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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연 Oct 30. 2022

1. 인간의 형상: 서진달의 나체화 (3)

한국미술, 열두 개의 변주 (4)

1930~40년대에 김인승, 이쾌대와 함께 누드 소재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또 다른 작가로 서진달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앞의 두 작가와 달리 그는 요절한 탓에 남아 있는 작품이 그다지 많지 않고, 또 그들처럼 스케일의 확대와 같은 개성적인 시도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누드 미술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요소, 즉 인체 표현의 정확성에 대한 수련에 있어 이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기량을 보여준 작가였다. 따라서 많지 않은 작품만으로도, 또 소박한 작품만으로도 우리 미술사에 잊히지 않을 만한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를 이 첫 번째 주제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진달의 생애와 작품


1908년에 태어난 서진달은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인 1930년 일본으로 유학해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미술학교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 예행 교육을 지도하는 연구소에서 기본기를 쌓았다.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미술 관련 학교였던 도쿄미술학교는 높은 권위를 자랑하는 동시에 입학 경쟁이 치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기본기에 대한 수련이 없이는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그가 이후 1935년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기까지는 꼬박 5년여의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앞서 그가 들어갔던 연구소에서의 수학 기간이 3년여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후로도 몇 해를 더 바쳐야 했던 셈이다. 이 사이에 그는 <시장의 일각>(1931)을 조선미전에 출품해 첫 입선을 받기 시작, 이후 <소녀탄주도>(1932), <인물>(1933), <나부>(1934)를 연속으로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서진달의 초기 화풍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첫 작품이 풍경화라면 나머지 세 작품은 인물화이다. 피아노를 치는 소녀의 옆모습을 그린 <소녀탄주도>의 경우 도판만으로는 매력을 느끼기 어려운 작품이지만, 상투를 틀고 앉은 사내의 모습을 그린 <인물>과 옆으로 비스듬히 앉은 모델의 모습을 그린 <나부>는 그가 충분히 기량을 쌓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라고 생각된다.


<인물>에서 표현된 남자의 도전적인 눈빛과 얼굴 묘사는 필치가 빠르면서도 매우 정확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림자로 가려진 체구는 매우 건장하며 일견 투박한 듯하게 앉은 자세는 필부의 견실함을 드러내 준다. 한 사람의 초상이면서 동시에 당대 인간상의 한 객관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부> 또한 그의 표현 능력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선우담 등의 작품과 자세는 엇비슷하지만 비율이 한결 정확하다. 역시 빠른 필치라고 생각되지만 팔과 다리에 가해진 음영은 군더더기없어 보인다. 어색한 구석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한편 이 시기 서진달의 현존 작품으로 <나부입상>(1934)이 대구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 작품은 같은 시기 조선미전 출품작들과 함께 서진달이 비록 늦은 진학에도 불구하고 착실히 자신의 기량을 쌓아 갔음을 뚜렷하게 증거해 준다. 같은 해의 <나부>처럼 빠른 필치가 구사되어 있지만 이 작품에 표현된 인물의 정확성은 괄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결코 허투루 선을 긋지 않았음을 느끼게 한다. 가령 어깨나 팔 선을 보면 예사의 화가들이라면 그저 한 선으로 지나갔을 부분에 디테일한 윤곽을 더해 정확한 근육의 이동을 포착하고 있음이 엿보인다. 반대로 왼손에 잡힌 뱃살과 같이 디테일을 살린답시고 과장되기 쉬운 부분은 아주 자연스럽게 처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잘 살려진 부분은 얼굴이다. 모델 소재를 처리할 때 거의 무감정하게 처리되는 경우가 많은 부분인데 이 작품에서는 표정이 더해짐으로써 작품의 매력을 완성시켜주고 있다. 다소 과감할 수 있는 빨간색을 감쪽같이 덧입힌 것 또한 활기를 더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기에 손색없다.


서진달의 <나부>와 <나부입상>


유학 5년 만에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한 서진달은 이후 5년 과정을 거쳐 1940년에 졸업했다. 당시 그는 여유로웠던 집안 사정에 기반하여 짧지만은 않았던 유학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근대미술의 형성』에서 평론가 윤범모는 그의 출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진달만큼 부유한 환경에서 미술수업을 한 한국 화가도 드물다. 대구 부호의 아들답게 그는 호화판 유학생활을 했다. 시골 면서기의 월급이 10원일 때 그는 한 달에 1백 원 이상의 생활비를 썼다.'(주1) 또 그는 1941년 귀국 이후 미술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자신이 동경에서 10년 동안 3만 원을 들여서 세계적 수준의 미술 공부를 해왔으니 열심히만 공부하면 몇 개월 안에 전부 가르쳐주겠다고 호언하기도 했다고 한다.(주2)


뒤에서 다루게 될 작가이지만 가령 서진달보다 10여 년 뒤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 김흥수는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가정 환경에서 자신에게 보내지는 돈이 월에 30원이었으며 이 중 기본 생활비로 26원이 나가니 나머지 4원으로는 화구도 제대로 못 사는 형편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를 비교해 보았을 때 서진달이 월에 100원씩을 썼으며 10년을 통틀어 3만 원을 썼다는 일화가 사실이라면 그는 과연 부유층의 자제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서진달의 1930년대 후반 작품은 아카데미즘의 기반에 의해 더욱 완숙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 그의 화풍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나부>(1937)와 개인 소장의 <나부>(1938)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작품에는 각각 '小. 二. 徐', '小. 三. 徐'라고 서명되어 있는데, 이는 도쿄미술학교의 고바야시(小林) 교수의 수업에서 각각 2학년과 3학년 때 제작한 것으로 해석된다.(주3) 이 두 점의 <나부>는 명암의 대비가 강조되어 있고 붉은색을 주조로 쓰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서진달의 기량을 보여주는 동시에 도쿄미술학교의 교육 방식을 보여주는 자료로서도 가치 있는 작품들이라고 생각된다.


한편으로 이 시기에 그는 조선미전에 <실내>(1937)와 <스토브>(1940)를 발표하고 있다. <실내>는 인물화로서 화로 앞에 앉은 노인이 다리미 같은 것을 집으려는 듯한 자세를 취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스토브>는 <실내>와는 대조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인물화는 아니고 방 가운데에 스토브가 놓여 있는 실내 풍경을 다루고 있다. 그는 1940년에 총독부에서 열린 재동경미술협회의 3회 전시회에 9점의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서진달의 회화적 기량은 이 밖에 1940년 작으로 되어 있는 다섯 점의 수채화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도4) 이 수채화들은 그가 인물만이 아닌 풍경과 정물에도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서진달의 <나부>와 <나부>


서진달의 가세는 유학 생활이 끝나갈 무렵 불행히도 급격히 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국 후 그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1942년 만주로 이주하여 하얼빈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이 해 조선미전에 <정물>(1942)을 발표했으며 이듬해인 1943년에는 하얼빈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개인 소장의 <남자초상>(1940년대)은 비록 소품이기는 하나 1940년대에도 그가 기량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생기 있는 인물의 얼굴은 <나부입상>의 얼굴 표현과 상당히 유사하다.


해방 이후 서진달은 국내로 돌아와 미술연구소를 열어 작업과 교육을 병행했으나, 몇 해 지나지 않은 1947년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우리 근대 미술의 숱한 요절 작가 중에서도 가장 아깝게 생각되는 인물 중 한 명이지만, 많지 않은 현존 작품 가운데 그의 실력이 살려져 있는 것이 여럿 남아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세 점의 현존하는 누드화에서 볼 수 있듯이, 누드를 비롯한 인물화는 그의 득의의 영역이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누드 소재를 다루는 데 있어서 그의 업적은 인체의 탐구라는 일차적인 목적의 달성은 물론, 거기에 덧붙여 대상 인물의 얼굴에 표정과 생기를 더해 인물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성공한 가장 대표적인 작가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누드 소재 작품으로는 이 밖에도 <나부>(1930년대)와 <누드>(1938) 등이 남아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치는 작품들이라고 생각된다.




1) 윤범모, 『한국 근대미술의 형성』(미진사, 1988), 237쪽.

2) 위의 책, 234쪽.

3) 위의 책, 236~237쪽.

4) 장평화, 「대구 근대화단 연구: 영과회와 향토회를 중심으로」(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도36~40 참조.


도판 출처:

1) 서진달, <나부>: 『조선미술전람회도록』에서 가져옴

2) 서진달, <나부입상>: 대구미술관 홈페이지

3) 서진달, <나부>: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4) 서진달, <나부>: 네이버 지식백과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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