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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연 Oct 11. 2022

2. 인간의 얼굴 (2)

한국미술, 열두 개의 변주 (6)

인물화의 비속화와 그 탈출


활동 기간이 다소 겹치기는 하나 채용신 이후 우리 초상화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기고 있는 화가는 김은호이다. 젊은 시절 화단의 주류로서 어진 작업의 경험이 있는 안중식, 조석진에게서 발탁되었던 그는 일찍이 인물화에서의 재능을 인정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1910년대 이후 다수의 어진 관련 작업에 참여했다. 현재 절반 가까이 남아 있는 <순종 어진>(1928)은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전체적인 구도와 복식은 비교적 전통을 따르면서도 얼굴에만은 사진과 같은 표현이 가미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조석진과 안중식이 제작한 황태자 시절의 <순종 어진>(1902)와 비교해 보면 그 변화를 느낄 수 있다.(주1)


인물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으면서 김은호는 1910년대 이후 각계 인사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어진을 제외한 작품 가운데 <민영휘 초상>(1910년대)이나 <이종건 초상>(1923)과 같은 작품은 그의 실력이 십분 발휘된 수작이 아닐 수 없다. 얼굴 묘사가 정확함과 함께 음영의 도입 역시 과하지 않아 전통적 초상화의 묘미를 충분히 계승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종교계 인사인 김연국의 요청으로 제작한 <최제우 초상> 및 <최시형 초상>(1915) 또한 이 시기의 유명한 작품이다. 제작 경위의 세속성 탓인지 복식과 배경 묘사에 다소 번잡한 감은 있지만 얼굴에서만큼은 역시 그의 실력이 충분히 발휘되어 있다.


명사들에게서 주목받았던 김은호의 새로운 초상화풍은 그러나 반복하건대 역시 그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초반의 초상화에서 사진의 참고와 같이 근대적 문물의 도입을 통해 극도의 실감을 추구한 것은 채용신이나 김은호와 같은 특정 작가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아니며, 이를 비슷한 시기의 다른 여러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은호의 경우와 비슷한 화풍을 추구하고 있는 또 다른 작품으로 가령 작가 미상의 <김병국 초상>을 들 수 있다. 김병국은 1905년에 사망했지만 함께 그려진 부인 초상에서의 복식으로 보아 제작 시기는 그의 사후로 추정된다.(주2) <김병국 초상>은 특히 정자관의 묘사에서 잘 드러나다시피 같은 시기 김은호의 초상화에 비해서도 더욱 극단적인 실감과 적극적인 명암을 추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선암사에 소장되어 있는 승려 익운의 초상 역시 이와 유사한 경향을 보여준다. 같은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승려 두운의 초상이 1917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 이 작품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주3) 이들 초상화의 작가인 최광익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후 수덕사에 소장된 승려 만공의 초상 등을 역시 비슷한 화풍으로 남기고 있다. <김병국 초상>의 화가나 최광익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20세기 초반이 되면 이렇듯 김은호 이외에도 그와 같은 새로운 화풍의 인물화가가 여럿 등장하고 있다.


김은호의 <민영휘 초상>과 작가 미상의 <김병국 초상>


근대 초상화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그러나 한편으로 비속화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주의풍의 얼굴 표현은 도입 당시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면도 없지 않지만 한편으로 나쁘게 보면 그 이후에 진행될 계속적인 세속화의 빌미처럼 느껴지는 면도 없지는 않다. 얼굴 표현의 변화 이후 초상화는 점차 소재의 세속화, 배경의 세속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초상화적 공간'이 현실적 공간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다소간에 김은호는 이러한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가장 대표적인 화가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훗날 미술계 일각에서 전통회화의 '변질'을 성토하고자 할 때 그를 잠재적인 우두머리로 설정하게 만들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김은호는 미인화를 비롯한 세속적인 인물화 장르로 자신의 영역을 확대하기 시작한다. 그는 새로운 소재와 표현의 습득에 매우 적극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이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김은호의 가장 큰 미술사적인 공로는 초상화 이외의 인물화에서 사실주의적 화풍을 부활시켜 이를 활성화시켰다는 데에 있다. 그는 특히 당시의 일본 회화를 많이 참고하여 실물 크기에 가까운 새로운 미인화와 풍속화를 다수 제작했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음을 뜻하기도 했다. 가령 그의 미인화 가운데 <간성>(1927)과 같은 작품은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되지만 이와 같은 소수의 명작을 제외하면 <미인승무도>(1922) 이후 말년까지 그려진 수다한 미인화 속 인물들의 표정은 어색하기 그지없다는 인상을 준다.


이렇듯 초상화 바깥의 장르에서는 많은 범작을 담기고 있지만 이후 노년기에 제작된 역사인물 초상화만은 여기에서 예외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된다. <의기 논개>(1955)를 비롯해 <신사임당상>(1965), <이율곡상>(1965)과 같은 작품은 청년기의 기량을 방불케 하는 완성도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청년기 초상화가 가지고 있었던 인물의 담백한 기품 표현이라는 장점과 이후 다양한 인물화 제작을 통한 연마에서 얻은 새로운 기량이 이 작품들에 와서는 합일되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의기 논개>의 경우 종전의 미인화가 가지고 있던 다소 가벼운 분위기를 완전히 씻어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작품은 진주의 논개 사당에 영정으로 걸렸다가 이후 고증 문제로 인해 교체되기는 했지만, 작품 자체로서의 완성도는 매우 높다.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구성, 단정한 옷차림과 한 손을 뒤로 돌린 자세에서 오는 당당한 기백의 형상화, 과한 느낌을 주지 않는 적절한 색감의 구사는 전통적 초상화의 정신성과 미인화 제작에서 얻은 이상적인 인간형의 완전한 합일을 보여준다. 일각에서 이 작품을 두고 과거 자신의 <춘향도>와 같은 작품을 변형한 것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린 바도 있지만 작가의 발전적 과정을 삐딱한 시선에서 본 폄훼의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가령 시의 세계에서 글자 하나의 차이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격언을 떠올릴 수 있다. 어깨의 품과 자세만 놓고 보더라도 <춘향도>와 <의기 논개>는 차이를 지닌 작품이며 이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서 미술작품을 보는 안목이 결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은호 이후 많은 동양화가들은 인물화의 변화 추세에 따라 초상화에서만 쓰이던 사실주의 지향을 풍속화를 비롯한 다른 장르에 접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허다한 범작을 낳게 된다. 근대 초기의 인물화에서 마치 마네킹처럼 작위적인 자세와 표정 없는 얼굴을 가진 작품들이 많은 것은 곧 이러한 시행착오의 결과물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적인 자세를 벗어나 낯설기 쉬운 동적인 상황을 표현하려다 보니 인물의 동작은 뜻과는 다르게 이상해지고, 상황적인 표정을 설정하는 것 또한 어렵다 보니 천편일률적이거나 과장된 얼굴이 쉽게 등장하는 것이다. 과거의 전통과 비교해보았을 때 이러한 결과는 물론 쇠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실패만 하라는 법은 없기 마련이다.


김중현의 <실내>와 최근배의 <암향>


1930년대 후반이 되면 김은호의 세대에서 도입된 새로운 인물화 양식도 거의 자리를 잡아가면서, 마침내 자연스러운 자세와 표정을 지닌 완성도 높은 인물화의 등장을 보게 된다. 김중현의 <실내>(1940)와 최근배의 <암향>(1942)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192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발표한 김중현은 동양화와 서양화 모두에 기량을 발휘하는 특이한 작품세계를 보이고 있다. 그는 특히 인물화에 두각을 발휘하여 <춘양>(1936)과 그 전초 작품인 같은 제목의 <춘양>(1931)을 비롯해 <춘야>(1933)나 <정(庭)>(1937) 등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인물화를 꾸준히 발표했다. 다리미질을 하는 여인을 그린 <실내>는 작품의 구도나 인물의 표현에 조금의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는 뛰어난 작품이다. 특히 인물들의 표정이 어색한 티가 있는 <춘양>에 비해 훨씬 자연스러워진 것을 볼 수 있다.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의 표정은 작품의 서정적 분위기를 돋우는 데 기여하고 있다.


193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최근배는 조선미술전람회에 <탄금도>(1940) 등의 인물화를 발표하였으며, 이후 <농악>(1942)과 함께 <암향>(1942)을 발표하고 있다. 그는 인물의 다른 부분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나무랄 데가 없지만 표정에서는 대체로 어색한 부분이 보이는데, <암향>에서만은 충분한 자연스러움을 보여주고 있다. 두 폭 가리개 형식인 이 작품은 왼쪽에는 대금 같은 것을 부는 사내를, 오른쪽에는 꽃나무를 바라보는 소년을 배치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도는 일본 회화로부터의 직접적인 영향을 짐작케 한다. 눈을 감고 악기를 부는 사내의 표정은 전혀 어색하지 않으며 역시 작품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고 있다. 김중현처럼 최근배 또한 동양화와 서양화를 모두 시도했으나 주로 동양화 쪽에 그의 수작이 몰려 있다.


이들을 비롯해 같은 시기의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 등은 모두 각자의 시행착오를 거쳐 1940년대 초반이 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인물화에 이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들의 성공은 김은호 세대에 도입했던 새로운 시도가 거시적 안목에서 보았을 때 반드시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모든 사조나 양식이 그렇듯이 일본 회화 양식의 수용 또한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보다는 보다 복합적인 고려를 통해 이해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서양화에서의 얼굴


근대 이후 서양화단 역시 초상화를 중심으로 인물화의 도입과 발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초기의 서양화가 중의 한 명인 이종우는 도입기 당시의 서양화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인물화일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주4) 당시 서양화의 수요가 사실상 초상화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당시의 척박한 풍토를 그대로 증거해 준다. 수요가 있었다고는 하나 서양화의 도입이 이제 막 이루어지던 상황에서 섬세함을 요구하는 얼굴의 표현은 완성되는 데 일정 동안의 수련기를 갖게 했다.


초기 서양화의 얼굴 표현에서 가장 뚜렷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화가는 이종우이다. 그는 프랑스 유학 시절 제작한 <응시>(1926), <인물>(1926), <모부인상>(1927) 등을 통해 사실적 얼굴 표현의 첫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모부인상>은 이종우 자신의 이후의 작품과 비교하더라도 그의 인물 표현 역량이 가장 잘 발휘되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얼굴은 물론이고 쇄골, 팔 근육, 손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깔끔하면서도 정확한 처리는 그가 사실적인 기초를 충분히 습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인물을 거칠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 당대의 다른 화가들에게서 찾아지기 어려운 미덕이기도 했다.


귀국 이후 이종우는 자신의 말마따나 초상화를 주로 남기고 있지만 유학 시절 작품만큼의 뚜렷한 기량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인 초상>(1930)을 비롯해 <청전 초상>(1934), <우인초상>(1935) 등의 몇 점은 이 시기의 그래도 괜찮은 작품으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이종우와 비슷한 시기에 유학한 화가로서 인물화에서 독특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또 다른 화가로는 배운성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유학파 화가들이 몇 해 안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과는 달리 그는 거의 이십 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외국에서 활동했는데, 이는 그에게 있어서는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배운성은 당시로서는 거의 이질적일 정도로 깔끔한 필치를 구사하고 있으며 이는 그의 작품을 대단히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그에 비해 사실적이지 못한 구도와 인물들의 다소 어색한 자세는 아쉬운 측면에 해당한다.


유학 시기 그의 현존 작품들은 거개가 인물화로써, 특히 서양화의 주제를 동양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자화상(무당)>을 비롯한 몇 점의 자화상과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 등의 초상화를 남기고 있는데, 이 작품들은 사실적인 얼굴에 비해 손의 포즈 등에서 거의 억지로 자세를 지은 듯한 어색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애석하게도 장점에 비해 단점이 승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소재 사용을 절제함으로써 군더더기 없는 완성도를 보여주는 <화가의 아내>가 그래도 그중 가장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이 즐겨 쓰던 소재를 절제한 작품에서 가장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그의 작품세계에서 일종의 아이러니를 빚고 있다.


배운성은 한편으로 비슷한 시기에 총 17명에 달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가족도>를 제작하고 있다. 이 작품 속 거의 모든 인물들은 기이할 정도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 마치 17세기 유럽의 집단 초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을 준다. 대가족 속의 서로 닮은 듯 미묘하게 다른 얼굴들을 포착하고 있는 이 작품은 그의 장점과 단점이 극대화되어 특이한 매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종우의 <부인초상>과 배운성의 <화가의 아내>


이종우와 배운성의 위와 같은 부분적인 성과를 제외하면 서양화 역시 1920년대 이후 한동안은 범작 위주의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1930년대 무렵이 되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얼굴 표현을 보여주는 작품과 작가가 여럿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화가로서보다는 평론가로서의 업적으로 더 많이 기억되는 편인 윤희순은 조선미술전람회에 몇 점의 평범한 인물화를 발표한 바 있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도판만으로는 매력을 느끼기 어렵지만 이 중 <소년>(1927)의 경우만은 상당히 예외적이다. 이 작품은 머리를 짧게 깎고 단정하게 앉은 소년이 완전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거의 도전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정직한 시선이 눈길을 끈다.


이 시기의 인물화의 발전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화가 중의 하나로 정현웅을 꼽을 수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그는 30년대 이후 <기대앉은 여인[凭座]>(1931), <단발머리[オカッパ]>(1932), <춘자(春姿)>(1936), <대합실의 일우>(1940) 등의 여러 인물화를 발표하고 있다. <기대앉은 여인>이나 <단발머리>는 인물의 개성이 잘 살려져 있어 그의 실력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라고 생각된다. 인물화에서 기량이 떨어지는 화가는 얼굴을 표현할 때 마치 모든 얼굴의 평균값을 낸 듯한 이도 저도 아닌 얼굴을 그리기가 쉬운데 이 작품들은 그와는 대척점에 있다. 또 <대합실의 일우>는 차를 기다리는 동안의 지루함이나 피곤함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어 흔치 않은 실감을 보여주고 있다. 정현웅의 현존작으로는 <소녀상>(1928)이 알려져 있는데 그의 초기 작품의 기량을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정현웅과 비슷한 시기에 인물화를 발표했던 또 다른 화가는 최연해이다. 그의 <T양의 상[T孃之像]>(1939)은 당시의 전신상으로서는 얼굴 표현에 주안점이 두어져 있는 흔치 않은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는 <조모의 상>(1933), <여인상>(1938), <유노인상>(1943) 등 일견 평범해 보이면서도 지루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인물화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박영선은 그의 초기에 <소녀좌상>(1934)과 같은 극히 소박한 인물화를 발표한 바 있다. <소녀좌상>은 굵은 필치와 경직된 듯 단정한 분위기가 특징을 이루고 있어 뒷날의 그의 인물화의 스타일을 예고한다는 인상을 준다. 오랜 기간에 걸쳐 활동한 그는 해방 이후에도 다수의 인물화를 남기고 있으나 초기의 필치가 거의 기하학적으로 변하면서 더욱 경직된 표현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매력이 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나 반대로 너무 어색하게 되어버린 경우도 없지 않다.


<격자무늬의 옷을 입은 여인>(1937) 등의 작품을 남긴 사실 이외에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은 이갑경은 비슷한 시기 <자화상>(1936)을 발표하고 있다. 안경을 쓴 여인이 도전적인 시선으로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는 이 작품은 마치 소위 신여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당시의 인간상의 한 이미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사료적 가치는 빛나고 있다고 하겠다. 이갑경은 이후 <휴게[憩び]>(1938)와 같은 작품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으나 이후의 활동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민영규의 <병후의 초상>


끝으로 언급해 두고자 하는 작품은 민영규의 <병후(病後)의 초상>(1936)이다. 이 작품의 작가가 사학자 민영규와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인지, 아니면 동일인인지 현재로서는 확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같은 인물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극작가 유치진은 1938년의 한 글에서 춘향전의 일본 공연을 앞두고 연희전문학교 학생인 민영규로부터 의상과 소품의 디자인 열몇 장을 얻었다는 언급을 남기고 있다. 민영규의 디자인을 두고 그는 '고증적으로나 무대 미학적으로나 가장 훌륭한 참고품이었다'고 말하고 있다.(주5) 뒷날 사학계에 투신하게 되는 연희전문학교 학생 민영규는 당시 정인보의 문하에서 한국사와 한국복식사를 배우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주6) 같은 시기에 연극의 무대미술과 같은 다른 분야에도 더러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청년 시절의 민영규는 사학을 전공으로 하면서도 한편으로 미술 쪽에도 흥미를 느꼈던 것이 엿보인다. 그가 당시 24세이던 1938년에 유치진에게 미술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기량을 인정받았던 점을 참작한다면, 22세이던 1936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그려 출품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리라고 보여진다.


비록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기는 하나, <병후의 초상>은 몇 가지 점에서 독특한 매력을 끈다. 서양식처럼 문양이 그려진 벽에 기대 서서 오른쪽으로 빛을 받아 그늘지면서도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인물을 가슴까지 클로즈업한 것이 이 작품의 내용의 전부이다. 이렇듯 단순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포즈와 배경을 통한 복잡한 구성이 가능한 전신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반신상은 영정 사진 같이 심심한 느낌을 주기 쉽다. 그래서 이 점이 작가들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반신상보다 전신상을 선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이갑경의 작품과 함께 반신상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개성적인 사례를 남기고 있다.


이 작품이 지루하지 않은 것은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함으로써 즉흥적 분위기를 가한 구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성적이면서도 정확한 인물의 표정 때문일 것이다. 병후의 초상이라는 제목은 작품 속 인물이 일시적인 열병 같은 것을 앓다가 나아진 상황에 있었음을 부연해 주는데 인물의 은근한 미소를 한층 의미심장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우리 근대미술에서는 제목이 작품에 줄 수 있는 효과를 지나칠 정도로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드물게 제목의 효과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1) 『궁중서화 2』(국립고궁박물관, 2019), 114~119쪽 및 120~125쪽 참조.

2) 『역사인물초상화대사전』(현암사, 2003), 514~517쪽.

3) 조선미, 『초상화 연구』(문예출판사, 2007)에서의 도198 참조.

4) 『중앙일보』(1971.8.26).

5) 『동랑 유치진 전집 8: 연극론/기타 3』(서울예대출판부, 1993),

6) 『조선일보』(1939.1.30).


사진 출처:

(1) 김은호, <민영휘 초상>: 『미술세계』(2007년 1월호)에서 가져옴

(2) <김병국 초상>: 네이버 지식백과 홈페이지

(3) 김중현, <실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홈페이지

(4) 최근배, <암향>: 대구미술관 홈페이지

(5) 이종우, <부인초상>: 『나혜석/이종우 외: 한국근대회화선집 양화 2』(금성출판사, 1990)에서 가져옴

(6) 배운성, <화가의 아내>: 매일경제 홈페이지

(7) 민영규, <병후의 초상>: 『조선미술전람회도록』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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