
"자기 행동 계획을 세울 만큼 자신감이 있는 사람도 아닌 것 같으니."
이쯤 되면 화가 날 법도 했지만, 어떤 감정에 집중할 기운조차 없었다. 너무 많이 걸어서 그랬을까...
그는 내가 '긍정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이라고 했다. 겉보기에는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이기는 커녕, 오히려 냉소적으로 느껴지는데, 동시에 근본적으로는 근거없는 기대와 확신으로 가득한 것이, 이는 무언가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있지 않고는 도저히 가지기 어려운 태도라고 했다. 웬만큼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제 눈에 보이는, 그리고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긍정의 근거, 레파토리를 찾아야 비로소 믿음의 여지를 갖는데, 나는 그렇지도 않으면서 그토록 앞날에 대해 구체적인 걱정에 의식이 없다니,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 거냐, 어디에 귀의했느냐고 묻고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자신이 있어요? 음...이렇게 말해도 못 알아들을 거 같은데- 왜냐면 이건 본인이 선택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니까... 그냥 그렇게 사는 거죠."
이토록 찐득한 농반 진반이라니.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모르게 만든다. 호기롭게 떠들면 반드시 한방 먹기 마련이다. 뭐 그럴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다만, 그렇다고 이런 식이라고는. 그는 보편적이지 않은 어떤 유형에 대해 쓸데없이 집요하게 물고늘어져서 너는 특이한 거다, 라는 말을 이토록 유별나게 냉소적으로 강조하고, 또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습관처럼 꺼내던 '꼭 그런 건 아니고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 한 말이 재미있어서.
"순교자는 세상에서 제일 소극적인 사람들일 거예요. 삶에서 유턴을 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는데도 그 기회에 유턴할 완력을 동원하지 않았어요. 그냥 자기 믿음의 물결에 저항없이 쓸려갔고 그러다 죽었어요... 순교자 하나하나가 다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건, 그만큼 그런 사람은 보기가 드물거든요. 좋고 나쁠 것 없이 그런 희귀한 사람은 기억될 수밖에 없어요. 죽은 사람이야 죽은 뒤의 타인들의 기억같은 것엔 관심 없겠지만"
어떤 유형화된 캐릭터에 대한 집착, 혹은 어떤 유형으로서 끝끝내 분류하고 말겠다는 심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사람 또한 이 자리가 일상적이지 않을, 결국 다시는 보지 않을지도 모를 사람들끼리의 자리라서 꺼낼 수 있는 말을 지껄여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저마다 하나의 극적인 캐릭터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실제의 나라면- 결국 먹고사는 게 절실하다고 느껴지면 '순교'까지 하진 않을 것이다- 그놈의 순교가 뭔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확실히 '평범한 삶'이란 굉장한 의지와 기민한 상황판단, 집중력이 없이는 쟁취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은 했다. 그것 또한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일련의 몸부림이겠지만-
나에게는 '믿음'이라기보다는 착각에 가까운 무언가가 느껴져서, 그런데도 이 착각을 뒤집어놓을 다른 대안에 대해 알고 있는 바도 없다보니... 하기사 '순교'라는 게 대안을 끝내 찾지 못한 사람들의 최후니까- 결과적으로 믿음과 착각이 본질적으로 다를 건 없을지도. 그 와중에 여전히- 혹시나 싶은 그 '믿음'의 결과물이란 게 내게 정말 있긴 있을까... 내심 이런 기대는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