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의 백련사는 해남 대흥사의 말사다. 하지만『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서깊은 절이고, 대웅보전(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대웅전과 대웅보전의 차이는 대웅전 정중앙에 모신 세 명의 상 중 한 분만이 부처이고 나머지가 보살상이라면, 대웅보전은 세 분 모두가 부처님인 경우에 붙이는 명칭이라 했다), 산신각, 조사당 등 사찰로서 기본적인 전각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내가 머무는 동안 스님을 단 두 분만 볼 수 있었다는 점은 특이했다. 지난 번에 묵은 선원의 경우 스님의 수로만 보면 대형 사찰급이었는데 상주하는 비구 스님이 없이 거의 모두가 비구니스님들이었던 것 같고, 비구 스님은 선원의 일을 돕기 위해 파견나온 서너 분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선원장 스님과 공양간의 스님들, 대웅전에서 예불을 올리던 스님과 비구스님들(...)정도만 얼굴을 기억할 뿐 나머지 분들은 얼굴을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는데, 이 절은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닌데도 새벽 예불 때조차 스님이 한 분 밖에 보이지 않아서-그래서 민망한 마음에 새벽 예불을 약간 늦잠을자고 뒤늦게 갔다가 문까지 닫힌 채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에 도로 나왔다- 이 작지 않은 절에 스님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곳은 자체 차밭을 갖고 있는 한국에서는 흔치 않을 사찰이었다. 직접 재배하고 직접 덖아서 만든 차를 내주는 곳이기에 참가자가 차담 요청을 할 법도 했는데 과연 같이 묵은 분이 공양을 마치고는 자신이 종무실에 차담을 신청했으니 같이 가자 하여 가게 되었다. 템플스테이에서 차담이 없이 숙소에서만 머무르고 공양만 하다 가면 진짜 뭔가 커다란 무언가 하나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한다. 정말 다 필요없고 아주 조용한 곳, 외딴 곳에서의 하룻밤을 원한다는 식의 뚜렷한 바람이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사실 차담은 원래 휴식형에서는 실시하지 않는 거라고 하는데 운 좋게 차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스님과 함께 차담을 진행하는 도중에도 저녁 예불을 알리는 타종 소리와 이어서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다른 스님이 계신 걸 알 수 있었으나 차담을 맡은-주지스님인가 싶었다-스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있게 진행했다.
스님은 자연스럽고 인이 박인 듯이 다기를 다루며 우리로 하여금 차를 7차례나 마시게 했다. 그리 크지 않을 한 잔에 두 모금 정도 마시니 열네 모금을 마셨다고 할 수 있을지도. 그럼 적어도 우리가 흔히 마시는 머그잔 한 잔 정도의 녹차를 마셨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은 최신식(?) 온도 조절이 되는 인덕션인지 비슷한 것에 유리포트에 끓였고 두어개의 유리 주전자에 차례차례 물을 담아 마지막에 일정하게 식은 물을 찻잎을 담은 손잡이 없는 다관에 담아 일정하게 우렸다. 우리는 시간은 재차 우려낼수록 짧아졌고, 숙우에 담기는 물의 양이 처음엔 아예 없다가, 조금씩 남기는 식으로 조금씩 많아졌다. 물 식히는 시간, 우리는 시간, 쓰이는 물의 양 모두가 핸드드립 커피마실 때와는 비교될 정도로 감각적이었다. 다 마신 다기들을 뜨거운물에 씻어낸 뒤 이야기를 하며 면포로 닦는 모습은 미사 성찬식의 마지막에 포도주를 담았던 잔을 닦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내 기억으로는 같은 찻잎으로 거의 7번은 우려서 마신 것 같은데, 보통 차를 세번 우려마신다고 하지만 기계로 덖은 경우에나 그렇고 손으로 제대로 덖은 차는 7번에서 8번까지 우려마실 수 있단다.
템플스테이를 많이 한 건 아니지만 템플스테이가 아니더라도 차담의 기회는 몇번 있었던 기억이 난다. 스님들 혹은 차담을 주선하는 사람들마다 스타일이 달라 차담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 듯 하다. 어떤 분은 내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 말을 듣는 식이고 어떤 스님은 상담을 하는 식이고 오늘 스님은 차와 백련사와 관련된 다양한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놓는 분이었다. 어디서 오셨냐 무슨 일 하시냐 같은 질문을 별로 받고 싶지 않았는데- 적당히 거리가 있는 사람들끼리 근황 대화를 하면 해봄직한 전형적인 대답을 미리 생각해보긴 했다만, 아무튼 그럴 말 지어낼 일 없이 편하게 얘기만 듣다 올 수 있었다.
스님으로부터 한국사람들은 보고 들은 게 많다보니 눈이 너무 높아서 생각이 많고 어떤 상황이 되든 옳고그름부터 따지는 것이 거의 본능적이라 늘 피곤해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여타의 행위를 내려놓은 채 때때로 그저, 홀로 차를 내려마시는 일이 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 담백한 글에 대해 생각했다. 여기서도 나는 은연중 '높은 경지'부터 생각했던 것 같다. 나에게 얼마나 높은 경지의 담백한 글을 선사할 것인가 이 담백한 글에 얼마나 내공이 숨어있는가... 이런 식의 생각들.
하지만 경지를 가늠하지 않고 그냥 담백한 글이다. 담백한 일이다라고만 생각하면 안 되는가? 어떤 깨달음을 꼭 줘야 하고 어떤 기준의 완성도를 꼭 갖추어야 하는가? 아예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며 이런 것들은 분명 즐거움을 준다. 다만 어떤 일들은 그저 익숙한 데서 오는 즐거움이 있다. 익숙함은 지향하는 바가 늘 배어있는 것 같은데, 그게 조금 더 드러나기를 기대하며 반복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작품에 해당되어서도 안 될 것 같다.
난 문득 일련의 작업과 행위를 대하고 접할 때 이런 접근자세를 가지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즉, 완성도조차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 어떤 완성도의 기준은 시류적인 것, 시대를 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걸 떠다먹여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 스스로가 씹어내는 행위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면, 완성도가 아니라 그 글이 가진 그 사람의 마음에 더 집중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은 그 사람이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만으로도 모든 것을 관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강렬'하지조차 않아도, 어떤 건 강렬하지 않지만 꾸준하고 끊이지 않는 은은함에서 전달력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