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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연 Aug 12. 2021

2021년 상반기, 양대 옥션에 출품된 그림들 (3)

3) 현대 전반기 화가들의 작품


근대 화가들의 출품작에 이어 살펴볼 것은 20년대에 태어나 해방 이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현대 1세대에 해당하는 화가들의 작품들이다. 이들은 해방 이전과 이후에 걸쳐 활동한 앞 세대 작가들에 비하면 한결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작가로서의 활동을 펼칠 수 있었고, 그에 힘입어 앞선 세대에 못지않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특히 해방 이후 주류로 올라선 추상화에서의 성과는 괄목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편 해방 이후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기존에 강고히 나뉘어져 있었던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분이 점차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동양화와 서양화로 나누지 않고 작가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세대 화가들의 경매 출품작 중에서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은 아무래도 1929년생 동갑내기로 작년 말과 올해 초에 잇따라 작고한 서세옥과 김창열의 작품들이라고 생각된다. 이 두 작가의 작품은 이미 많은 사랑을 받아 왔고 경매 현장에서도 수다하게 작품이 선보여진 바 있지만, 죽음으로 이들의 작품활동이 멈춰지게 됨에 따라, 이제 그들의 작품을 바라보는 데에 있어 올해가 어떤 분기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서세옥의 <춤추는 사람들>, <춤추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먼저 서세옥의 작품은 53점이 출품되었다. 몇 점의 50~70년대 소작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그의 생애 후반기에 그려진 그림들인 것으로 보인다. (출품작의 설명을 보면 제작연도가 미상으로 되어 있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이는 작가가 각각의 작품마다 연도나 일련번호 표시를 별로 철저하지 않게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의 일종의 시그니처로 알려져 있는 추상적인 군상 소재의 그림들이 주를 이룸과 함께 구상 소재의 작품들 또한 소품에 가까운 채색화를 위주로 하여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다.


군상 소재의 작품들로는 <모자>(연도미상), <사람들>(연도미상), <춤추는 사람들>(연도미상), <사람들>(1996), <춤추는 사람들>(1990년대), <사람들>(2000), <춤추는 사람들>(2002), <사람들>(2003) 등이 있는데 간결하고도 활기찬 그의 스타일이 전형적으로 담겨져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서세옥의 <산가추흥도>, <수선화와 감>, <조어도>


경매에 출품된 서세옥의 작품 중에서 개인적으로 보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적지 않은 구상 소재의 작품들이었다. 아마 그는 군상 작품들을 그리는 사이사이에 이러한 소품적 성격의 작품들을 남겼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건강한 가치관이 소박하나 분명하게 담겨 있다.


여러 차례 그려진 <조어도>를 비롯해 <문방사우/서창청공>, <수선화와 괴석>, <수선화와 감> 등의 작품들이 전통적 소재의 현대적 재해석을 선보이고 있는 한편으로, <소년과 복숭아>, <산가추흥도>, <소년과 참외>와 같은 작품에서는 비교적 개성적인 소재 취득이 엿보인다. 시원하면서도 별로 과함이 없는 필체와 강한 색채 사용이 생기를 북돋워주는데 일부 작품에서는 어딘가 에로티시즘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서세옥은 작가 활동 전반에 걸쳐 이런 소품들 또한 꾸준히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방외로 지나치기 쉬운 이런 소품들에 대한 주목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창열의 <회귀 SH93039>, <물방울 SH93049>, <물방울 SA03040-03>


김창열의 작품은 94점이 출품되었다. 상반기 경매에 출품된 작가 중에서는 가장 많은 양이 발표되었는데 작가의 작고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70년대 이후 물방울 소재의 그림에 천착해 자기만의 세계를 일구었다. 출품작 역시 <회귀>(1968)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가 물방울 그림이며 2010년대 중후반에 그려진 말년의 소작 역시 대여섯 점이 출품되었다. (출품작 중에는 나뭇잎 하나 위에 물방울을 그린 경우도 몇 점 있었는데 별로 주의 깊게 살펴보지는 않았다.)


서세옥의 군상이나 김창열의 물방울이나 같은 소재의 반복이기 때문에 재미를 못 느끼는 감상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작품들일수록 작품 간의 미묘한 변주를 읽는 것이 감상하는 재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며 또 그런 재미를 전달하는 작가야말로 좋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서세옥과 김창열이 널리 사랑받는 것은 그들이 그것을 보여준 작가이기 때문이다. 출품작들 역시 통일된 듯하면서도 개별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물방울 그림의 점진적인 변모 양상을 엿보게 한다. <물방울>(1973), <물방울>(1974), <물방울>(1976), <물방울>(1977), <물방울 LSH70>(1979) 등 70년대의 작품들은 극히 사실적이면서도 건조한 분위기를 띠는 초기의 표현 스타일이 담겨져 있다. 80년대 후반부터는 보다 다양한 차용이 시도되는데 천자문을 함께 등장시킨다거나 여러 강렬한 색채를 배경에 입히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김창열의 작품에는 거의 예외 없이 '물방울' 또는 '회귀'라는 제목이 달려 있는데, 대체로 물방울이 천자문과 함께 등장하는 것이 '회귀'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물방울'인 것으로 보인다. 강렬한 색채의 배경 역시 천자문이 쓰이는 '회귀'에서만 사용되고 '물방울'에서는 쓰이지 않고 있다. 90년대 이후의 작품 중에서 가령 <회귀 SH93034>(1993), <회귀 SH93039>(1993), <물방울 SH93049>(1993), <물방울 SA03040-03>(2003), <물방울 SH100028>(2010) 등이 담백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면, <회귀 PK95015>(1994), <회귀 SH95030>(1995), <회귀 PBL08001>(1995), <회귀 PA97021>(1997), <회귀 PA02007>(2002), <회귀 SH04037>(2003), <회귀 SA050018>(2005), <회귀 SA05025>(2005), <회귀 SH06003>(2006), <회귀 SH100022>(2010) 등은 배경색을 이용함으로써 보다 신비감을 유발한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담백한 전자의 작품들에 더 마음이 가는 편이다.


김창열의 <1 à 10 Gouttes>, 위는 올해 출품된 1번, 아래는 같은 시기에 제작된 6번과 10번


김창열의 출품작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1 à 10 Gouttes - N°1>(1977)이라는 작품이었다. '한 개에서 열 개까지의 물방울'이라고 직역될 만한 제목을 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첫 번째 작품이라고 나와 있는 것이다. 김창열에게서 이러한 연작 형태의 작품이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보다가 과거의 다른 경매에서 같은 해에 같은 크기로 제작된 이 연작의 6번과 10번 작품이 출품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머지 일곱 작품의 모습은 찾지 못했는데 그것들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아무튼 이 연작은 김창열이 물방을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깊이 고려되었을 조건의 하나인 구성상의 배치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매우 직접적으로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작지 않은 의미를 지니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언급한 서세옥과 김창열의 경우 근래에 작고했기에 다른 작가들에 앞서 우선적으로 주목되기 때문에 먼저 살펴본 것이었고, 여기서부터는 다시 동양화 계열과 서양화 계열의 순서로 작가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박래현의 <부엉이>, <작품>, 천경자의 <열대화>, <꽃무리>


먼저 동양화 계열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으로는 해방 직전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던 박래현과 천경자의 작품들을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기존의 동양화의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난 참신한 시도를 보여준 대표적인 작가들로 꼽힌다.


먼저 박래현의 작품은 3점이 출품되었다. 비교적 적은 양이지만 세 점의 작품이 그의 작품세계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각 그의 전통, 절충, 변혁의 면모가 반영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져 흥미를 준다. 서예가 김충현과 각각 네 폭씩을 맞춰 그린 <합작도>(1966)는 그의 일반적인 화조화풍을 보여주고 있지만, 또 다른 작품인 <부엉이>(연도미상)의 경우 50년대 이래 시도되었던 특유의 새로운 화풍이 담겨져 있고, 천과 스테인리스 오브제를 접목한 <작품>(1971)에서는 동양화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장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세 점만으로도 그의 작품세계의 폭넓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천경자의 작품은 11점이 출품되었다. 그 역시 다양한 경향의 작품을 선보인 작가의 한 사람인데 대체로 사람들에게는 유화 같은 느낌을 주는 선명하고 영롱한 눈을 가진 인물화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 같다. 출품작 중에서는 <미모사 향기>(1977)와 <여인>(1986)의 두 점이 이러한 인물화에 속하며, 그 밖에 <사하라 유목민>(1974)이나 <웨스턴서모아 아피아시 호텔(자화상)>(연도미상)과 같이 외국 여행 중에 그려진 수채화 소품들도 그의 작품세계의 일면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그의 출품작 중에서 주목되었던 것은 <열대화>(1970)와 <꽃무리>(1973)였는데, 이 작품들은 선명한 인물화로 넘어가기 이전의 어딘가 흐릿하고 하늘하늘한 분위기의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 천경자의 작품 중에는 <개구리>나 <금붕어>와 같이 작은 크기의 동물들이 무리지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들도 몇 점 출품된 것이 눈길을 끈다. 이 작품들은 그의 특유의 화풍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수묵채색화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경매 현장이나 도록에 수록된 천경자의 작품에서 이런 작품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앞서 언급한 경향의 작품들을 그리는 한편으로 이런 동물군 소재의 수묵채색화도 여기로서 즐겨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박노수의 <고사인물도>, 나상목의 <산수도>, 권영우의 <무제>


그 밖에 이 세대의 동양화가들로는 박노수, 권영우, 나상목 등의 작품이 주목된다. 이 중에서 나상목이 전통적인 산수화풍을 충실히 계승했다면, 박노수는 절충적인 화풍으로의 변화를 시도하였고, 권영우는 추상화 쪽으로 장르를 옮겨 가게 되었다. 같은 세대의 화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는 이 세대 동양화가들의 다양성을 잘 보여준다.


박노수의 작품은 11점이 출품되었다. 출품작 중에는 8폭으로 이루어진 <가상(嘉祥)>(1973)과 같은 화조화도 있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산수인물화 계열의 작품들이다. <활여(豁如)>(연도미상), <산수도>(1974), <무제>(1976), <고사인물도>(1978) 등은 그의 화풍의 특징인 백색의 배경과 과감한 색채 사용의 대비가 돋보인다.


권영우의 작품은 3점이 출품되었다. 그는 동양화가 출신으로서 완전 추상에 천착해 간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 꼽힌다. 2m가 넘는 크기의 <무제>(1987)를 비롯해 <무제>(1985)와 같은 작품에는 그의 추상화풍이 전형적으로 담겨 있다.


나상목의 작품은 3점이 출품되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해방 이후에 등장한 동양화가들 중에서도 가장 예외적인 인물로 여겨지곤 하는데, 전문적 교육을 받았던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 사이에서 거의 유일하게 독학에 가깝게 회화를 배워서 대성한 사례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는 가령 박수근과 비슷한 학습 과정을 거친 경우에 속한다. 별로 많이 알려진 작가는 아니지만, 섬세하고 깔끔한 맛이 돋보이는 그의 산수화는 보다 주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출품작 중에서 <산수도>(연도미상)와 <산수도>(연도미상)는 그의 화풍의 매력이 잘 나타난다.


그 밖에 이 세대의 동양화가들로서 안동숙, 장운상, 김옥진, 김명제 등의 작품이 출품되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였다.


왼쪽부터 김영주의 <신화에서>, <신화에서>, <인간 이야기>


다음으로 서양화가들의 작품은 추상 계열과 구상 계열의 두 부류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추상 계열 작가들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김영주와 류경채의 작품들이었다.


김영주는 개인적으로 매우 저평가된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평소에 작품을 접하게 될 기회가 매우 적었다. 작년이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였는데 관련 전시나 행사를 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매우 아쉽게 생각하고 있던 차였는데 올해 상반기 동안 경매에 그의 작품이 스케치풍의 소품 몇 점을 포함해 17점이나 출품되어 뜻밖의 수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작품에는 제목에 '신화' 또는 '인간'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출품작들 역시 같은 경향을 보이고 있다. 큰 규모의 작품으로는 같은 해에 제작된 두 점의 <신화에서>(1983)가 주목되며, 이 밖에도 <인간 이야기>(1972), <무제>(1979), <신화에서-해와 별과>(1983), <신화시대>(1988) 등의 작품들이 그의 화풍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래피티를 연상시키는 시원시원한 필체와 색감의 소유자이지만, 신화와 같은 무게 있는 내용을 표현의 주제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속된 분위기로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위는 올해 출품된 류경채의 <염원 92-10>, 아래는 같은 시기에 제작된 작품인 <염원 92-5>와 <염원 92-7>


류경채의 작품은 4점이 출품되었다. 그는 구상 계열의 작품으로부터 출발해 60년대를 거치면서 추상으로 작품 경향을 전환해 '날', '축전', '염원' 등의 연작을 통해 꾸준한 자기 변모를 보여준 작가인데, 공교롭게도 네 작품이 각 시기별로 나타난 그의 화풍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계절>(1964), <단오>(1973), <날 83-2>(1983)가 모두 그렇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염원 92-10>(1992)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류경채의 여러 시도 가운데서도 '염원' 연작에서 나타나는 극도의 절제를 보여주는 구성의 아름다움을 가장 좋아하는데, 새로 알게 된 이 작품의 경우 해당 연작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염원' 연작은 대체로 원과 마름모 형태의 미묘한 변주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가령 1992년에 제작된 작품의 경우 <염원 92-5>처럼 큰 크기의 그림도 있고 <염원 92-7>처럼 작은 크기의 그림도 있지만 대체로 한 개의 원과 한 개의 마름모가 중앙에 배치된 비슷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올해 출품된 <염원 92-10>의 경우 원이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로 되어 있어 다른 형태를 이루고 있어 흥미롭게 여겨진다. 제목으로 보아 이 연작에 해당되는 1992년의 작품은 10점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 앞서 본 김창열의 연작처럼 류경채의 이 연작 역시 같은 시기에 제작된 다른 작품들의 모습은 또 어떨지 궁금해진다.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정창섭의 <묵고 No.95603>, <묵고 No.95703>, 윤형근의 <청다색>, <무제>


이 밖에 추상 계열의 작가로서 이세득, 문학진, 정창섭, 윤형근, 하인두 등의 작품들이 주목된다. 이 중에서 정창섭과 윤형근의 경우 방식은 다르지만 극히 정제되고 견고한 세계를 추구해 나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어 먼저 묶어서 소개하기 좋을 것 같다.


정창섭의 작품은 7점이 출품되었다. <귀일 82G>(1982)를 비롯해 <묵고 No.95603>(1995), <묵고 No.95703>(1995), <묵고 No.91105>(1991) 등은 그의 종이 작업의 결과물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황색조나 검은색, 흰색이 주가 되고 있긴 하지만 일부 작품에서는 빨강이나 파랑을 써서 다소 자극적인 색감을 연출하기도 한다.


윤형근의 작품은 14점이 출품되었다. 검은색을 쓰기 이전 빨강과 파랑을 교차해서 쓴 초기작인 <무제>(1972)를 제외하면 모두 그의 특유의 '청다색' 계열에 속하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Umber-Blue>(80), <청다색>(1991), <무제>(1992), <무제>(1994), <청다색>(02), <청다색 No.222>(02) 등은 시간에 따른 작품 경향의 미묘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개인적으로는 대체로 번짐이 적은 나중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인두의 <만다라>, 문학진의 <붉은색 배경>, 이세득의 <심상 A85-7 C>, 김훈의 <무제>


이세득, 문학진, 김훈, 하인두는 저마다의 개성이 강한 작가들이고, 서구의 추상의 방식을 잘 받아들여 자신만의 방법으로 승화시키려 노력한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세득의 작품은 6점이 출품되었다. 그는 올해가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여서 최근에 기념전이 열리기도 했었다. 출품작 중에서 <교외인상>(1958)의 경우 초기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심상 A85-7 C>(1985), <The Cherished Image>(1990) 등을 통해 그의 화풍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문학진의 작품은 4점이 출품되었다. 그는 구상 소재를 살리면서도 그것을 절묘하게 추상화한 화풍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붉은색 배경>(1989), <정물>(1990), <여인과 꽃>(1992) 등에서도 그것이 잘 나타나 있다.


김훈의 작품은 8점이 출품되었다. 그 역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고 출품작 중에는 사실 범작도 없지 않지만 비슷한 구성 사이에서의 미묘한 차이가 엿보이는 <무제>(연도미상)나 <무제>(연도미상)와 같은 작품은 충분히 매력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하인두의 작품은 7점이 출품되었다. <만다라>(1977)를 비롯해 소품에 가까운 <무제>(1986), <무제>(1989) 등의 작품은 호스 같은 선들이 얽혀 돌아가는 그의 특유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위에서부터 신영헌의 <정물>, <무제>, <무제>


경매에 출품된 서양화가들의 작품 중에서 추상 계열에서 김영주나 류경채의 작품이 주목되었다면 구상 계열에서는 단연 신영헌의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신영헌은 앞서 언급한 나상목이나 김영주에 비해서도 알려진 바가 훨씬 적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을 다룬 책들을 찾아봐도 언급이 거의 안 될 정도로 평가를 못 받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드문드문 그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막연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상반기의 경매에서 그의 작품으로 세 점이 출품된 것을 확인하게 되어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동세대의 다른 작가들에 비해 담고 있는 정보량이 많아 스케일이 크다는 인상을 주고, 일부 작품에서는 초현실주의적인 방식을 이용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품작인 <정물>(연도미상), <무제>(연도미상), <무제>(연도미상) 역시 초현실주의까지는 아니지만 구상 소재를 세련되게 재해석한 그의 솜씨가 잘 담겨 있는 작품들이라고 생각된다.


권옥연의 <풍경>, <풍경>, <무제>


신영헌 외에도 구상 (또는 반추상) 계열의 작가들로 이대원, 임직순, 최덕휴, 백영수, 권옥연, 변종하, 박성환, 박항섭 등의 작품이 주목된다. 이들은 대체로 사실주의를 지향하기보다는 구상 소재를 취하면서 자유롭고 개성적인 재해석의 표현 방식을 추구한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권옥연이다. 그는 특유의 낭만적인 화풍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몇몇의 소품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작품이 높은 완성도를 갖추고 있어 작품을 접할 때마다 역시 일류에 속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게 될 때가 많다.


<풍경>(1957) <무제>(1968) <풍경>(1972) <무제>(1980년대) <풍경>(연도미상)과 같은 해외의 정경을 소재로 한 풍경화, <여인>(연도미상), <소녀>(1979)와 같은 여인 초상은 그의 작품에서 주를 이루는 소재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모두가 뛰어난 작품들이다. 한편으로 <달밤>(1972)이나 <무제>(1987)와 같이 추상성을 가미한 작품들도 그의 작품세계의 일면을 보여준다.


최덕휴의 <무제>, 이대원의 <산(보현봉)>, 임직순의 <여인>


이대원의 작품은 22점이 출품되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김종태나 이인성에 버금갈 정도로 천재성을 가진 작가였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출품작 중에서 초기작에 해당하는 <풍경>(1940)과 <여거도>(1941)의 경우 고작 스물 남짓에 그려졌는데도 불구하고 강한 조숙성이 발휘되고 있어 다시금 놀라움을 느끼게 했다. 해방 이후 그는 여러 색깔의 획을 많이 사용한 독특한 풍경화를 주로 선보였다. 일부 작품에서는 다소 과하게 색을 중첩시킨 듯한 인상을 주는 경우도 있으나 <산>(1963), <풍경>(1968), <산(보현봉)>(1976), <소나무>(1976), <농원>(1990), <못>(1991), <농원>(1991) 등은 그의 화풍을 충실히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임직순의 작품은 17점이 출품되었다. 그의 작품에서는 의외로 다소 추상성이 가미된 풍경화나 정물화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의 주 영역은 역시 인물화임을 부인할 수 없다. 출품작 중에서도 <오솔길>(1974), <부두>(연도미상), <꽃>(1991) 등 풍경, 정물 소재의 작품이 여러 점 있었지만 <화실>(1984)이나 <여인>(연도미상)과 같은 인물화가 역시 가장 뛰어나다는 인상을 주었다.


최덕휴의 작품은 <무제>(연도미상) 한 점이 출품되었다. 소품이기는 하나 해사한 색감과 어색한 구석이 없는 산세의 표현 등 그의 솜씨가 충분히 발휘된 좋은 작품이다.


변종하의 <꽃>, 백영수의 <모자>, 박성환의 <풍경>, 박항섭의 <아이>


박성환, 백영수, 박항섭, 변종하는 편의상 구상 계열로 함께 묶긴 하였으나 앞서 언급한 작가들에 비하면 한결 추상 쪽에 가까운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박성환의 작품은 12점이 출품되었다. 그는 동 틀 녘을 연상케 하는 불그스름한 색감을 주로 구사한 작가인데, 앞서 언급한 김영주나 신영헌처럼 보다 많이 주목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출품작 중에는 다소 섬세하지 못한 경우도 없지 않지만 <무제>(1962), <무제>(1970), <풍경>(연도미상), <무등산 계곡에서>(1982), <설경>(1985) 등은 그의 화풍의 강점이 잘 드러나는 풍경화들이라고 생각된다.


백영수의 작품은 2점이 출품되었다. 초기작에 해당하는 <무제>(1969)는 그의 특유의 도상이 확립되기 이전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모자>(1981)는 그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아기를 품은 어머니의 모습이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박항섭의 작품은 4점이 출품되었다. <아이>(1975)나 <소녀>(1976)에서 나타나는 인물 표현 방식은 이 시기 그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아이>의 경우 경매에서는 '기쁨(喜)'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왔는데, 1979년에 열린 개인전의 도록에는 이 작품의 제목이 '아이(童)'로 되어 있다. 아무래도 출품되는 과정에서 '童'을 '喜'로 잘못 읽은 것이 아닌가 한다.)


끝으로 변종하의 작품은 두어 점의 도자화를 포함해 5점이 출품되었다. 그는 특유의 평화롭고 천진난만한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닭>(연도미상), <꽃>(1990), <무제>(1990)와 같은 출품작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이 밖의 서양화가들로서 김종하, 홍종명, 황유엽, 강우문, 고화흠, 정규, 변시지, 김종휘, 박돈, 오승우 등의 작품이 출품되었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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