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 열두 개의 변주 (5)
처음에 이 작품을 보는 이들을 경탄케 한 것은 기술적인 숙련도였다. ㅡ미묘한 명암 배합, 정교하게 그려진 입술, 눈, 손 그리고 그 모두의 구성적 조화 등 기술적 숙달이었다. 그러나 이 초상화의 신비한 힘, 즉 보는 이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마술적인 힘을 형식적인 수단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월터 페이터는 이렇게 찬미의 시구를 읊조렸다: "그녀는 자신이 앉아 있는 바위들보다 더 오래되었다. 흡혈귀처럼 그녀는 여러 번 죽었었고 무덤의 비밀을 배웠다……" 그가 <모나리자>를 트로이의 헬렌의 어머니인 레다,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와 동격으로 생각한 것은 20세기에 와서 <모나리자>의 그림엽서에 수염을 그려 넣고 그림 아래에 외설적인 글귀를 적어 놓은 뒤샹의 반응과는 사뭇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ㅡ낭만주의 시대의 페이터와 그녀의 명성을 손상시키는 것이 예술에 대한 극단적인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던 회의적인 시대의 뒤샹ㅡ그녀가 레오나르도뿐 아니라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하나의 도상으로 남아 있음을 인정하였던 것이다.(주1)
데이비드 파이퍼가 제시하고 있는 두 번째 주제는 인간의 얼굴이다. 첫 번째 주제인 인간의 형상, 즉 신체가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기본적인 재료 역할을 한다면, 여기에 이어지는 주제인 인간의 얼굴은 보다 직접적으로 그 인간의 성격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신체와 얼굴 모두가 이 두 가지 역할을 아울러 갖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신체에 비해 얼굴이 그 인간의 성격을 보다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부위라는 것만은 대체로 맞는 것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이 대목에서 데이비드 파이퍼는 인물화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초상화와 자화상을 중심으로 설명을 이어 나가고 있다. 그는 미술의 모든 주제 중에서 초상화법이야말로 '보존될 수 없는 것을 보존하려는 시도, 즉 한 개인의 죽음을 부정하려는 가장 통절한 시도'였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는 인물화 중에서 초상화만이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독 초상화에서 가장 강조되는 몇 가지 특징들을 가리켜 준다. 즉 초상화는 인물화의 어떤 장르보다도 자신이 표현하는 대상을 실재하는 특정한 누군가로 못박아서 그려지는 것이고, 또한 해당하는 대상을 자신의 작품의 이미지로서 영영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품은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초상화가 대상을 각인시키려는 의도를 품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그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소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고대의 초상화는 이상화된 이미지를 담은 국가의 공식적 초상화, 모델의 특징을 사실대로 상세히 묘사한 초상화, 그리고 풍자적 초상화의 세 가지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초상화에서 인물을 각인시키는 두 개의 극단적인 목적, 즉 위엄의 목적과 비하의 목적을 볼 수 있다. 위엄 지향의 초상화에서 대상이 되는 인물을 위인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비하 지향의 초상화에서는 반대로 그가 얼마나 천박하고 비난 받아 마땅한 사람인가를 폭로하기 위해 골몰한다.
위엄 지향의 초상화는 고대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우리는 가령 서구의 나폴레옹에서 중국의 주원장에 이르는 여러 이름들을 떠올리게 된다. 미화된 초상화에 대한 요구는 대체로 정부의 관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많고 따라서 미술사의 흐름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경우도 많다. 나폴레옹 시대를 비롯하여 대정변 이후 프랑스 미술계에서 여당 대표 비슷한 노릇을 했던 다비드는 좋든 싫든 이 방면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일 것이다. 그의 적지 않은 작품은 소위 정치적인 미술을 오늘날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 항상 고민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이 미적인 뛰어남과 노골적인 시의성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비드 작품의 정치적 방향성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 그의 정치 성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걱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엄 지향과는 대척점에 서는 비하 지향의 초상화는 처음부터 비주류를 자처하고 등장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이러한 작품들은 만화와 같은 예외적 성격의 장르에서 발달한 사례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주류에 가까운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비하 지향의 초상화를 제작했던 극히 드문 경우의 대표주자로 우리는 고야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비드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그는 스페인 왕실의 초상화를 제작하면서 권위만 있고 위엄은 없는 초상화를 그림으로써 자신 딴에 품고 있던 불만을 표출했다. 고야의 소위 저항정신을 오늘날 좋아하는 이들도 많지만, 그의 왕실 초상화에서 드러나는 윤리 의식을 넘어서는 악의는 그를 귀감으로 이야기하기를 꺼리게 만든다.
위엄 지향과 비하 지향의 초상화는 초상화에서의 각인 의도가 왜 강조되는 것인지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유형 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있는 초상화의 세 번째 유형은 있는 그대로에 입각한 사실성을 추구하는 초상화이다. 국가 주도에 의해 제작되지 않은 초상화들 중에는 이를 볼 수 있는 사례가 적지 않다. 대상 인물 자신을 위해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 초상화 제작의 특성상, 비하 지향의 초상화가 만화와 같은 예외적 장르를 중심으로 그려져 온 것을 참작한다면, 기실 본격적 초상화에서는 이러한 소탈한 초상화와 위엄 지향의 초상화의 두 부류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초상화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식을 벗어나, 위엄의 초상화의 상대편에 있는 개념으로 설정된 비하의 초상화는 별격의 위치로 옮겨 놓고, 그 자리에 평범 또는 친근함의 초상화의 개념을 놓는 것이 보다 유리하다고 생각된다. 데이비드 파이퍼가 그의 글에서 다비드의 나폴레옹 초상화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작품으로 예시하고 있는 것은 루벤스가 후일 그의 처제가 되는 이를 그린 것으로 알려진 <수잔나 룬덴의 초상>이다. 그의 설명을 따른다면 루벤스는 그를 '다정하고 명민하며 삶에 열중하는' 인물로 그리고 있으며, 나폴레옹의 초상화처럼 '자세나 주위 환경은 권위적이'지 않다. 우리는 서구의 초상화에서 위엄의 초상화만큼이나 이와 같은 친근한 초상화들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런 작품들은 위엄의 세계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대상을 각인시키려는 방향성을 추구하고 있다.
한편, 역시 있는 그대로의 표현과 소탈한 분위기를 추구하면서도 감정에 있어서는 <수잔나 룬덴의 초상> 계열과는 정반대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그러니까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도의 겸허함과 정직성을 보여주려 함으로써 약간의 추함까지 내보이려는 경향이 짙은 초상화의 유형이 바로 자화상이다. 근대에 들어서기 이전까지 이러한 추구는 거의 자화상에서만 가능했는데, 이는 물론 자화상에서는 대상을 추하게 표현한다고 해도 해당 대상이 그것을 용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화상은 어떤 초상화보다도 내면적 정직성을 추구할 수 있는 영역이다. 여기서 내면적이라는 말은 허심탄회 또는 기탄 없음이라는 말로 바꿔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자기 과시의 극치에 가까운 자화상을 그렸으면서도 동시에 나체의 자신을 가감 없이 스케치했던 뒤러의 사례를 언급하고 난 뒤 그는 유명한 렘브란트의 작품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한 자화상들 중에서 가장 폭넓은 예는 렘브란트의 작품이다. 그의 자화상은 자신의 일생에 걸친 이미지들을 연속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특히 그의 마지막 10년간은 어둠 속에서 생명의 빛을 발하다가 드디어는 마지막 어둠으로 흡수되어 버리는 모든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자기 자신을 통해 드러냈다. 미천한 육체에 영혼의 불꽃을 피웠던 그의 능력과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주2)
렘브란트로 대표되는 내면 추구의 산물로서의 자화상은 근대에 들어와서는 '자신의 불안정하지만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입증하려는' 듯한 고흐의 자화상과 거의 자학적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는 코코슈카의 자화상으로 이어진다. 인물을 거의 통렬하게 반성적으로 그리는 방식은 근대 이전까지는 풍자화를 제외하면 사실상 자화상에서만 주로 이루어지던 것이었으나, 앞서 말했듯이 근대 이후의 변화는 본격적인 초상화로까지 그 영역을 넓히게 했다. 현대의 많은 초상화에서 인물의 얼굴은 왜곡되고 뒤틀리기 십상이지만, 그것은 그를 윤리적으로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의 상황을 보다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표현되는 것이다.
요컨대 서구 자화상의 걸작들은 위엄보다는 친근함과 소탈함을 추구하고, 긍정적 힘을 지닌 아름다움보다는 약간의 추함을 용인하는 내면의 정직함을 추구하는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위엄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내면의 정직함을 추구하는 초상화는 성립할 수 없을까?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우리나라의 초상화들이라고 생각된다. 서구에도 물론 위엄과 내면적 깊이를 동시에 갖춘 초상화들은 많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식에서 보듯이 서구에서 위엄의 초상화는 곧잘 미화와 허영의 위험성을 갖춘 것이기도 했다. 한국의 초상화가 쌓은 업적은 바로 이 위엄이 허영으로 바뀔 수 있는 요소들을 누구보다도 멀리함으로써 얻어진 옥 같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의 초상화는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초상화의 전반적인 양식을 공유하는 특징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의 초상화는 대체로 현실적 상황의 인간보다는 초상화 속의 공간을 상정하여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초상화가 인물의 가장 객관화된 모습을 담아야 한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배경 묘사를 되도록 생략하고 조명효과를 쓰지 않는다는 점, 또 단정한 옷차림과 정적인 자세를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 등의 특징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초상화적 공간에 대한 강령에의 철저함은 동아시아 중 한국에서 가장 완강하게 고수되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적지 않게 시도된 초상화와 풍속화, 역사화 사이의 중간적 성격의 인물화가 한국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초상화의 제작 이유였던 첨배를 비롯한 모심의 목적을 최대한 벗어나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다.(주3) 초상화가 첨배의 목적으로 그려질 때 거기서의 인물은 해당 대상의 생애 전체를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세속적인 허드레를 전부 걷어내어 그의 모습 또는 그의 정신 하나만이 남은 것에 가깝다. 따라서 물건이나 자세 등에서의 상황적 요소는 대상의 압축적, 객관적 표현을 저해하게 만드는 허드레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러한 확고한 의식은 조선조의 초상화를 양식적으로는 변화하면서도 구도나 자세 등의 거시적인 특징에 있어서는 거의 한결같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완강함은 한편으로 한국 초상화의 미덕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음도 사실이다. 한국 특유의 강경한 초상화적 강령은 그것을 위엄을 갖추면서도 미화로 타락하지 않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가령 몇 해 전에 출간된, 의학계에 종사하다가 미술 연구에 뛰어든 분의 책에서도 그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연구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것은 <홍진 초상>, <오명항 초상>, <송창명 초상> 등 피부 질환을 가진 이들의 얼굴 표현이 일체의 가감 없이 반영되었다는 점이다.(주4)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사람들이 초상화의 대상 인물이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다 해서 그것을 지우는 것은 미덕이 아닌 악습에 가까우며, 그것을 그대로 표현한다고 해서 그의 인품을 표현하는 데 전혀 방해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이렇듯 초상화에 대한 가치관이 대단히 엄숙했기에,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의 초상화에서 위엄의 지향과 내면성의 추구는 불화할 위험이 없었고 오히려 완전히 같이 가는 것이었다. 서구에서 내면적 자화상이 초상화의 흐름에서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과는 달리, 우리 쪽에서 초상화와 자화상이 거의 함께 발전했던 것도 이러한 우리 초상화 특유의 성격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가령 강세황의 자화상들과 이명기의 강세황 초상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비슷한 경지를 이루고 있음을 떠올릴 수 있다. 일견 딱딱해 보일 수 있겠지만 이와 같은 현상은 조선조의 가치관에서 초상화와 자화상의 방향성이 거의 같은 것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초상화에 대한 강령은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꾸준히 이어지고는 있으나, 후기에서 말기로 가면서 조금씩 세속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는 인상을 준다. 인물 표현에서의 음영법 구사의 보편화나 인물 주변에 물건을 그리는 사례가 점점 늘어난다는 점에서 이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중 인물 표현의 경우 반드시 세속적이라는 말로 지칭될 성질의 것은 아니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점들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18세기 이후 점점 더 실감 있는 표현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이명기의 작품들에 이어 제작된, 19세기 전반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 하나인 이재관의 <강이오 초상>은 얼굴 표현에서 윤곽선의 모호함을 최대한 추구함으로써 인물의 실감을 극대화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 작품이 유명한 것은 동시대의 다른 초상화에 비해서도 더욱 극단적으로 선의 해체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재관 이후 19세기 중후반에 활약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화가는 이한철이다. 그는 이재관의 작품만큼 극단적인 실감을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18세기 이후의 화풍을 훌륭히 계승해 뚜렷한 인정을 받았다. 삼분의 일 가까이 소실된 채로 남아 있는 <철종 어진>(1861)을 비롯해 <조인영 초상>과 <김정희 초상>, <이유원 초상>, 또 1869년과 1880년에 걸쳐 다섯 점이 제작된 <이하응 초상>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는 <고종 어진>(1872)의 제작을 주관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왼쪽 사분의 일 부분만이 남아 있다.(주5)
이한철 자신이 그랬다시피 그를 비롯한 조선시대 인물화의 정석적 화풍은 19세기 후반까지 단절 없이 이어지고 있다. <허전 초상>, <신헌 초상>을 비롯해 이후 19세기 최후반기의 <이재면 초상>(1880), <신정희 초상>(1895) 등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점은 우리 인물화의 흐름을 살펴보기에 앞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선 말기의 초상화를 생각할 때 흔히 채용신의 개성적 업적을 먼저 떠올리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미 50대에 접어들 무렵이라고는 하나 화원 출신이 아니었던 채용신이 조석진과 함께 어진 관련 작업에 참여하는 것은 1900년대에 와서의 일이고, 그의 남아 있는 대표작 또한 거의 대부분이 20세기의 작품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전인 19세기 후반까지의 인물화에서는 이한철을 필두로 한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 화가들의 작업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물론 사적(私的) 인물화로까지 영역을 넓힌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주류적 위치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물화의 역사에서 채용신은 대단히 개성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화가이다. 그것은 그의 위상이 대표성과 예외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데에서 기인한다. 기존의 초상화풍의 주류가 해체되어 가는 20세기 초반의 상황에서, 그는 조선시대 초상화와 근대 초상화 모두에 걸치면서 그 중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화풍은 독창성을 띠는 것이어서 동시대에 그와 닮은 화가를 찾기 어렵고, 따라서 그는 우리 인물화의 흐름에서 마치 섬처럼 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채용신은 19세기 후반부터 화가로서 이름이 알려졌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거의 대부분이 20세기에 접어든 50대 이후의 소작이다. 그가 44세 때 그렸다는 글씨가 적혀 있는 자화상의 도판이 남아 있으나, 이 작품은 화풍으로 보아 노년기에 다시 그린 것일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그의 명성이 확고해진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1900년대에 들어서부터라 할 수 있다. 그는 1902년에 공식적인 <고종 어진>을 제작했지만 이 작품은 남아 있지 않고, 대신 사적으로 제작된 고종의 초상화가 세 점이 남아 있다. 이 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작품은 비교적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되지만 역시 그 성격이 공식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이 작품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기를 꺼리게 만드는 것 같다.
이 시기의 그의 실력은 일련의 지사(志士) 초상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유명한 털모자를 쓴 <최익현 초상>(1905)과 모덕사에 소장된 <최익현 초상>(1909)을 비롯해 반신상의 <전우 초상>(1911), 그리고 <황현 초상>(1911) 등은 그의 대표작이다. 이 중 <황현 초상>의 경우 사진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영향관계가 알려져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위의 작품들을 비롯해 <임병찬 초상>(1905), <궁인성 초상>(1913), <기우만 초상>(1916) 등은 채용신의 실력이 뚜렷하게 발휘된 뛰어난 작품들이요 자칫 암울했던 시기가 되기 쉬웠을 20세기 초반의 우리 인물화를 너무나 풍성하게 만들어 준 통쾌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채용신 화풍의 독특함은 가령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유인석 초상>과 비교해 보면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을 그린 화가는 조규환이라는 인물인데 그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유인석 초상>에서 구사된 얼굴 표현은 앞서 <신정희 초상> 등에서 구사된 방식을 거의 계승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주름과 귀, 코 등에 뚜렷한 윤곽선을 긋고 이를 중심으로 음영을 표현하고 있다. 채용신은 훨씬 실감을 추구하고 있다. 가령 <최익현 초상>에서 그는 콧대를 한 개의 뚜렷한 윤곽선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귓바퀴나 주름의 표현 역시 농담을 더욱 정교하게 쓰고 있음이 엿보인다.
이러한 시도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사진의 본격적 도입을 비롯한 근대 문물의 장점을 그가 적절하게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주6) 사실 이 당시 초상화에서의 근대 문물 수용은 전반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던 것이며 채용신만의 독보적인 업적은 아니다. 그 또한 무비판적으로 사진술 등을 이용했다면 그의 업적은 그다지 뚜렷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을 구본신참의 논리로써 받아들이고 있다는 데에 그의 강점이 있다. 가령 그는 사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나 원본 사진에 적용된 서구적인 조명 효과를 배제하여 전통 회화의 논리로 음영을 구사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가령 영조 시절의 조영석이 그랬던 것처럼 화원 출신이 아닌 인물화가였고, 과거의 정석과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전된 그의 화풍은 더러 단점으로 이어진 면도 없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예컨대 그는 19세기 말까지 주류적이었던 초상화에서의 이상적 비율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고, 이는 일부 작품에서 불균형하거나 왜소해 보이는 체구로 이어지곤 했다. 또 19세기에 들어서 점차 확대되던 보조 사물의 접목이 채용신에 와서는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나쁘게 말하면 작품의 비속화에 기여한 측면마저도 없지 않다. 채용신은 이후 1930년대까지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지만, 지나친 대중화 등으로 인해 이전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수작의 비율이 높지 않음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1) 데이비드 파이퍼 외, 손효주/유시주/양건열 역, 『미술의 이해』(시공사, 1995), 28쪽.
2) 위의 책, 32쪽.
3) 조선미, 『초상화 연구』(문예출판사, 2007), 95~116쪽 참조.
4) 이성낙,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눌와, 2018) 참조.
5) 『궁중서화 2』(국립고궁박물관, 2019), 104~107쪽.
6) 변종필, 「채용신의 초상화 연구」(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130~168쪽 참조.
사진 출처:
(1) <이재면 초상>: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2) <신정희 초상>, <임병찬 초상>, <기우만 초상>: 네이버 지식백과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