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정연 Sep 25. 2022

머리글

한국미술, 열두 개의 변주 (1)


이 한국어판을 읽는 독자들이 곧 알게 되겠지만 이 책에는 위대한 한국의 미술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내가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이나 그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그 신비로운 불후의 업적들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으므로 한국 미술에 관해서는 이집트나 그리스, 심지어 중국의 미술에 관해서 논할 때 가질 수 있었던 그런 확신을 가지고 집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의 한국인 독자들은 어쨌든 자국의 미술을 사랑하고 찬미할 것이므로 멀리 유럽에 있는 작가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충분히 자국의 미술에 대해 긍지를 가질 것이라 믿고 내 스스로 위안을 삼고자 한다. (주1)



위대한 전통


팔십객의 노학자 곰브리치는 자신의 책 『미술 이야기』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위와 같이 적고 있다. 그는 책 속에서 한국 미술을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독자들의 양해를 요망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세계 미술의 전반적인 역사를 주제로 다루면서도 정작 번역 대상이 되는 나라 사람들의 미술이 등장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다소 겸연쩍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대학교 초년생 시절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서두에 등장하는 이 대목을 읽고서 조금 놀란 기억이 있다. 변두리 문화 취급에 익숙해진 까닭에 이름 있는 외국 학자라면 으레 이쪽에는 데면데면할 것이라고 짐작하던 독자의 입장에서는 예상 밖의 겸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논리적이기보다도 정서적인 호감으로 다가오는 구석이 있었다.


위에서 그는 한국 미술의 감상에 대한 구체적 경험의 기회를 갖지 못했기에 그것에 관해 쓸 수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예술사의 서술이 결국은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임을 새삼 절감케 하는 설명이며 이는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도 맞닿아 있는 명제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것은 서양 학자가 쓴 개설에 대하여 우리 쪽에서 흔하게 가질 수 있는 선입견에 재고의 여지를 던져 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서양 학자들이 세계 미술사를 쓸 때 서양 미술을 주로 다루고 동양 미술의 비중을 적게 하는 것이 반드시 동양 미술을 낮춰 보고 있기 때문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동양 미술 감상의 축적된 경험에서 얻은 '확신'이 서양 미술에서 얻었던 그것만큼 구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술 이야기』에서도 그것은 가령 중국의 산수화에 대해 언급한 대목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유독 한국어판에서만 이 책의 제목을 '서양미술사'로 바꿔서 출간하게 만드는 데에도 일조한 감이 있다.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에서 이 책의 제목은 각각 '艺术的故事', '美術の物語'로 나와 있다.)


하여간 확실한 것은 최소한 한국 미술에 대해서는 우리가 곰브리치보다 막연하게라도 더 잘 알고 있을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쓸모없고 자신감 가질 필요 없는 사실이지만 적어도 미술을 잘 모른다는 자격지심에서 오는 위축을 얼마간 풀어주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외국 학자가 쓴 책에 우리나라가 언급되는지 안 되는지를 따지기에 앞서 우리나라 미술이 세계적으로 내세울 만한 작품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부터 따져봐야 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사실상 걱정할 필요가 별로 없을 줄로 안다. 우리에게도 그런 작품이 있다, 는 것이 우리 쪽 학자들이 내린 나름의 결론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우리 학계의 원로 학자가 집필한 대표적인 한국 미술사 개설서로는 김원룡이 주도하여 집필한 『한국미술의 역사』와 진홍섭이 주도하여 집필한 『한국미술사』를 들 수 있다. (이들에게 각각 영향을 끼친 여당 김재원과 우현 고유섭이 곰브리치와 동년배라고 한다면 대략적인 세대가 짐작이 될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에는 다양한 장르에서 수많은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아예 세계 미술사에 남을 걸작이라고 못을 박아 적시한 작품은 두어 점뿐이다. 신라의 금동반가사유상과 석굴암이 그것이다. 곰브리치의 말을 빌린다면 이 작품들이 그야말로 한국 미술사의 '신비로운 불후의 업적들'에 해당하는 셈이다.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은 600년경에 나타난 우리 나라 환조의 최고 걸작이다. 우아한 몸매를 통해서 인체의 미를 순수ㆍ숭고하게 표현한 상반신, 특히 자연스럽게 흐르는 듯한 두 팔과 손가락, 정신미를 응축한 청결ㆍ단엄한 얼굴, 그리고 물결치듯 생동하는 엷은 옷 밑으로 시사되는 두드러진 하체, 그 옷주름의 리듬에 대응하듯 무릎 위의 고개든 엄지발가락 등 앞ㆍ뒤ㆍ옆 어느 쪽에서 보아도 걸리는 곳 없는 전신의 곡선, 상ㆍ하반신에서 보는 정과 동의 대조적 효과, 나무랄 것 없는 완벽한 모델링 등에서 볼 때 이 보살상은 확실히 석굴암조각과 함께 인류가 낳은 최고 수준의 불교조각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우리 미술의 위대한 기념물이라 하겠다. (주1)



석굴암은 새로운 양식의 수용과 세련된 미감이 한층 고조되고, 원숙한 조각 기량이 발산된 한국 조각의 기념비적인 최고 걸작이다. 주존상은 신체 구성이나 자세에서 고요하면서도 생동적인 종교적 감동을 발산한다. 얼굴에서는 무구한 불성이 발산되며 두 손끝의 표현은 깊은 정신성에서 나오는 청정함이 느껴진다. 석굴과 조각이 입체적으로 종합 설계되어 배후 조각이나 천장의 연화문 광배는 모든 각도에서 본존과의 조화를 이룬다. 옷의 표현은 단순하면서도 사실적이다. 본존 둘레의 여러 상들 중 십일면관음보살입상은 완벽한 표현 역량을 보여준다. (…) 석굴암 조각은 높은 정신성과 장기간에 걸친 기술 연마의 결과 생산된 신라 미술품 중 최고이며 세계 조각사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다. (주2)



이러한 찬사에 이의 제기의 여지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다른 좋은 작품들도 많은데 굳이 신라의 반가사유상과 석굴암만이 찬사의 영예를 안고 있는 데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타당한 지적이다. 그들 외에도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백제의 공예, 고려의 도자기와 불교회화, 조선의 건축과 공예 그리고 안견, 정선, 김홍도를 위시한 대가들의 회화 등이 각 시대를 대표하는 동시에 우리 미술 전체를 대표할 만한 가치를 지닌 작품들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찬사가 너무 남발되어선 안 되겠기에 극히 일부의 작품에만 이러한 수식을 붙인 셈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사실 세계적이라는 표현 자체가 비평적인 함의를 넘어서는 면이 있으므로, 반드시 절대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대략적인 지표로 삼아 감상자 자신이 주체적으로 대표적 작품의 목록을 찾아나가면 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붙이는 세계적이라는 말 자체가 과대평가의 혐의를 띠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을 할 이도 있을 수 있겠으나 고고학과 미술사학의 본격적 발전 단계에서 공부를 시작해 평생을 학문에 종사한 이들의 저작에 쓰여 있는 대목인 만큼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찬사의 값어치가 터무니없이 떨어진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오히려 신뢰할 만한 증언이지 않겠느냐고 반론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예술작품에 대한 온당한 평가는 기본적으로 높은 소양과 안목의 소유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또 그것이 충분히 수용될 만한 사회적 분위기가 갖춰져야 옳은 의미에서의 대중화가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걸핏하면 'K' 자를 붙여 가며 세계성을 내세우지 못해 안달인데다 강단 학계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이 팽배한 사회 풍토에서 그것을 기대하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새로운 지평선


뒤서가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은 적어도 예술의 영역에서는 반쯤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앞선 이들의 세계가 존경의 대상이 되면서도 한편으로 상상적인 대결 상대로 자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의 성취가 뛰어날수록 뒤 세대의 예술가들은 과거 유산의 찬란함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동시에 그들을 능가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기 마련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포스트르네상스 시대라 할 수 있을 이른바 매너리즘 시기의 예술가들을 흔히 그 대표적 사례로 들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은 우리 쪽에서도 충분히 발견된다. 거창한 대로 세계성에 관한 이야기를 내세우며 글을 시작한 것은 이 글의 주제인 우리의 근대 미술에 있어서 작가들이 지니고 있었던 무게감이 생각보다 더더욱 큰 것이었다는 점을 우선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19세기의 끝자락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주4) 우리의 근대미술은 어수선한 대로 일말의 자부심만큼은 지닌 채 출발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부심의 근원이 되는 과거의 유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들이 느꼈을 전통의 존재감은 동시대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에 비해 훨씬 큰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전통 예술의 성취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미술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가령 한문에 대한 국문 문학의 역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던 문학 쪽이나 삼부악 등을 제외하면 체계화의 역사가 그리 길지 못한 음악 쪽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이는 뚜렷해진다. 실제로 우리 예술의 고전을 선별한다고 했을 때 문학이나 음악 쪽에서 20세기의 작품이 그 이전의 전체 시기에 대해서 점하는 비교 우위를 미술 쪽에서는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만큼 과거 유산의 비중과 현재성이 큰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 근대 미술은 전통의 무게감과는 또 다른 편에 있는 새것의 수용 문제와도 동시에 마주쳐야 했다. 회화의 경우 유화의 도입과 일본 수묵채색화의 영향이, 조각의 경우 서구적 양식의 도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양식의 수용과 관련해서 가장 문제되는 점은 그것이 동시에 미의식의 변화와 연관된다는 데에 있다. 손으로 하는 양식과 머리로 하는 미의식은 미술의 양면을 이룬다. 자신만의 미의식을 세우지 못하면 그것이 양식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해 모방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 되고, 반대로 미의식이 세워져도 양식을 능란히 다루지 못하면 기본이 갖추어지지 못한 작품이 된다. 따라서 미술에서 새로운 양식을 수용한다면 그것은 미의식의 변화와도 연결되어야 하며, 또한 기존의 양식과 미의식으로부터 왜 변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지녀야 했다.


이와 관련된 문제는 근대의 우리 작가들을 곤란함에 빠뜨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가령 근대 미술의 가장 주류적 장르였던 회화에서 쌍벽을 이루었던 장르인 동양화의 서양화의 발전 양상을 비교해 봄으로써 이를 실감할 수 있다. 동양화가들의 어려움이 미의식의 문제 즉 전통의 무게와 새것의 수용 사이의 딜레마에 있었다면, 서양화가의 어려움은 양식의 문제 즉 새것의 수용 그 자체의 힘듦에 있었다.


근대의 동양화단은 조선 말기의 화단을 어느 정도 계승하여 성립되었다. 조선 말기의 화가들에게 양식적, 미의식적으로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은 단순히 말하자면 추사의 남종화 지상주의와 오원의 형식주의의 두 가지였는데, 이 중 오원의 영향을 받아 섬세한 화풍을 주로 구사한 이른바 '장승업계'의 화가인 안중식과 조석진이 근대 초기 화단의 원로격이 됨으로써 이들의 문하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한편 추사의 영향은 소치 허련 등에게로 이어지고 허련의 화풍은 추사 문하의 화가 중 거의 유일하게 근대로까지 전승되어 앞의 '장승업계'와는 구분되는 '허련계'로 일가를 이루어 양대 계보를 이룬다.(주5)


19세기 전반의 추사와 19세기 후반의 오원의 지향점은 그 자체로는 상극을 이루었지만, 재미있게도, 추사로부터 이어진 허련계는 점차 본래의 문인 취향에서 점차 속화되어 직업화가화(化)됨으로써, 오원으로부터 이어진 장승업계는 화단의 주류가 되어 형식주의 경사로부터 문인 취향으로의 점진적 진출을 도모함으로써, 두 계열은 모두 형식과 정신의 엇비슷한 양수겸장을 추구하게 된다. 양 계열의 중간 세대에 속하는 이들은 모두 그들의 원류였던 전대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듣기는 하나 전통이 있다는 것은 어쨌든 기본적인 밑천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본적인 아카데미즘이 있었기에 이들에게서 첫 영향을 받은 근대의 동양화가들은 기본적인 역량을 비교적 일찍 갖출 수 있었고, 여기에 일본의 수묵채색화로 대표되는 새로운 양식의 연마를 통해 중간 세대가 지녔던 아슬아슬한 매너리즘의 위험으로부터 탈피를 도모할 수 있었다. 일본 회화의 수용을 두고 지나치게 무비판적이라거나 미의식 없는 양식만의 수용이라는 비판이 없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화풍의 빠른 흡수 자체가 국내 아카데미즘에 의한 수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이후 적지 않은 화가들이 점진적인 자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거시적 안목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전통을 기반으로 한 동양화단이 양식과 미의식의 두 날개 가운데 그래도 양식의 한 날개는 지닌 채 출발한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새 부대에 담그는 술이었던 서양화단은 두 날개를 모두 다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했다. 유화나 수채화와 같은 서양화의 정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10년대 이후부터이다. 이 무렵은 서구에서 근대 회화의 변혁이 진작에 이루어진 이후였고, 따라서 초기의 서양화가들은 소위 아카데미즘적인 사실주의와 반대로 그것을 깨뜨리는 인상주의 이후의 사조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가뜩이나 첫 발을 내딛는 상황에서 이들은 초장부터 지나치게 넓은 선택의 폭을 마주해야 했다. 이러한 방법론적인 난점은 기술적 숙련의 더딘 정착과 겹치면서 동시대의 동양화단에 비해 한결 느린 발전 과정을 불러오게 했다.


이렇듯 우리의 근대 미술은 한쪽으로는 유구한 전통의 무게, 다른 쪽으로는 낯선 양식의 수용이라는 두 개의 큰 관문을 헤쳐나가야 하는 험난한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이 과정에서 빛나는 과거의 걸작에 미치지 못하는 수다한 범작을 낳아야만 했다. 흔히 우리 미술을 이야기하면서 가까운 근대의 작품을 놔두고 오히려 더 먼 조선시대나 그 이전의 작품을 논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를 흥미 있게 돌아볼 수밖에 없는 것은, 어쨌든 이러한 변혁의 과정에서 이전의 미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시도가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전통에 대한 대담한 반기는 기존의 주제들을 새롭게 돌아보게 해주었고, 새것에 대한 대담한 수용은 이전에 없었던 소재와 표현을 통해 우리의 미술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가령 유사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 이쾌대의 <여인초상>(1940년대)와 배동신의 <소녀상>(1954년)이 각기 도달한 경지를 나란히 놓고 보는 것은 좋은 대조가 된다. 두 작품은 재료도 표현도 판이하지만 작가가 새로운 표현 기법을 원숙하게 습득하였고 이를 통해 간단한 구성으로도 강한 매력을 보여주는 작품을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이러한 비교는 우리의 근대 미술이 거의 장르의 각축장의 양상을 띠고 있었으며 다양하고 획기적인 시도가 많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름대로 보여준다.


열두 가지 주제


이러한 변혁의 과정을 나름대로 돌아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하지만 고작 학도의 짧은 식견으로 그 전체 양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곰브리치와 같은 전문가의 차용할 만한 참조 자료가 있어서, 그것을 따라 보다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주제를 좁힌다면 좀 괜찮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알게 된 책이 바로 총 세 권으로 된 공저 『미술사의 이해』였다. 영국 애슈몰린 박물관의 관장을 지낸 데이비드 파이퍼를 중심으로 집필된 이 책은 1981년에 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95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곰브리치의 『미술 이야기』가 미술의 개념들을 역사적 흐름의 서술에 통합시켜 하나의 총체적이고 거대한 구성을 이룬다면, 『미술사의 이해』는 개념에 대한 설명들을 첫 권에서 다룬 뒤 나머지 두 권에서 역사적 흐름을 소개하고 있어 보다 쉬이 읽힌다는 인상을 준다. 이해를 위해 각 권의 대략적인 차례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1권 『미술의 이해』:

- 데이비드 파이퍼, 「열두 가지 주제에 의한 변주」

- 크리스토퍼 콘포드, 「회화의 언어」

- 피터 오웬, 「회화의 재료와 기법」

- L. R. 로저스, 「조각의 언어와 기법」


2권 『위대한 전통』:

- 「고대의 세계」

- 「중세와 르네상스 초기 미술」

- 「16세기」

- 「바로크 시대」


3권 『새로운 지평선』:

- 「동양 미술」

- 「혁명의 시대」

- 「20세기」


아마 다른 이들도 목차를 보면 대체로 그렇게 느낄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개인적으로 여기에서 특히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은 첫째 권인 『미술의 이해』였다. 미술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책은 적지 않지만, 미술작품의 기본을 이루는 주제와 조형요소, 재료와 기법에 대해 체계적으로 다룬 책은 비교적 많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첫머리에 실린, 미술작품의 주요한 주제와 그 변천을 시대를 넘나들며 다룬 「열두 가지 주제에 의한 변주」는 매우 매력적인 글이었다. 이 글에서 데이비드 파이퍼는 동서고금의 미술작품에서 다루어진 가장 대표적인 주제 열두 가지를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① 인간의 형상, ② 인간의 얼굴, ③ 남녀의 쌍, ④ 삶과 노동, ⑤ 삶과 여가, ⑥ 서술적 이야기, ⑦ 풍경, ⑧ 동물, ⑨ 정물, ⑩ 신성의 이미지, ⑪ 알레고리ㆍ신화ㆍ환상, ⑫ 내면으로 향한 눈.


이러한 구분 기준에 대한 당부당의 문제를 떠나서, 그의 주제별 분류와 그에 따른 각각의 변천사의 서술 방식은 미술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는 좋은 방식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양식을 베껴 와, 이 글의 주제인 우리의 근대 미술을 설명하기 위한 이야기의 틀로 삼기로 하였다.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주요하게 다루어졌던 주제가 한국에서는 어떻게 다루어져 왔는가를 살펴보는, 열두 가지 주제의 한국판 '변주'가 되는 셈이다.


참고로 각각의 단락의 세부적인 글의 흐름은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다. ① 먼저 서두에서는 주제별 대표작에 대한 인용문과 함께 데이비드 파이퍼의 단락별 내용을 요약 소개하였다. 이는 우리 미술의 흐름을 살펴보기에 앞서 서구 미술을 비롯한 외국 미술에서 각 주제가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② 두 번째 대목에서는 해당 주제가 우리 미술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져 왔는지를 정리하였다. 특히 근대 미술의 선행 시기인 19세기 미술에서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소개될 것이다.


③ 세 번째 대목에서는 본격적으로 우리 근대 미술의 상황을 제시하였다. 두 번째 대목에서 다루어졌던 전통 미술에서 해당 주제를 어떻게 다루어졌는가에 대한 방식이 어떻게 계승되거나 혹은 변화하였는지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④ 끝으로 네 번째 대목에서는, 각 주제별로 개인적으로 선정한 대표적 작가 한 명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는 미술사에서 거시적인 흐름과 세부적인 흐름을 조화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생소할 수 있는 작가를 소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기도 하다.


이상과 같은 구성은 다소 번잡해 보일 수는 있겠지만, 우리 근대 미술사가 전통적인 한국 미술사와 단절된 것이 아닌 연결되어 있으며 나아가 세계 미술사의 흐름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케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를 통해 우리 쪽 작가들의 미의식과 양식을 외국 미술의 미의식 및 양식과 비교할 수 있는 일종의 준거 틀을 제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데이비드 파이퍼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서술 방식에 특히 매력을 느꼈던 것은, 물론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미술사의 이해가 작품을 본위로 이루어져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예술사 서술에 있어 시대의 흐름과 영향력에 집중하다 보면, 소위 대표적인 작가를 중심으로 설명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미술적'으로 뛰어나지는 않지만 '미술사적'으로는 중요한 작품이 소개되는 반면 '미술적'으로는 뛰어나더라도 '미술사적'으로는 언급하기 애매해져 생략되고 마는 작품이 생겨나는 결과를 맞기가 쉬워진다. 하지만 작품의 주제와 같이 작품 자체의 요인을 중심으로 서술 방향을 잡는다면, 이러한 문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최대한 개별 작품의 의미를 중심으로 서술을 이어 가고자 하며, 무명에 가까운 작가의 작품일지라도 각 주제에 충분히 걸맞다고 여겨지면 가능한 주저 없이 소개할 생각이다.


한편으로 그의 주제 분류는 구상 미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보니, 그의 구분을 따르는 것은 우리 근대 미술의 가장 뛰어난 성과 중 하나인 추상 미술의 양상을 거의 제외시켜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의도된 것이다. 흔히 사람들 사이에서는 추상 미술을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미술로, 구상 미술은 이해하기 쉬운 미술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추상 미술을 막연하게 난해한 것으로 치부하는 발언이면서도 한편으로 은근히 구상 미술을 단순할 것으로 단정하는 발언이기도 하다. 구상이든 추상이든 모든 미술작품은 시각예술이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만큼은 다를 바가 없다. 구상 작품을 좋아하면서 추상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며 반대로 구상 작품이 추상 작품보다 반드시 쉬울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도 일종의 착각이다.


미술작품의 내용에 드리워진 맥락이 작품의 깊이를 키우는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술작품의 가치를 결정 짓는 가장 큰 요소는 결국 시각적 표현의 발휘에 달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점에서 특히 개념 파괴적 미술의 전성시대인 오늘날에 구상 미술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미술작품의 본래적 감상 능력을 돋우는 데 좋은 역할을 해줄 것이다. 작품의 묘미를 이루는 시각적 변주에 관심 없이 가령 서양의 정물화나 우리 쪽의 기명절지화를 보는 즐거움을 느끼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이들을 보는 즐거움을 모르면서 미술에 관심을 두겠다는 것은 미술 없이 미술사를 읽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명작과 범작을 가려내는 안목을 기른다는 측면에서도 우리 근대 미술은 충분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1) 에른스트 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역, 『서양미술사』(예경, 1994), 7쪽.

2) 김원룡 외, 『한국미술의 역사』(시공사, 2003), 183쪽.

3) 진홍섭 외, 『한국미술사』(문예출판사, 2006), 295~296쪽.

4) 홍선표, 『한국근대미술사』(시공사, 2009), 10~17쪽.

5) 안휘준, 『한국 회화사 연구』(시공사, 2000), 718~726쪽.


사진 출처:

(1) 이쾌대 <여인초상>: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2) 배동신 <소녀상>: 충남도민일보 홈페이지


* 이 글의 전반부는 2021년 초에 썼던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