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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연 Oct 04. 2022

1. 인간의 형상 (2)

한국미술, 열두 개의 변주 (3)

모델 소재의 보편화


척박한 시기의 화가들이었던 김관호와 김찬영 이후, 나혜석과 이종우 등으로 대표되는 1920년대의 화가들에 이르면 본격적인 서양화단의 성립과 함께 누드화도 화가들에게서 점차 보편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물론 이 시기에도 누드 소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립되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가령 문학 쪽의 경우 백석의 『사슴』이나 서정주의 『화사집』과 같은 일제 후반기의 대표적 시집들조차 불과 수백 부 내외로밖에 출간되지 못했다는 점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 누드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미술 독자가 극히 협소하다고는 하나 작품에 있어서는 꾸준한 확대와 발전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1920년대의 누드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모델 소재가 보편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누드를 발판으로 규모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려 했던 초기의 김관호나 김찬영의 시도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일면 퇴보한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누드가 기본적으로 인체 탐구의 결과여야 한다는 사실에 입각해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한다. 김관호와 김찬영의 누드화 시도는 야심적인 것이었고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고는 있으나 한편으로 서구 미술이나 일본 미술의 경지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무의식적 조바심의 산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잠재적인 대결 대상은 서구나 일본의 명작들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단순한 모델 소재의 작품은 그들의 목표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해질녘>이나 <님프의 죽음>과 같이 졸업 작품의 경우 작가적 의욕이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의 화가들의 경우 서구 미술에 대한 작가적 이해와 사회적 기반이 보다 갖춰짐에 따라, 모델 소재의 누드화 역시 작품으로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이 보다 확대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누드 미술의 제일 조건은 무엇보다도 신체 표현의 완성도에 있다. 모델 소재의 작품은 이 제일 조건의 연마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최적의 방식이고 또 야심적인 작품을 위한 중간 단계의 역할을 해 준다. 다시 말해 모델 소재는 신체 표현의 기본기 단련을 위해 화가들이 채택할 수 있는 가장 편의적인 대상이었다. 아울러 1920년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국내에서의 전람회의 창설은 작품 발표의 공간을 나름대로 확대시킴으로써 이러한 중간적인 성격의 작품들을 어렵지 않게 발표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모델 소재의 보편화에 따라 1920년대 이후가 되면 많은 화가들이 누드화를 남기고 있다. 이들 중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아무래도 가장 이른 시기에 활약한 나혜석과 이종우의 작품들일 것이다.


나혜석의 작품은 크게 담백한 사실성을 추구하는 작품들과 슥슥 그린 단순한 필치의 작품들로 나눌 수 있는데, 대체로 전자에서 그의 대표작이 많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전자에 속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풍경을 소재로 한 것이고, 인물화의 경우 대부분 후자에 속해 있어 기억할 만한 작품이 많지 않다.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등을 돌린 나부>는 나혜석의 드문 사실성 추구의 인물화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후 일본 화가의 작품을 방(倣)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두 작품을 대조했을 때 모작임이 거의 확실해지다 보니 사실상 그의 작품 중에서는 논외로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의 누드화 중 주목에 값하는 작품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나부>(1931) 한 점뿐일 것이다. 이 작품은 도판으로만 남아 있지만 <등을 돌린 나부>의 경향에서 단순한 필치의 인물화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의 성격이 엿보인다. 나혜석의 인물화 중에서 누드화에 그나마 괜찮은 작품이 있는 것은 정직한 사실 포착을 추구하는 모델 누드화의 장르적 특성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종우는 일본 유학을 마친 이후 1920년대 후반 다시 프랑스로 유학했으며, 이 과정에서 인물화에서 뛰어난 작품들을 여럿 남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유학 시기의 소작 가운데 <돌아선 나부>(1926)와 <남자나체>(1926)를 비롯한 몇 점의 누드화를 남기고 있다. <돌아선 나부>는 별로 뛰어나지 않은 작품이지만 <남자나체>는 조명이 드리워진 남성의 근육 묘사와 균형 잡힌 구도가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우리 근대미술에서 남성 누드화의 효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이종우는 유학 시절의 작품들로 1928년 개인전을 열었는데 당시 발표작 중에 누드화가 있어 검열 당국과 옥신각신했다는 회고를 남기기도 했다.


나혜석과 동갑 화가인 이제창은 이에 비하면 한결 예외적인 누드화를 남기고 있다. 그는 1925년과 1927년의 조선미술전람회에 총 두 점의 <여인[女]>을 발표했다. 도판만으로는 그 솜씨를 알기 어려우나, 비슷한 시기의 <자화상>(1926)이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누드>(1930)를 비롯한 몇몇 현존작에서 구사된 과감한 생략과 색채 감각으로 보아 이종우의 사실성 추구와는 다른 방향성의 작품들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제창의 작품에는 터놓고 생략적이고 왜곡적인 표현을 구사한 경우가 없지 않아 인상주의 이후 사조의 영향을 받은 동시대의 황술조, 구본웅과 함께 당시의 화단에서 하나의 개성적인 경향을 이루고 있다. 그와 비슷한 경향의 작가인 황술조 역시 근래에 <쿠로코(黑子) 2: 앉아있는 누드>(1926)와 <여인상>(1935) 등 몇 점의 누드화가 소개된 바 있다.(주1)


이제창의 작품 중 1925년에 발표된 <여인>의 경우 의자에 앉은 여인을 배까지 그린 좌상인데, 이 작품은 이후 나상윤의 <누드>(1927)에서 구사된 구도의 선례가 되고 있어 주목된다. 나상윤은 도상봉의 아내였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던 화가인데, 몇 해 전에 국립현대미술관을 통해 그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바 있다.(주2) 그의 <누드>는 평범한 신체의 인물을 극히 직설적으로 제시하고 있어 관람자로 하여금 신선한 충격을 준다. 피곤에 젖은 듯한 멍한 표정과 처져 있는 뱃살 등은 평범한 신체의 전형으로서 <해질녘>을 필두로 하는 고전적 미감과는 정반대의 지향성을 의도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의 구현에 성공하고 있다. 남아 있는 작품도 자료도 많지 않지만 이 작품 하나만으로 나상윤의 이름은 우리 미술사에서 잊히지 않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점진적인 발전


누드화의 전개와 관련해서 의외의 업적을 남기고 있는 인물은 오지호이다.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나부습작>(1930)과 <나부>(1931)를 출품하고 있는데 이 중 <나부>는 그의 도쿄미술학교 졸업 작품이기도 하다. 비록 도판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기는 하나 이 두 작품은 구도와 표현에서 군더더기 없는 안정감이 느껴진다.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이 작품들보다 앞서 그려진 <습작(나부)>(1928)가 소장되어 있지만 별로 주목할 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30년대의 두 작품을 비롯해 <책 읽는 여인>(1929)과 같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오지호의 인물화는 같은 시기에 제작된 그의 현존하는 인물화에 비하면 한결 윗길이라는 인상을 준다. 전자에서 비교적 아카데미즘의 정공법이 발휘된 반면 후자에서는 집중이 한결 분산된 것이 성패를 가린 것이라고 여겨진다. 오지호는 뒷날 인상주의적 풍경화에 주력하여 이 방면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지만 동시에 인물화가로서의 가능성을 묵히게 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오지호와 비슷한 시기에 다른 화가들 또한 몇 점의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다. 선우담이 조선미술전람회에 발표한 <나부>(1929)는 비율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하나 근육과 음영 처리에서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이후 웃통을 드러내고 곰방대를 문 남성을 그린 <휴게>(1934)를 발표하고 있다. 한편으로 도쿄미술학교에서 수학한 도상봉, 길진섭, 홍득순 등의 화가들 또한 오지호가 그랬던 것처럼 졸업 작품으로 나체화를 발표하고 있다.(주3) 길진섭의 <나부>(1932)와 홍득순의 <나체>(1933)는 그 중 특히 뛰어난 작품이라고 보여지며 오지호의 <나부>와 비슷한 수준을 이루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오지호의 <나부>와 선우담의 <휴게>


김관호와 이종우 이후의 아카데믹한 누드화가 오지호 등의 화가들에게로 이어지고 있다면, 이제창 등이 시도한 파격적 성격의 누드화는 김종태와 임군홍의 작품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종태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나녀습작>(1931), <모델>(1934), <모델>(1935) 등 세 점의 누드화를 발표하고 있다. 그는 초기작인 <포즈>(1928)나 <노란저고리>(1929)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빠르고 과감한 필치를 자신의 특기로 삼았으며 젊어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30년대의 누드화 역시 그의 초기 화풍을 대체로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중 <나녀습작>의 경우 별로 흥미를 느끼기 어려우나, 두 점의 <모델>은 과감한 필치가 구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성과 인물 표현에 있어 어색함이 없으며 도판만으로도 매력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1934년에 발표된 <모델>은 야수파를 연상시키는 굵은 윤곽선과 바닥 묘사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빠른 필치, 그리고 의도적으로 왜곡된 인체 표현이 주요한 특징으로 구사되어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서 그는 특히 인물의 상체는 비교적 현실적으로 묘사한 반면, 하체는 마치 여러 시점에서 본 부분들을 합친 것처럼 그리고 있다. 골반의 경우 왼쪽은 허리로부터 그대로 이어지는 반면 오른쪽은 옆에서 본 것처럼 툭 튀어나와 있고, 무릎의 경우 반대로 오른쪽이 일반적으로 선 다리에 가깝다면 왼쪽은 굽힌 다리를 위에서 포착한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아래로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일견 부자연스러우면서도 서 있는 모델의 어색하게 긴장된 분위기를 살리는 역할을 한다. 이제창이나 황술조의 누드화가 인체의 왜곡된 표현을 통해 다소 차가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김종태의 작품에서는 오히려 그와는 반대에 가까운 분위기가 있다는 차이가 엿보인다고 하겠다.


1935년에 발표된 <모델>의 경우 1934년의 작품에 비해 한결 덜 과감한 화풍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지지만, 인물의 머리끝과 발끝을 여유 공간 없이 아슬하게 자른 화면 구성이나 측면에서 바라본 시점 등 평범한 모델 소재의 회화와는 구별되는 개성적 요소가 있어 흥미를 준다.


김종태와 비슷한 화풍의 누드화로 성공적인 사례를 남기고 있는 또 한 명의 화가는 임군홍이다.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모델>(1937)을 발표하고 있다. 이 작품은 함께 발표된 <소녀상>(1937)과 함께 작품이 현존하고 있다. 의자에 앉아 인위적으로 두 팔을 머리 뒤로 넘겨 잡은 인물을 그린 작품인 <모델>은 경직되게 표현되기 쉬운 구성과 자세를 전혀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어 그의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기량은 작품의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가령 동심원으로 처리된 인물의 가슴 표현의 경우 굉장히 과감한 방식임에도 어색함을 주지 않고 있다. 애매하게 걸쳐진 치마 역시 간결히 처리했으면서도 충분한 입체감이 느껴진다. 배경에서도 가령 의자를 보면 거의 단면에 가까울 정도로 추상화되어 있으나 확고한 정면 시점 탓에 이상하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또 두꺼운 필선으로는 얼굴을 묘사하기가 어려운데도 불과 몇 번의 획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정확한 필치와 색채 감각이 여기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데 이는 김종태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미덕이다. 이제창 이후 일련의 화가들이 보여 준 다소 무리한 시도가 이 작품에서 완성 단계에 도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품 외에 임군홍은 <나부>(1936)를 비롯한 몇 점의 누드화를 더 남기고 있지만, 그의 대표작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평범하다고 생각된다.


김종태의 <모델>과 임군홍의 <모델>


위에서 보았듯이 초기 서양화가들의 누드화에 대한 성공적 시도는 사실주의 지향과 그 반대의 지향 모두에서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며, 이후 후술할 서진달을 비롯해 특히 김인승과 이쾌대의 작품에 이르면 확실한 결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인체 표현에 대한 능란한 기량을 바탕으로 거기에 자신만의 개성을 가미하여, 까다로운 장르인 인물화를 자신들의 득의의 영역으로 장악한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1) 이 작품들이 소개된 2019년의 솔거미술관 전시에서는 제목의 '쿠로코'를 '흑자(黑子)'로 표기하고 있으나, 아마도 일본 이름을 한자로 쓴 것이리라고 보고 자의적으로 수정해 보았다. 맞는 수정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2) 김인혜, 「소박해서 질리지 않는 조선백자처럼… 삶을 예술로 만든 부부 화가」, 『조선일보』(2021.10.9).

3) 이구열,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돌베개, 2005), 177~181쪽.


사진 출처:

(1) 오지호 <나부>: 홍윤리, 「오지호의 회화 연구: <남향집>에 대한 재검토를 중심으로」(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에서 가져옴

(2) 선우담 <휴게>: 한국미술연구소 홈페이지

(3) 김종태 <모델>: 『조선미술전람회도록』에서 가져옴

(4) 임군홍 <모델>: 매일신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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