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미당 시전집 강독 9: 『동천』에서 세 편

by 노정연

1.


천이두 평론가는 서정주의 시를 개관하는 글의 초반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자화상에는, 특히 서정주 같은 마력을 가진 시인의 자화상에는 선량한 독자를 엉뚱한 미로로 끌고 가는 특수한 암시력이 개재하게 마련이다. 「자화상」에 접할 때 특히 그러한 미신에 빠져들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살아온 그의 '자화상'을 접할 때- 「자화상」뿐 아니고 『화사집』에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을 접할 때, 망국의 젊은 시인이 고뇌하는 모습이 뚜렷이 부각되어 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모습이 너무도 음산하고 강렬한 것이어서, 그 속에 서정주의 미래가 이미 지울 수 없을 만큼 짙은 농도로 새겨져 있는 것이나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30년 뒤의 『동천』에서 서정주는 언제 그랬더냐 싶게 건강한 고전적 경지에 접어들고 있다.


가령 『동천』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 「피는 꽃」 속에 부각된 서정주의 모습이 「자화상」에서 볼 수 있던 다급하고 음산하고 병적인 것과는 달리 유유자적하고 정관적(靜觀的)이고 유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양자 사이에 하등의 유사성이나 전후의 맥락 같은 것을 찾을 수 없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양자 사이의 거리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두 가지 모습은 결국 모두 서정주 자신의 것임에 틀림없다. 다름이 있다면 전자가 20대의 서정주라면 후자는 30년 뒤의 그라는 것일 뿐이요, 전자가 저주받은 청춘의 고뇌를 반영하였다면 후자는 지칠 줄 모르는 구도자가 터득한 자족의 자세를 반영하였다는 것뿐이다. 양자 사이의 거리는 극한에서 극한까지다. 지상에서 영원에 이르기까지의, 혹은 지옥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거리다. 그 속에 서정주의 시적인 전 과정이 포용되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 것이다. (주1)


그는 「자화상」에서 『동천』에 이르기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먼 것인가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되돌아보면 과연 그렇다는 인상이 안 들 수가 없습니다. 첫 시집 『자화상』이 탈고된 것은 시인이 밝힌 바 1938년의 일이고, 다섯 번째 시집 『동천』이 출간된 것은 1968년의 일, 공교롭게도 이 두 시기의 두 시집은 거의 정확한 삼십 년의 시간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두 시집이 보여주고 있는 작품세계의 이 엄청난 간극은 그가 얼마나 치열하고도 변화무쌍한 문학적 역정을 걸어 왔는가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화사집』의 거의 모든 작품 속에서 전율하던 피의 몸부림이 『귀촉도』와 『서정주시선』을 거쳐 『신라초』와 『동천』에 이르러 그 피를 정화하기 위한 비전을 정립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이룩해 보여준 시인을 두고 그는 '우리나라에서 한 생애를 이룩한 거의 최초의 시인'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전 과정을 통하여 그 속에 몇몇 뛰어난 시편을 남긴 시인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으나, 그 개개의 시편들이 그때마다의 삶과 시의 뚜렷한 단계를 이룩하면서, 꾸준한 상승의 궤적을 쌓아올린 시인을 찾기는 어렵다. 요절과 중도 유산의 불행한 문학 풍토에 있어 온 우리나라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김소월은 젊은 한의 시인이었으나 늙은 시궁소리를 뽑아보지 못한 채 갔다. 고요한 명상의 시인이었던 한용운은 뜨겁게 잉잉거리는 피와 살의 몸부림을 당초부터 외면한 자리에서 자기 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유치환의 구도는 준엄한 일관성을 간직하는 것이었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인 방황과 광기가 범접할 틈이 없었다. 정철이건 윤선도건 황진이건 이런 점에서는 모두 일반이다. 그들은 끝내 젊은 설움의 시인으로 끝났거나 한 번도 젊어보지 못한 채 당초부터 늙었거나 둘 중 하나다. 그들에게서 시를 찾을 수는 있으나, 시의 한 생애를 찾을 수는 없다. 이리하여 우리는 갑오경장 이후, 아니 향가나 「정읍사」 이후 최초의, 한 장수의 시인을 갖게 되었으니, 그가 곧 서정주인 것이다. (주2)


그의 다섯 번째 시집 『동천』에서는 이전 시집인 『신라초』에서 그 싹을 보이던 불교의 인연관을 기반으로 하면서, 보다 정화된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전작에서 많이 다뤄졌던 설화적 소재의 작품이 줄어드는 대신, 시인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들을 상당히 관념적으로 풀어내는 내용의 시가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윤회나 인연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체득한 뒤, 그것을 말하자면 프리즘으로 삼아 거기에 자신이 느꼈던 삶의 감정들을 비추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편에서 지극히 맑고 정제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신라초』가 그랬던 것처럼 『동천』 또한 서정주 특유의 불교적 인생관에 대한 천착이 낳을 수 있는 부정적 측면 때문에 상당한 비판을 낳기도 했습니다. 특히 시인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태도, 삶을 기만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비판의 여지는 전작보다도 오히려 이 시집에서 더 잘 찾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2.


『동천』은 총 세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 시집입니다. 첫 번째 단락인 '동천' 편에는 열세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고, 이 중 첫 번째로 실린 시가 「동천」입니다. 이 작품은 서정주가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그려 왔던 정화된 내면의 풍경을 단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한,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절창으로 꼽힙니다.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섭을

즈믄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화자는 님의 눈썹을 마음속에 품고 있습니다. 님의 신체 일부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미약하게나마 육체적인 정열과도 연관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는 이내 그것을 맑게 씻어냅니다. 마음속의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씻어낸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세속의 힘이 아닌 정신의 힘으로써 행해지는 일임을 가리키지만, 한편으로 그것이 하루아침에 해낼 수도 없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일임을 뜻하기도 합니다.


화자가 씻어낸 님의 눈썹은 겨울 하늘에 옮겨 심어진다고 말해집니다. 하늘에 심어진 눈썹의 형상은 그믐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와 비슷한 비유는 또 다른 시인 「추석」에서도 주가 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정신적인 행위와 실제의 자연 현상을 연결시키는 시인의 인식은 내면의 사유와 현실에서의 행동이 이어질 수 있어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고 생각됩니다.(주3)


시의 후반부에서 하늘에 심어진 눈썹을 본 매서운 새는,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껴 간다고 말해집니다. 그는 화자의 깊은 뜻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가령 「신라의 상품」에서의 '매'처럼 맑은 눈을 지닌 존재이지만 다른 시어들에 비해 상당히 강한 어감을 가진 매섭다는 표현 때문에 야생적인 느낌을 아울러 주기도 합니다. 새는 하늘에 걸린 달을 망가뜨리지 않게 비껴 가줍니다. 여기서 그것을 '시늉하며' 간다고 한 것이 독특하게 느껴지는데, 아마도 그것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대놓고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무것도 몰랐던 다른 새들인 양 은근한 궤적으로 가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평자들이 「동천」을 이 시기 서정주의 대표작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 시기에 그가 보여주었던 여러 심상이나 아이디어들이 이 작품 속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술술 읽히면서도 사실은 매우 정교하고 견고한 구조를 이루면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불과 다섯 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서정주의 대부분의 시가 그렇듯이 시를 만드는 데 있어 시인이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춘수 시인은 이 작품을 두고 '한국어의 가장 자연스러운 운율과 이미지로 짜여진 전형적이고도 완벽한 서정시'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주4)


시집의 두 번째 순서로 실려 있는 시는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입니다. 이 시는 시집 『동천』에서 인연에 대한 터득이 삶을 바라보는 자세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화자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이별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이별에 대한 슬픔을 덜고자 하고 있습니다. 섭섭해하기는 하되 너무 섭섭해하지는 말자는 1연의 말은 우리에게 보편적인 공감과 호소력을 자아냅니다.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라고 생각하자는 2연의 말 역시, 교조적인 무신론 신도가 아니고서야 누구나 은은한 정감이나 감동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한 대목입니다. '-하게'라는 극히 참신한 어투가 시의 내용과 호응을 이루고 있습니다.


3, 4연은 1, 2연에 비해 쉽게 읽혀지지는 않는 부분일 것입니다. 왜 화자는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되어야 좋겠다고 말하고,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되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안도현 시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 구절의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조절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미당은 연꽃 향기를 맡으며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연애에 빠진 이들이 연꽃한테 무얼 좀 배울 게 없을까? 향기롭게는 말고, 좀 향기로운 듯만 하게.'(주5)


가령 우리가 오래 못 본 친구를 만나러 갈 때와 만나고 돌아갈 때의 기분을 각각 떠올려보면 이 점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연꽃을 만나러 가는 바람은 그를 만날 생각에 들떠 있겠지만, 만나고 가는 바람은 보다 마음이 차분해져 있겠지요. 후자를 더 좋다고 보고 있는 화자는 다시 말해 차분한 마음으로 하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한두 철 전'에 만나고 가는 바람의 심정 역시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에 비해 그 그리움의 감정이 보다 가라앉아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작품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이별하는 일에 대해서 너무 감정적이거나 세속적으로 휩쓸리지 말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리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이 거리 두기가 이별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오히려 유지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작품에서 시인의 통찰의 기반이 불교의 윤회설에 있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이 시는 시집 속에서 불교적 가치관이 비교적 긍정적이고 건강한 방향으로 승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인 시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굳이 언급하는 것은 『동천』에는 시인의 터득이 건강하지 못한 가치관으로 흐르고 만 것으로 평가받는 시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수록된 시는 「피는 꽃」입니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발에 냉수도/ 부셔 버리고/ 빈 그릇만 남겨요./ 아주 엷은 구름하고도 이별해 버려요./ 햇볕에 새 붉은 꽃 피어나지만/ 이것은 그저 한낱 당신 눈의 그늘일 뿐,/ 두 번짼가 세 번째로 접혀 깔리는/ 당신 눈의 엷디엷은 그늘일 뿐이어니……' 화자의 말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앞의 구절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버리라는 뜻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이어 뒤의 구절에서 청자의 눈앞에 피는 꽃 또한 '당신 눈의 그늘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꽃이 중요한 존재가 아님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자신을 본질만 남기도록 비워 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시인이 이전과 달리 허무에 대한 긍정의 자세를 보이게 되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가령 하늘을 향해 자신이 텅 빈 항아리와 같다고 말하던 「무제」와 비교한다면 사발에 담긴 냉수마저도 '부셔'서(이 말은 그릇을 씻는다는 '부시다'의 의미이겠지만 자연스레 '부수다'의 의미처럼 읽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재미있습니다.) 비우자고 말하는 이 시는 허무를 일종의 정제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네 번째에서 아홉 번째 순서로 실린 여섯 편의 시는, 화자가 그리고 있는 인물과 화자 자신과의 관계를 노래하고 있는 시들입니다. 이 작품들에서는 모두 참신한 비유가 돋보입니다. 「님은 주무시고」의 화자는 님이 잠자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은 '그의 벼갯모에/ 하이옇게 수놓여 날으는/ 한 마리의 학'이라고 말하며, 「모란꽃 피는 오후」의 화자는 '그대 있는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둘 사이에 있던 산마루도 뚫고 와 호수가 되어 고였으며, 거기 모란이 핌과 함께 서서히 움직여 갔다고 말합니다.


여섯 번째 시 「내 영원은」은 시적 비유의 출처가 남아 있어 비교적 이해하기가 쉬워 보이는 작품입니다. 화자는 말합니다. '내 영원은/ 물빛/ 라일락의/ 빛과 향의 길이로라.// 가다 가단/ 후미진 굴헝이 있어,/ 소학교 때 내 여선생님의/ 키만큼 한 굴헝이 있어, (…) 내려가선 혼자 호젓이 앉아/ 이마에 솟은 땀도 들이는// 물빛/ 라일락의/ 빛과 향의 길이로라/ 내 영원은.'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열두 살 때의 그는 소학교의 담임선생으로 있던 일본인 여선생을 좋아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시 속에서 나오는 인물은 그 선생을 모티프로 한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이 시의 주어는 '영원'입니다. 서정주의 시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이 단어에 대해, 이광호 평론가는 이 말이 쓰이는 여러 편의 시를 들며 극 추상적인 개념인 영원을 시각적이고 공간적인 이미지로 쓰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의 영원이 '자연적인 공간, 인간적인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영속적인 진리의 일부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주6)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물빛/ 라일락의/ 빛과 향의 길'의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라일락의 푸른빛과 향기는 시간이 오랫동안 지나서 꽃이 피고 지고를 무수히 반복한다고 해도 과거의 사람에게건 현재의 우리에게건 미래의 사람에게건 계속해서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고, 또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정주는 자연의 그런 측면이 일종의 '영원'에 해당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영원의 길 중간에는 '후미진 굴헝'이 있습니다. 이 구렁은 화자의 소학교 때의 여선생님의 키만한 크기를 하고 있으며, 화자가 가다가는 휴식을 취할 수도 있는 곳이 됩니다. 영원이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것들의 총화라면 구렁은 반대로 개인적인 추억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또 영원이 계속해서 걸어가야 될 길이라면 구렁은 중간에 있어 쉬어 갈 수 있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이 점에서 두 곳은 대비되면서도 총체를 이룹니다. 본질만이 남게 될 영원의 사이사이에도 영원하지만은 않은 개인의 추억의 구렁이 있다는 것이 이 시에서 말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때때로 개인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여기에는 담겨 있습니다.


「내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은」은 서정주의 시에서 거의 처음으로 '-요'라는 어투가 쓰인 작품으로 보입니다. 화자는 자신의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언어의 영역을 벗어나 '구름 없는 하늘에 가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마음은 아무래도 성층권 정도에 위치해 있는 모양입니다. 화자는 이 마음이 구름 있는 하늘에 무지개를 타고 내려오면 비와 함께 땅으로 내려가서 산수유꽃과 놀고, 꽃이 지면 구름으로 날아가 쉬다가 무지개를 타고 다시 구름 없는 하늘로 가서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0대의 나이에 이처럼 완연한 동심의 시를 쓸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추석」은 앞서 「동천」에서 나왔던 시어인 '눈썹'이 주가 되어 등장하는 시편의 하나입니다. '눈썹'은 서정주의 시에서 사랑하는 이에 대한 마음을 대신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시어입니다.


대추 물 드리는 햇볕에

눈 맞추어

두었던 눈섭.


고향 떠나올때

가슴에 끄리고 왔던 눈섭.


열두 자루 비수 밑에

숨기어져

살던 눈섭.


비수들 다 녹 슬어

시궁창에

버리던 날,


삼시 세끼 굶은 날에

역력하던

너의 눈섭.


안심찮아

먼 산 바위

박아 넣어 두었더니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추석이라

밝은 달아


너 어느 골방에서

한잠도 안자고 앉었다가

그 눈섭 꺼내 들고

기왓장 넘어 오는고.


화자는 어린 시절 사랑했던 이의 '눈섭'을 시간이 지난 뒤에도 안 잊히는 채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울로 가면서 '고향 떠나올때/ 가슴에 끄리고 왔던' 것이었고, 모진 세상 속에서 모지게 살려고 하던 시절에도 숨겨져 있던 것이었고, 나중에 그 모진 마음을 다 버리게 되었을 때에는 자신에게 역력하게 나타나던 것이었습니다. 화자는 이젠 그것을 '먼 산 바위' 속에, 곧 마음속 한켠에 묻어둔 채로 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동천」에서의 눈썹이 그믐달이라면 이 시에서의 눈썹은 초승달 같다고 말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달 밝은 추석날에 그것이 보름달이 되어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추석의 보름달을 보면서, 바위 속 깊이 박아 넣어 두었던 님의 눈썹이 어떻게 여기에 보름달이 되어서 나타나 있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이 뜬 밤 풍경을 보면서 떠오르는 옛사랑의 생각을, 마음속에 있던 초승달 같은 그의 눈썹이 보름달이 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표현한 이 시는 은은한 감동을 줍니다.


「눈 오시는 날」에서의 화자는 '내 연인은 잠든 지 오래다./ 아마 한 천 년쯤 전에……'라고 말합니다. 아마 그가 말하고 있는 연인은 전생에서의 연인일 것입니다. 그는 이 연인이 어디에서 자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꿈의 빛만을 나한테 보낸다'고 말하면서, 시 속의 눈 내리는 풍경을 비롯한 자연의 여러 빛깔과 함께 자신의 곁에 누워 있는 지금의 연인의 '손톱 속에 떠오르는 초생달'에 그것이 비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눈썹이 그런 것처럼 손톱 또한 초승달의 형상을 한 신체의 부위로서 서정주의 시에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 번째와 열한 번째 순서로 수록된 「마른 여울목」과 「무의 의미」는 앞에서 다루어진 사랑 또는 관계의 문제들을 윤회의 또 다른 측면, 허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작품들입니다. 「마른 여울목」의 중간 부분에서는 여울 근처에 살던 사랑하던 소년과 소녀가 등장합니다. 소년과 소녀가 살다가 죽어서 그들의 피가 다 없어지고 여울도 풍화되어 자취를 감춘다는 중간의 내용은 다소 전형적이지만, 이 내용의 앞뒤인 첫 연과 끝 연에 같은 구절이, 말라붙은 여울바닥 위에 늙은 무당이 또 앉아 손바닥의 금을 펴보고 있었다는 구절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이것은 꽃나무를 잊어버린 일이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무의 의미」는 아예 서사 자체를 없애고 '잊어버린 일'에 대해서만 말함으로써 허무를 표현한 독특한 시입니다.


「동지의 시」는 일견 알쏭달쏭하게 느껴지는 시입니다. 화자는 자신의 '루비'와 '비취'들이 자기네들의 친정인 하늘로 가 있으며, 그러고 나니 '친정 간 내 안해와 남은 내 키만큼 한' 공규(空閨)가 남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전자의 이미지는 「님은 주무시고」에서 님의 루비가 가라앉는 장면으로 유추할 수 있고, 후자의 이미지는 「내 영원은」에서 추억 속 여선생님의 키만 한 공간에 대한 언급으로 유추할 수 있어 보입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화자는 루비나 아내가 친정을 간 것처럼 자신도 '천리의 동지 여행'을 가볼 생각을 합니다.


'동천' 편에서 마지막 순서로 실려 있는 작품은 「저무는 황혼」입니다. 천 리의 여행을 가겠다던 앞의 시와는 달리 여기에서의 화자는 휴식을 취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자신의 지나온 삶이 '골골이 뻗히는 시름의 잔주름뿐'인 '소태같이 쓴 가문 날들'이었다고 하면서, '누엿누엿 저무는 황혼을/ 언덕 넘어 딸네 집에 가듯이', '엣비슥히 비끼어 누어/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도피라면 도피겠지만서도, 그에 앞서 이전의 시집들을 다루면서 언급했었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남호 평론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세상 시름에 오래 시달렸고, 번뇌와 욕망에 오래 안달하였으나 이제 그것들을 그냥 버려두고 초라한 잠을 청한다. 여기서 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엣비슥히 비끼어 누어'라는 구절이다. 시인은 가파른 세상을 잊고자 할 때도 그냥 잠드는 것이 아니라 '엣비슥히 비끼어 누어' 잠든다. 「동천」에서도 유사한 구절이 나왔었지만, 이 구절 속에 나타난 마음은 특히 서정주가 자기 것으로 잘 간직하고 있는 마음으로 생각된다. (…) 그 마음은 세상의 소태같은 가문 날들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태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면하고 도피하는 태도도 아니다. 그 세상의 속된 가치를 추수하는 것도 아니고 또 아예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 중간쯤 되는 마음, 억지로 무얼 좀 해 볼려고 하고 싶지만 해 봐도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 역시 미리 아는 마음, 대상의 초라함과 고귀함을 동시에 껴안는 마음, 네가 부럽긴 해도 너처럼은 안 살겠다는 자존의 마음, 고요한 하늘이 궁금해 그냥 한번 꽃피워 보는 난초 같은 마음 - 이 '엣비슥히 비끼어 가는 마음'일 것이다. (주7)


영원을 얘기하다가도 현실을 보는 시선을 놓지 않는 서정주의 감각이 이 작품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지고한 삶, 굽히지 않는 삶을 예찬하지만, 그것이 무조건 정답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완전하게 지고한 삶이라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이 이루기 어려운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세상의 핍박에 쓰러지지 않는 삶도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거기서 오는 고통을 피해가고자 하는 것 역시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고 이 시는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까지의 한국 시에서도 생각보다 찾기 어려운 성찰이라고 생각됩니다. 툭하면 지조를 노래하는 당대의 수많은 시인들과 비교했을 때 '엣비슥히 비끼어' 사는 삶을 노래한 서정주의 태도는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더 독창적이며, 더 용기 있는 발언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무조건적인 윤리 예찬의 맹점을 간과하곤 하는 일부 문학인들에 비해 서정주는 훨씬 더 생각해 볼 만한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시인입니다.





1) 천이두, 「지옥과 열반」, 『종합에의 의지』(일지사, 1974).

2) 천이두, 위의 글.

3) 한편으로 김재홍 평론가는 이 구절에서 '심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주목하기도 했습니다. '(3행에서의 행위는) 『서정주시선』 무렵부터 끈질기게 작용해 오던 하늘 지향성 또는 수직 상승의 꿈이 마침내 그 실체를 얻게 된 것이다. 그만큼 육신의 무게, 운명의 짐이 가벼워진 것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심어 놨더니'라는 식물적 이미지가 문제다. 생명과 사랑이 가벼워지고 투명해진 것인데도 그것은 '심는다'라는 대지적, 식물적 상상력에 그 뿌리를 두었다는 점이 특이한 것이다. 이것은 생명력의 문제와 관련된다. 우주적인 비상을 꿈꾸면서도 『신라초』에서처럼 대지적인 것, 현세적인 지상에서의 생명력을 바탕으로 하면서 더욱 생생한 생명력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김재홍, 「미당 서정주」, 『한국현대시인연구』(일지사, 1986).

4) 김춘수, 「해조, 아날로지, 즉물적」, 『현대문학』(2001년 2월호) 참조.

5) 안도현, 「연꽃」, 『한겨레신문』(2013.7.24.)

6) 이광호, 「영원의 시간, 봉인된 시간」, 『환멸의 신화』(민음사, 1995).

7) 이남호, 「겨레의 말, 겨레의 마음」, 『녹색을 위한 문학』(민음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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