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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연 Oct 30. 2022

2. 인간의 얼굴: 황술조의 인물화 (3)

한국미술, 열두 개의 변주 (7)

앞서 다양한 작가의 인물화들을 살펴보았지만, 그러면서도 구체적으로 둘러보지 못한 영역이 아직 남아 있다. 바로 일그러지고 뒤틀린 인물의 모습이다. 데이비드 파이퍼의 글에서 다루어진 작품들 중에서는 현대의 서구 인물화들이 여기에 속한다. 여기서 일그러진 인물의 모습은 현실의 불안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특이한 미학은 우리 인물화의 전통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것이었다.


우리 근대 미술에 오면 이런 특이한 인물화를 시도한 일련의 작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이들로 황술조와 구본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앞서 1장에서도 이제창과 함께 언급한 바 있는 작가들이다. 이들은 야수파 등의 사조를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인 작가들로, 인물화를 비롯하여 특히 구본웅의 경우 정물 등 회화의 여러 장르에서 해체된 사물과 그로 인해 발휘되는 불안한 분위기를 시도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근대 미술의 가장 큰 과제가 사실적 또는 고전적 기량의 습득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기 때문에, 근대 미술의 초장부터 형식 파괴를 시도한 이들의 업적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유보감이 들어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 인물화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물화의 흐름에서 이들의 세계를 다루는 것 또한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황술조의 생애와 작품


이 중에서도 이 글에서 대표적인 작가로 다루고자 하는 인물은 황술조이다. 구본웅 역시 어떻게 보면 황술조보다도 더욱 실험적으로 나아간 인물화를 제작했다고 할 수 있지만, 가령 누드를 그린 <여인>(1930)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인물화는 대체로 인물 자체의 개성이 화풍에 묻히는 면이 없지 않다고 느껴졌다.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여인>(1930년대) 역시 그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오직 그와 절친했다는 소설가 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1935) 정도만이 이런 단점에 해당되지 않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구본웅보다는 두 살이 위인 황술조는 그에 비하면 조금은 더 현실성에 발을 걸친 작품을 남겼다고 생각되며 가령 풍경화의 경우 오히려 정갈하기까지 한 작품을 남기고도 있다. 그에 대해서는 몇 해 전에 경주 솔거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린 바 있으나 연구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고 본격적인 거의 최초의 논문도 불과 얼마 전에 나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그의 작품이 아주 없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1970년대에 20여 점의 작품과 30여 점의 작품 사진첩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는데, 이후 이 현존작들은 삼성에서 수집되었다고 한다.(주1) 또 그 이후에도 몇 작품이 더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1904년에 태어난 황술조는 1920년대 중반에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했다. 그는 부호 집안의 아들이었다고 하며 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곧잘 유학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귀국 후 1939년 요절하기까지의 10년 간이 그의 활동 기간이며 일시적으로 미술교사를 지내기도 했으나 유복한 탓에 내내 취미를 누리며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견 방탕해 보일 수 있는 일화와는 달리 그는 의외로 그냥 넘길 수 없는 작품을 여럿 남기고 있는데 그의 작가적 재능을 드러내 주는 일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쿄미술학교의 관행이 그렇듯이 그 또한 <자화상>(1930)을 남기고 있다. 이 <자화상>은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한국 작가의 자화상 중에서도 가장 개성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색은 고개를 한쪽으로 크게 틂으로써 생기는 불안정한 구도에 있다. 표현 또한 매우 생략적이며, 슥슥 그려서 극히 단순하게 처리한 배경을 비롯해 한쪽으로 거의 쓸어넘긴 머리, 가벼운 차림과 휘돌아가는 듯한 넥타이의 표현 등도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거울을 쳐다보는 듯한 작가 자신의 표정은 불안에 빠져 있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자화상은 불안한 내면을 표현했다기보다는 낭만적인 인간상을 표현한 인물화가 되고 있다.


황술조는 이 졸업 작품인 <자화상> 이외에 또 한 점의 <자화상>(1939)을 남기고 있다. 이 작은 자화상은 얼굴 이외에는 칠을 하지 않고 있어 미완성인 것 같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의 다른 작품인 <소년>(1930년대) 역시 같은 기법이 구사되어 있어 의도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기법은 비슷한 시기 이제창의 <자화상>(1926)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이 자화상은 무엇보다도 얼굴 피부를 표현한 색감이 뛰어나 그의 기량이 잘 발휘된 작품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황술조의 <자화상>과 <자화상>


도쿄미술학교의 졸업 이후 황술조의 작가 활동과 관련해서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해방 이전의 대표적 전람회였던 조선미술전람회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소신의 소산이라 할 수 있겠으나 삐딱하게 말하자면 권위에 신경쓰지 않아도 될 만큼 부유한 집안의 덕을 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서화협회전을 비롯해 국내의 그룹 전람회인 목일회전과 동미회전에서 작품을 발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중 시기가 가장 이른 작품으로 2회 동미회전에 발표한 <굴뚝[煙突]소제부>(1931)가 도판이 남아 있어 주목된다. 두 명의 굴뚝 청소부의 모습을 캐리커처처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참신한 소재로 호평을 받았다.(주2) 이후 1933년의 서화협회전에서는 <휴식>이라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이 작품과 관련하여 김기림이 '만화적'이라는 평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비슷한 화풍을 구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주3) 이후 1937년에는 목시회(목일회)전에 네 점의 작품을 출품한 것으로 적혀 있으나 역시 어떤 작품인지는 알기 어렵다.


<굴뚝소제부>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황술조는 극히 생략적인 필치 또는 왜곡된 표현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발휘해보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비록 도판만으로 보는 것이기는 하나 <굴뚝소제부>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어떤 유보감을 표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작품의 스타일은 가령 나혜석의 후기 인물화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는데, 이는 그들이 서구의 왜곡되거나 캐리커처화된 인물 표현에 영향을 받아 별로 좋지 않은 완성도로 구사했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그들의 노력과는 정반대로 그 결과물은 일반 그림보다도 더 대충 그린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황술조의 현존 작품을 보면 오히려 일반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작품에서 정갈한 완성도를 보게 된다는 인상을 준다. 1970년대의 작품 공개 당시 평자들이 가장 대표작으로 꼽았다고 하는 <연못>(1930년대)을 비롯해 <계림풍경>(1927)이나 <실내> 등 일련의 풍경화에서 그는 담백한 소품적 완성을 보이고 있다.


황술조의 <여인좌상>과 <쿠로코 2: 앉아있는 누드>


<자화상>이나 <굴뚝소제부> 등에서 쓰였던 황술조의 파격적 화풍은 그 밖의 다른 인물화에서도 시도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재학 시기의 작품인 <쿠로코[黑子] 2: 앉아있는 누드>(1926)를 비롯해 <여인좌상> 등의 작품이 그 사례이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의 표정은 우리가 앞서 보았던 다른 인물화들과는 거의 판이한 것을 볼 수 있다. 비슷한 사례로는 1장에서 언급했던 나상윤의 작품 속 인물 정도가 있을 뿐이다. <여인좌상> 속 인물은 삶에 찌든 것처럼 보이고, 작품의 모델을 서주는 것에도, 화가의 작업을 도와준 뒤 다시 생활로 돌아가는 것에도 모두 싫증을 느끼는 인물인 것처럼 느껴진다. 누드 작품 속의 모델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마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전혀 무감정한 것처럼 보인다.


<굴뚝소제부>가 지나친 의욕으로 인해 어설픈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 작품들의 경우 그래도 좀 더 어엿한 완성도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얼굴 표현의 파격을 제외하면 모든 부분을 너무나 빨리 그리고 있는 점은 단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풍경화에서 보여준 정갈한 완성도를 인물화에 접목시킨 작품이 남아 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이 작품들은 황술조가 전통적인 인물화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다른 독특한 인간상을 그리는 데 관심을 보이고 있었음을 가리켜 준다.


황술조는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채 10년도 되지 않은 1939년에 사망했다. 술을 좋아해 유족 중에는 그가 술병으로 사망에 이르렀다는 발언을 한 이도 있었다고 하며 작고하기 전에 문병 온 이에게 '술 좀 자그만큼 먹소' 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주4) 이듬해에 동료 작가들에 의해 서울에서 유작전이 열렸으며 당시 5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작가의 생애를 둘러보면서 알 수 있다시피 황술조는 요절 작가이고 자료도 많지 않으며, 현존 작품 또한 보석과 자갈이 섞여 있어 연구에 어려움이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작품들만 놓고 보더라도 그가 인물화에 있어서 독특한 가능성을 남긴 작가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는 피로와 무감정 속에 놓인 근대적 인간의 모습과 표정을 그린 초창기의 대표적인 작가였다.




1) 이구열, 「40년 만에 소생한 황술조」, 『청여산고』 1(에이엠아트, 2018) 참조.

2) 강정화, 「토수 황술조의 예술세계 연구: 1930년대 매체 비평문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62(2021), 332~333쪽.

3) 위의 글, 338~339쪽.

4) 윤범모,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미진사, 1988), 207쪽.


도판 출처:

1) 황술조, <자화상>: 경주신문 홈페이지

2) 황술조, <자화상>: 중도일보 홈페이지

3) 황술조, <여인좌상>: 대구미술관 홈페이지

4) 황술조, <쿠로코 2: 앉아있는 누드>: 경주솔거미술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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