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의 카멜리아힐에서
이제 여행은 아프리카나 남미같은 곳이 아닌 이상, 장소보다 무엇을 하기 위해 가기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난 동백을 보고 싶었다. 그것도 수미터를 넘는 높다란 나무에 만발한 형태로 피어오른 동백꽃을. 그리고 두텁고 매끈한 이파리로 무성한 상록수림을 보고 싶었다.
이건 유난히 겨울이면 드는 생각이다. 여기에 내내 부득이하게 실내 혹은 방안에만 있다보니 가을을 놓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렇다고 가을을 복기하고픈 생각은 딱히 없었던 것 같고(그래도 불광천과 서오릉 등지에서 은연중 가을 낙엽을 많이 보기는 했으니까 말이다) 그냥 뭔가 부풀어오른 겨울의 느낌, 막 시작된 겨울의 생기같은 걸 느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돈벌이는 적어졌어도 한가한 팔자를 십분 활용하여 나는 동백꽃이 만개하기 시작한 12월의 제주도를 찾았다.
2018년 처음 방문했던 카멜리아힐. 예전부터 이곳의 존재를 알았음에도 방문하지 않았던 건 일단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너무 좋지 않고(입구를 지나가는 버스가 환승은 기본인데 한두시간에 한대 올까말까 한다. 환승없이 가려고 해도 일이킬로미터는 걸어야 한다) 여기가 중문관광단지같이 돈 쓰기를 목표로 상업화된 정원 형태의 유흥시설(?)이라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사람 많이 몰리는 데는 뻔하다는 선입견도 한 몫 했다. 거의 처음이나 두번째쯤 제주도에 방문하면 성산일출봉, 산굼부리, 정방폭포마냥 단골처럼 등장하는 곳이 카멜리아힐이다. 올레길같이 한산해도 감동을 주는 자연이 제주도에 얼마나 많은데 이런 데를 굳이 찾아가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첫 방문 후 생각이 달라졌고 이번에 다시 방문하면서 또 한번 미묘한 느낌을 받았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맘때쯤이면 여길 방문하고픈 마음이 들 것 같다. 인파로 북적이는 곳임을 빤히 알면서도, 또 초반부의 와글와글 사진 찍는 사람들에 치여 이런 데는 나랑 안 맞는다는 생각을 몇번이고 하게 되더라도, (주말이나 휴일이 아니라면) 그래도 정원 안쪽으로 들어서면 조금씩 한산해져서 동백나무 후박나무 녹나무 등의 상록수 앞에 서서 그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임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안다, 물론 안다. 제주도에는 숨겨진 멋진 장소가 많다는 것을. 여행에 등급을 부여하려는 이에게 카멜리아힐은 '하수'들이 가는 곳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찾으려 애쓰지 않고 대뜸 가도 상관 없을 곳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던가. 부산에선 태종대가 그런 곳이고 제주도에선 카멜리아 힐 같은 데가 그런 데인 셈이다.
이곳은 내 마음 속 겨울 제주의 전형이 담긴 곳이다. 오름의 제주가 있다면 푸른 상록수림으로 가득한 제주도 있는, 한겨울의 제주도 하면 보고 싶은 풍경 중 일부가 있는 곳. 뭔가 고민 없이 부담 없이 생각 없이 거닐고자 한다면 갈 수 있을 것 같은 곳이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되 정원사 개인의 정원에 대한 가치관과 정원이 인간세상에 가지는 의미를 늘 기억하고 구현해내는데 노력한 느낌이 있는 곳. 어떤 기본이 견고하게 닦인 공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굉장히 유명한 곳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또 어떤 면에서 자폐적인 어떤 감각이나 망상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 이곳 어딘가 한 구석에 존재한다는 것이 늘 재미있다. 마치 해리포터 속 킹스크로스역 9와4분의3 승강장을 보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그런데 제주에는, 아니 심지어 서울 한복판에서조차 그런 곳은 어디든 존재하고 어쩌면 이 인파들 중에도, 마치 나처럼 제각각 그런 망상을 가지며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