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상처

-이별을 통해 들여다보는 나

by 여름


이유리 소설집인 "비눗방울 퐁"이라는 책은 연작 소설로 저마다의 이별을 담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맞이할 때 남겨진 사람들은 이 감정을 어떻게 체화시켜야 할까

사실 이별을 그냥 아픈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저마다 느끼는 슬픔과 농도가 제각각이다.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한 주인공은 담금주 키트를 이용해서 자신의 슬픔을 녹인다.

큰 담금주 병에 자신이 알몸으로 들어가서 남편과의 기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슬픔을 녹아들고 숙성된다고 한다.

슬픔이라는 모호한 감정이 액체에 녹아 희석된다는 내용이 나에게는 위안이 된다. 이런 담금주 키트가 있다면 언제든 슬픔도 다룰 수 있는 물성을 지닌 것 같아서


자신이 술 안에 열매가 되어 숙성된다는 것이 심지어 슬픔이라는 감정을 녹여서 저마다의 맛을 지닌 술로 빚어진다는 점이 언제든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방편인 것 같아서 못내 부러웠다.

비현실적인 내용에 개연성과 구체성을 담아 현실보다 현실의 것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오랜만에 소설의 진가를 경험한 것 같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외도한 남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선 '배신'은 당연하고 '막연한 공포심'도 마음 한편에 분명 있었다. 뭐랄까 말하자면 세상 전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해야 할까 세상 사람들 다 서로 속이고 뒤통수치고 자기 살자고 상대방을 짓밟는 그런 인간들일지라도 지찬규만큼은 내가 사랑한 지찬규만큼은 그러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으니깐 지찬규도 그러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이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아니 사실은 바깥에서 마주치는 모든 이들이 겉으로는 사랑하고 아끼는 척하면서 뒤로는 칼을 갈고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무섭고 끔찍해서 밖에 나가기가 싫었다."


누구나 배신 때문에 힘들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불신, 분노 그리고 슬픔을 저마다 정도만 다르게 뜨겁고 차갑게 느껴봤을 것이다. 실시간으로 분노가 일렁이지만 금세 또 차게 굳어버리는 마음

이 글을 읽는데 나도 묻어뒀던 과거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괴롭고 슬펐다.


더 공감 가는 것은 나를 배신한 사람은 나에게 가장 나쁜 사람일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많은 것을 공유하고 사랑했기에 오히려 작은 상처만으로도 더 아프게 만들 수 있었다.

사랑해야만 상처 줄 수 있다.


"이미 포장을 뜯은 물건을 환불해야 할 때 주문한 음식에 머리카락이 나왔을 때, 영화표를 잘못 샀을 때도 그랬다. 체면을 구길 것 같을 때엔 항상 한 걸음 떨어져 모른 척 딴청을 피웠다. 중요할 때는 쏙 빠져서 뒷짐을 진 채 일이 알아서 해결되기를 누군가 대신 나서서 뒤치다꺼리를 하기만을 기다리는 타입.


하지만 또 하나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 순간들에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는 것이었다. 인정하기엔 자존심도 상하지만 실제로 그랬다.


웃고 또 웃어서 배가 아팠던 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하고 안락해서 잠이 솔솔 오던 일, 깊은 밤 오래 나누었던 진지한 이야기들은 어떻고, 그 모든 순간들이 오롯하고 소중했다. 어떤 악의로도 훼손되지 못할 기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들을 떠올렸을 때 이제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은 지찬규가 아닌 나의 얼굴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았던 나를 이제와 되새기는 것처럼 나는 아주 편안하고 즐거워 보인다. 심지어 조금 예쁜 것 같기도 하다 눈코입이 예뻐서가 아니라 행복해 보여서 예쁜 뭐 그런 거"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도 금세 속상하고 슬플 수 있다는 것

배신감마저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모순적이다.

사랑하면 이해심이라는 그릇이 커져야 할 것 같은데 도리어 언제든 나를 가장 해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누군가와 이별하면 처음엔 상대와 나의 잘잘못을 저울질하며 상대의 단점만 꼬집어내기 바쁜데

어느새 상처가 아물면 그 경험에서의 내 모습을 들여다보게 된다.

만약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지,

지금의 나를 과거와 비교해 본다.


"술 속으로 파고들어 가듯 몸을 웅크리며, 나는 창문 족을 넘겨보았다. 해가 지려는지 거실이 서서히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오래전 어느 날 아마도 이 시간쯤 둘이서 저 창문 너머로 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본 오후가 있었다.

새빨간 알사탕 같은 태양이 나타났다 숨었다 하는 것을 보며 고층으로 이사 온 보람이 있다 뭐 그런 얘기를 주고받았었다. 노을이란 것이 원래 아름답지만 정말 그날의 노을은 달리 고왔다. 떠올리자니 너무 아름다워서 속이 상하고 코가 찡할 만큼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었더라"


나를 너무 힘들게 했던 사람이지만 유독 예쁜 노을을 같이 바라보며 행복해하던 시절도 공유하는 사이였기에 외도라는 배신이 더 견딜 수 없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큰 상처도 줄 수 있다는 모순을 생각하면 못내 슬퍼진다.



작가의 이전글일상을 겹으로 만드는 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