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미화하지 않는 그윽한 시선

by 흘흘

요즘의 내가 주관에 집중하고 있어서 호들갑일지도 모르겠다만, 좋은 작품을 보면 뭐랄까 질투조차 넘어선다. 그냥 박수를 치고 싶다. 좋은 걸 봤어요. 고마워요. 상반기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며 내내 허무하다가도 좋은 영화들, 전시들을 접하고 난 뒤 그냥 길 잃은 말들이 늘어난 것은 나쁘지 않은 거 같다. 그 말들을 잘 몰아서 좋은 방향으로 쓸 수 있다면!

세 인도 여자들의 뭄바이라는 대도시에서의 (타향살이) 삶이라는 소재 자체에다가 영화 속에서 그다지 두드러지는 사건 또한 없음에도 이 영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건 순전히 연출의 힘이라고 봐야겠다. 시작부터 끝까지 감각적으로 충만해서 황홀하다. 그런데 그 감각의 재료들이 그렇게 대단한 비경이나 '좋은' 것들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일상으로부터 주어진 것들을 극대화한 느낌이라서 더 좋았다고 해야겠다. 뭄바이는 결코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고 영화상으로도 아름답게 보이는 구석은 없으며 쉽사리 구질구질해질 수 있는 것들인데 왜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한밤중에 쏟아지는 더운 빗물과 적셔지는 옷들, 피로에 지친 눈두덩, 축축한 공기와 바닥, 노상에 펼쳐진 음식들, 오른손만으로 능숙하게 찢어지는 난과 로티들, 도시의 빛과 소음들, 사람들의 '보는 눈'이 소홀해지는 틈바구니에서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애무하고 키스하는 힌두교도 여성과 무슬림 남성, 늦은 밤중 전철 바퀴가 궤도간 이음매를 넘어가며 내는 소리들, 프라이팬에 튀겨지는 마살라 생선 튀김, 새 소리로 가득한 숲 속의 수풀 헤치는 소리, 여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노란 빛깔 독주(酒)병, 시멘트 칠이 되지 않은 황토의 집 바닥, 알록달록한 싸구려 색전구로 장식된 해변의 꿈결같은 찻집 등등 영화 속의 여자들은 현실의 필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해 보이는 혼잡한 도시에서 근근히 살아가며 일터는 물론 집에서조차 밤낮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일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감각들이 그 상황들을 미화하지는 않는다. 이 감각은 영화 자체의 그윽한 시선과 함께 오롯이 이 현장에 있는 이들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만든다.

사실 감각의 나열만으로는 이것이 완성될 수 없지 않을까? 아무래도 영화에 나온 메인 캐릭터들이 한결같이 선한 것도 한 몫을 하는 것 같긴 하다. 아누 정도가 좀 대책이 없는 짓을 하긴 하지만 아주 밉지는 않다. 데이트를 하느라 지출이 많아 늘 돈이 궁한 상황이라고 나와서 주인공이 받은 독일제 고급 전기밥솥에 눈독을 들이고 몰래 파는 에피소드라도 나오는 거 아닌가 염려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여기에 아누의 반반한 무슬림 남자친구 역은 나중에 뭔가 무책임한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지만 끝까지 선량하고 순애보적인 캐릭터를 지켰다. 그런데 사실 나왔다고 하더라도 뭔가 연출로 무리하지 않게 잘 넘어갔을 것 같긴 하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일관되게 하고자 캐릭터의 다층적인 면을 꼭 선악구도측면에 두지 않아도 된다는 걸 느낄 수 있고, 그들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이 결코 만만찮고 험난해서 사람까지 악하면 영화 감상 자체가 고단해질 위험성은 있었을 것 같다. 지금도 통하는 말인진 모르겠다만 군대도 후방보다는 긴장의 연속인 전방부대에서 가혹행위가 덜하다고 하지 않던가 ㅋ

인도에서 싱글-그게 미혼이든 남편과 떨어져 사는 상황이든-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이라는 건 흔히 폭력적으로 인식될 수 있을 거 같은데, 분명 이 영화에서도 여자의 동의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요되는 혼담, 병원 식당 노동자가 22년간이나 산 집에서 아무런 보상 없이 쫓겨나는 등 암담한 상황이 고스란히 그려진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집을 철거하고 세울 고층 건물 광고판에 돌을 던져 파손시키는 일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그 또한, 즉 그 상황이 그저 암울하고 취약한 것으로만 점철되었다고 믿는 것도 어떻게 보면 외부의 시선일 수도 있겠다는 걸 느끼게 한다.

미화와, 정반대로 불필요하게 '비판적인'(좋게 말해 비판적인 것이지 이 시선은 가끔 목적달성을 위한 포르노라고 느껴질 때도 있다)시선 모두 상당한 편향이 느껴지는데, 영화는 보여줄 것을 보여주되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의 삶을 온 힘을 다해 집중하여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이상한 아름다움(이 말도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일종의 연대감을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까지 뻗치는 마력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을 만들어내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를 문학 평론가 전승민의 기준으로 보면 '나'의 '가상'에 '너'의 '실제'를 심으려는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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