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세비야에서 그라나다가는 버스 안
좀 웃기는 고백이지만 난 좋고 싫음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사람인줄 알았다. 아니 그보다는 그냥 딱히 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것들 뿐이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게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난 '좋은 꼴을 못 보고 살았다'는 것.
오히려 난 좋고 싫음이 극단적일 정도로 갈리는 사람이었으며, 근데 그 좋아하는 것이 남들에 비해 상당히 협소한 편이라서 나 자신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다. 남들 다 좋다는 거 나는 좋은지 잘 모르겠다. 세비야는 결국 알카사르만 봤고 대성당과 히랄다탑은 주변만 보다 나왔다 일단 입장료가 8유론데 내가 공원에서 멍때리다 돌아왔을 무렵엔 이미 문닫기 1시간밖에 안 남아서 그냥 안 들어가고 나왔다.
그리고 지금은 세비야에서 그라나다 가는 버스안이다. 포르투갈 파루의 사막섬 해변에서 과도한 선탠을 하다가 화상입은 어깻죽지는 여전히 쓰리고 가슴팍은 살갗이 벗겨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내 뒤에 앉은 남자의 입냄새가 여기까지 풍기는데도 지금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인적 없이 텅빈 벌판에 익은 밀밭이, 무수한 해바라기가, 이어서 끝없는 올리브나무의 숲이, 떡갈나무가 월계수나무가 헐벗은 산이 나를 바라본다. 선명한 색. 마음에 담아둬야 할 것이 뭔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 느껴지는 서늘함.
버스가 달린 지 2시간, 말 소리도 잦아들고 모두들 잠이 들었다. 아니면 나처럼 이렇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하여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 외엔 아주 조용하다. 내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복도 건너 옆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한국인 남자가 신경쓰인다 ㅋ
병역을 거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망명했다던 예다씨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글을 읽는 내내 그는 표현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국 사회의 통념과 '정의'에 철저하게 어긋나는 선택을 하면서도 끝끝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용기와 표현의 힘. 사람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 풍경들은 그 낱낱의 존재들이 철저해짐으로써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다. 개는 언제나 자기가 개라는 걸 철저하게 드러낸다. 소도 말도. 여기 안달루시아 벌판도.
나에게 필요한 건 나를 드러나게 하는 선명한 대기- 햇볕과 같은 표현. 나는 원래 나였고 그걸 비추어 드러내면 되는 것. 어떤... 사물에는 정말 이데아라는 게 존재하는 건지도. 세잔이 말하듯 원뿔이듯 기둥이듯 구이든 간에 그 형태로 말미암아, 맑은 날이든 흐린 날이든 눈오는 날이든- 원형을 바탕으로 사물은 언제나 자기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인지도. 이 햇볕은, 마치 그 존재의 원초적인 형태성을 규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지 못하던 것들. 어떤 관습으로, 관성으로 인하여 알지 못하던 것들의 어떤 원형을. 좋아하는 것을 찾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아득했어서 그리고 아득할 것이기에 살아가는 게 때로는 갑갑하다.
2025.12월
글을 쓰는 족족 어딘가에 발표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느끼는 것은, 11년쯤 지난 지금 시점에서 이 표현들은 지금의 내게 다소 감상적으로 다가온다. 어디서부터 고쳐야 하지 하다가 이젠 나는 이런 글을 안 써, 하면서 공개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쓴 글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쓴 글이라고 생각하고 본다면 조금 더 '관대하게' 혹은 그저 다른 사람의 감각과 경험을 경유하여 나온 글이라고 당연해하며 더 잘 읽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