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 눈 앞에 띈 두 마리의 고양이는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로 보아 같이 다니는 사이 같아 보이지는 않았어. 그 중 하나는 사람을 향해 야옹거리며 다가왔지. 사람을 향해 다가가는 고양이는 매우 용감하다고 생각해. 종을 뛰어넘을 만큼 과감한 시도를 할 줄 아는 그 고양이는 엄청난 인사이더인 거야. 유튜브를 찍었다면 최소 10만 구독자 이상을 끌어모을 수 있는 뻔뻔함과 붙임성이 있는 수준인 거야. 난 이런 고양이가 귀엽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고양이의 성격과 담력을 가진 사람을 내가 얼마나 버거워할지도 생각해.
그 순간 난 가장 멀리 떨어진 채 덤불 속에서 그저 구경만 하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고양이를 보고 있었어-그 고양이가 지어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먹을 것을 얻은 고양이의 과감함이 부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불편해지는 듯한 표정에 감정이입될 수 밖에 없었지. 그치만 동시에 나 또한 사람에게 다가오던 고양이가 좋았어. 덤불 속의 고양이에게는 마찬가지의 경계심과 불편함을 느끼고 말았어.
비슷해서 친근감을 느낄까? 오히려 아닐지도 몰라. 비슷한 줄 알고 다가갔다 마음이 가라앉고 만 것은 역시나 비슷해서 그런 걸까 알고보니 아니라서 그런 걸까. 하지만 아무 말 않을 게. 아는 척 않을 게. 혹시 내가 거기에 안 끼는 것처럼 굴었니? 어쩌면 정말 나는 거기에 안 끼는 건지도... 하지만 나는 퀴어라고 해. 남자는 좋아해. 그런데 배울 게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여전히 모르는 건 왜 이렇게 많고? 난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야?
근데 굳이 말 안 하고 싶다. 적당히 묻혀 가기로 했고 적당히 이 몸에 맞춰 살기로 했으니. 나 그거 알거 같은데 하는 표정도 싫고 안락한 표정도 짓기 싫어. 애초부터 그런 표정을 하라고 태어난 사람도 아닌 거 같아. 그래 나는 나라는 또 하나의 스펙트럼일 뿐이라는 사실만을 확인해. 그렇다고 불행하다는 건 아니야.
사람들이 적당히 알고 있을 때 나오는 표정들이 왜 있잖아. 좀 느슨하고, 여유있는 그런 모습. 해외여행을 가면 미국인들은, 특히 코카시안들은 어디서든 늘 그런 모습이었지. 그 어딜 가도 자기가 쓰던 말로 얘기하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기대할 수 있었던 그들. 편안하고 어디서든 늘 하던대로 하는 것 같은 태도가 부러웠어. 하지만 한국에서 한국혈통인 내가 한국어로 얘기해도 딱히- 그런 여유는 나오진 않더라. 많은 사람들은 하던대로 하고 살던대로 살면서 성숙해지고 성장하고 철들고 깊이를 획득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 같아.
물론 그 누구를 막론하고 '순탄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어. 다만 어려움에 처할 때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레퍼런스라고 해야 할까- 귀감이라고 해야 할까- 참고할 만한 대상을 찾는 게 좀더 수월해지는 경우는 있는 거 같아. 덕분에 그들은 그 상황들을 '역경'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역경이란 곧 돌파구와 이어지는 말임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지. 다만 노력하면 가능한 것과 노력해도 주어진 시간이 충분치 않은 것의 차이는 분명히 있는데-후자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역경이 아니라 '미궁'이라고 이해될 수도 있어. 사는 게 내내 미궁인 사람. 그 차이는 모르는 사람은 모르고 심지어 노력해도 못 찾은 사람은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자책하는데 나머지 시간을 보낼지도 모르겠어.
그날의 나는 사람에게 친근한 울음소리로 다가가는 고양이 이상으로, 그 모든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던 고양이의 표정만 내내 떠올렸지. 불편하고 안쓰러웠지만 꼭 그런 감정만은 아니야. 자기 앞에 놓인 미궁의 구조를 순식간에 조망하는 것만 같았던 그 눈빛, 그러나 나는 이것을 '극복'하지 않을 겁니다. 라고 말하듯 수풀 속으로 들어가던 고양이. 그게 그 고양이의 앞으로의 삶에 득이 될지 해가 될지의 판단은 우리의 자유. 그러나 고양이는 상관 없을 거야.
살아가면서 내가 느낀 것은 언젠가 나도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지가 아니었어 난 그냥 안 여유롭고 안 편안해보이는 내 자신을 그냥- 좋아해야겠다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아직도 좋아지진 않아. 하지만 하던 대로 하던 나를 쓰던 말을 쓰던 나를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건 중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