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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연 Oct 02. 2022

1. 인간의 형상 (1)

한국미술, 열두 개의 변주 (2)


지금까지 미술의 모든 양식과 주제의 변화를 살펴보면, 화가와 조각가들은 인간의 누드 형상에 대한 연구라는 근본적인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것 같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은, 정신의 완성을 육체의 신체적 완성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믿는 그리스인들의 신념이 르네상스 시대에 재발견된 이후 제작된 무수한 누드 작품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미술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미지들 중의 하나가 되어, 거의 어디에서나 사진으로뿐 아니라 소형 복제품으로까지 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 이 이미지는 인간적 강인함과 약점을 두루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의 다윗을 묘사한 것도 아니고, 압도적으로 불리한 승산에 도전하는 아직도 어린 양치기 소년을 묘사한 것도 아니다. ㅡ이상적인 영웅 즉, 미켈란젤로 자신이 남성 누드의 신체적인 영광과 인간 정신의 용기에 대해서 느끼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이상적인 영웅으로 구체화시킨 것이다. (주1)



누드화의 의미


데이비드 파이퍼가 제시한 열두 개의 주제 중에서 맨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형상', 그중에서도 누드이다. 왜 하필이면 누드가 제일 먼저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주류적이 되어 온 주제가 인간의 활동이라고 보여진다는 점에서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실 앞으로 소개하게 될 저자가 설정한 열두 개의 주제 중에서 절반 이상이 인간의 활동에 관련된 것들이다. 따라서 저자로서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우선 그 기본 요소가 될 인간의 신체에 대해서부터 설명하는 것이 맞다고 보았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데이비드 파이퍼는 누드를 소재로 한 미술의 전체적인 흐름을 개관하고 있다. 육체에 대한 상반된 가치관의 시대였던 고대와 중세를 각각 거치고 난 뒤, 15세기 이후가 되면 신체 표현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커지면서 점차 누드를 다루는 미술가들의 관점이 복잡화되어 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15세기에 와서 인간 형상을 재발견한 이래 서구의 미술가들은 무한히 다양한 방법에 의해서 누드를 자신들의 시대, 개인적 관심, 각자의 양식에 맞게 독자적으로 전개시켜 나가는 주제로서 다루어 왔다. 그 범위는 고전적인 이상형에서부터 특정한 신체 형태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데 이르기까지 다양했는데, 이 두 가지 전통 모두 해부학의 발전 및 실물 묘사에 중점을 두었던 아카데미 전통에 힘입은 바 크다.'(주2)


그의 설명에서 르네상스 이후 누드 미술의 쟁점을 간략화해 보면 대략 두 개의 축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상화된 신체 표현 지향과 평범한 신체 표현 지향을 양 방향으로 하는 축이 그 하나이고, 종교적, 역사적 주제와 풍속적 주제를 양 방향으로 하는 축이 다른 하나이다. 이 중 첫 번째 축에는 속되게 이상화된 신체, 즉 에로틱한 신체 표현 지향이라는 세 번째 지점이 중간에 위치한다. 데이비드 파이퍼가 설명하고 있는 초기 르네상스 이후의 화가들의 누드 표현은 이 두 개의 축 안에서 대략적인 정리가 될 수 있다. 가령 라파엘로의 <카리테스>와 틴토레토의 <수잔나와 장로들>, 렘브란트의 <밧세바>는 모두 종교적 소재를 다룬 것이지만 각각 이상화된 신체, 에로티시즘에 가까운 신체, 평범한 신체를 표현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루벤스 역시 에로티시즘에 가까우면서도 풍만한 육체를 통한 에너지를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한편으로 그 이후의 화가들을 보면, 부셰를 비롯한 로코코 시기의 화가들은 풍속화된 소재와 완연한 에로티시즘의 추구로, 19세기의 아카데미즘 화가들은 에로티시즘 지향과 이를 위장하려는 고전적 소재로, '전통적 고전주의와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인' 쿠르베는 소재와 표현 양면에서 친근화를 지향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20세기 이후가 되자 피카소를 시작으로 신체의 단순화와 해체가 일어나기 시작하긴 하지만, 그것이 드 쿠닝이나 피카소 자신의 경우와 같이 새로운 신체 표현의 가능성으로 이어졌으면 이어졌지 미술에서 누드의 위상 상실로는 이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이 대목은 마무리된다.


누드를 첫 번째 주제로 배치한 데이비드 파이퍼의 설정은 초장에서부터 우리의 입장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측면도 없지 않다. 누드로 대표되는 인간의 신체에 대한 탐구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세계 미술사의 흐름에 비하면, 우리 미술에서는 그러한 발달이 훨씬 적었을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매우 억압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느낌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것도 사실이다. 출처는 바로 기억이 안 나지만, 언젠가 부채를 든 채제공의 초상을 두고, 작가인 이명기가 채제공의 얼굴은 대단히 훌륭하게 묘사했으면서 정작 부채를 든 손을 표현하는 데에는 서툰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설명을 본 일이 있다. 당대 최고의 인물화가에게서도 이러한 아쉬움이 발견된다는 것은 결국 대부분의 우리 화가들이 얼굴과 신체 비율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체 표현은 그다지 발전시키지 않았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모든 미술에는 문화적인 맥락이 긴요히 개입되어 있기 마련이다. 누드에 대한 무관심이 혹여 우리 미술의 발달의 저해와 연관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추측에 대해 우리는 몇 가지의 설명으로써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유럽이나 인도와 달리 우리 미술에서는 역사와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사실적인 나체를 써야 할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라파엘로 시대의 누드화처럼 무거운 소재를 다루기 위해 이상화된 신체를 표현해야 할 이유가 우리 화가들에게는 없었다. 이것은 복식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신체의 아름다움을 정신의 아름다움과 연결시키지 않는 유교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가령 삼강행실도를 근육질의 인물 형상으로 표현한다면 매우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우리 쪽에서 이상화된 신체에 대한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르는 불교미술이었다. 유교 문화의 미술과는 달리 불교미술에서는 필연적으로 얼굴 이외에도 어깨와 가슴, 손과 팔다리 등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머리글에서 언급했던 우리 고대 미술의 걸작인 금동반가사유상과 석굴암은 그것을 예증해 준다. 그러나 근세인 조선 후기 불화에서의 명작들은 대체로 평면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된다. 동시대의 기독교 미술과는 방향성이 달랐던 셈이다. 역시 비율과 같은 전체적인 균형에는 공력을 기울이면서도 가령 가슴이나 팔다리 등에 근육 묘사를 하는 등의 표현은 자제하고 있는 데서 그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이후가 되면 일부 작가에 의한 음영법의 과감한 적용을 통해 보다 사실적인 인체 표현이 시도되고 있지만, 이러한 시도가 과거의 작품들로부터 벗어나고는 있어도 그들을 능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의문스러워진다.(주3)



한편으로 우리는 상대적으로 무겁지 않은 주제인 가령 풍속화나 도석인물화 등에서는 인간의 육체가 나름대로 어렵지 않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풍속화에서 볼 수 있는 웃통을 드러내고 바지를 걷은 채 농사일을 하는 농부들이나, 도석인물화에서 볼 수 있는 역시 웃통을 드러낸 채 늘어진 가슴이나 배를 드러내고 있는 신선들의 모습 등은 우리 미술에서 너무나 익숙한 소재들이다. 그러니까 우리 미술에서는 벗은 육체를 표현한 그림이 무거운 주제일 때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지, 풍속적 소재일 때는 오히려 친근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이 중 특히 풍속화의 경우 19세기에 들어서면 성적 생활을 소재로 삼는 이른바 성풍속도의 등장으로 이어지면서 실로 오랜만에 우리 회화에서 본격적인 누드 작품이 등장하게 된다. 실용적 기능만을 하던 춘화가 조선 후기 특유의 풍족한 문화와 결합되면서 감상물로 발전한 결과로 탄생한 성풍속도는 누드가 그다지 발전하지 않은 우리 미술사에서 그 소재만으로도 독특한 위상을 점하고 있다.(주4) 그러나 소재가 예외적인 것일 뿐이지 화풍이나 소재 해석 등은 조선 후기 풍속화의 주류적 스타일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성풍속도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김홍도 전칭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 무명 작가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운우첩》에 실린 <월하춘희도>나 <춘행도>는 성행위가 자연스러운 인간의 활동이고 또 즐거움을 추구하는 활동이어야 한다는 건강한 시각을 무엇보다도 잘 보여준다.


한편으로 재미있는 것은 성풍속도를 필두로 한 풍속화, 도석인물화에서 표현된 인간의 신체는 거의 예외 없이 이상화된 신체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신체라는 점이다. 가령 <춘행도>에서 희화적으로 표현된 복부와 고환을 드러낸 남자 묘사는 이 작품의 에로틱함 없는 에로티시즘을 드러내 준다. 벗은 육체를 다룬 다른 장르의 작품들, 예컨대 노동 소재의 풍속화나 헐벗은 신선이 등장하는 도석인물화에서도 사정은 거의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평범한 육체의 소유자들이거나, 아니면 너무 말랐거나 뚱뚱하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아마도 역시 유교 문화의 합리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노동이나 휴식을 하는 이들을 그리면서 그들의 몸매를 섬세하게 그리는 것은 생활의 현실성을 드러내는 데 앞서 그들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눈을 뺏기게 만들 가능성이 크고, 신선의 풍만한 몸매를 실제에 가깝게 그리는 것은 신비로운 인물의 풍치를 드러내는 데 저해 요소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그들을 평범하고 간결하게 처리하는 것이 작품의 본래 목적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근세의 우리 미술에서 누드는 무거운 주제의 작품에서는 필요성을 처음부터 느낄 수 없었고, 가벼운 주제의 작품에서는 필요성은 느끼되 지극히 평범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체에 대한 관심은 얼굴을 비롯한 부분적인 요소를 벗어나면 대체로 철저하게 탐구되지 않은 구석이 있었고, 누드 소재 자체는 꾸준히 다루어져 오고 발전하기는 했으나 초상화와 같은 사실성 추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의 방향성이 더 컸던 까닭에 간소화된 화풍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요컨대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 미술에서 누드가 무거운 소재와 가벼운 소재, 이상적 표현과 평범한 표현이라는 두 개의 축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 간 것과는 달리, 우리 쪽에서는 그 문화적 특성에 따라 가벼운 소재와 평범한 표현이라는 한 개의 면만을 거의 벗어나지 않아 왔던 셈이다.


서구적 누드 개념의 도입


이런 상황에서 이상화된 신체에 대한 관심이라든지, 또 무거운 주제에 누드를 이용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서구 미술을 공부한 작가들의 등장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근대 누드 미술의 효시가 되는 사례로써 가장 먼저 주목되는 작가는 고희동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양화를 배운 김관호와 김찬영이다. 근대의 우리 누드화를 주제로 다룬 거의 최초의 평론에서 오광수는 그 시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땅에서 처음으로 누드를 그린 화가는 아마도 제일 먼저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간 고희동이 아닐까 생각된다. 미술학교의 수업과정에서 누드 데생은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누드 작품은 전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최초의 누드화는 고희동에 이어 두 번째로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김관호에 의해 그려진 <해질녘[夕暮]>이 될 수밖에 없다.'(주5)


김관호의 <해질녘>은 잘 알려진 대로 1916년에 제출된 그의 졸업 작품인 동시에 같은 해 일본의 문부성미술전람회에 출품되어 입선도 아닌 특선을 차지하는 쾌거를 거머쥔 작품이다. 이 작품 하나로 작가 김관호의 미술사적인 입지가 결정적으로 공고화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자 그대로 척박했던 근대미술의 풍토에서 <해질녘>의 탄생은 하나의 이해하기 어려운 업적으로 남아 있다. 한편으로 출세작의 더할 나위 없는 성공 이후 작가 김관호가 보여준 이상하리만치 빈약한 행보가 이 뛰어난 작품의 불가사의함을 키워 준 측면도 없지 않다.


미역을 감고 올라온 두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해질녘>은 인물의 표현과 화면의 구성 모두에서 당시로서는 경이에 가까운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시점을 저녁으로 설정하여 작품 전체가 황색조로 안정감 있게 통일되어 있는 점, 수건이나 풀포기 등에서 거칠게 처리된 구석이 없지는 않지만 인물에서만큼은 훌륭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순하지 않으면서도 통일되어 긴장감 있는 구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 등은 이 작품의 미덕으로서 김관호의 아카데믹한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주6) 인물들의 포즈가 너무 인위적이어서 실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없지 않으나, 정작 그들을 실제 목욕 후의 동작에 가깝게 포착하듯이 표현했다면 이러한 고전적 분위기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장르를 따지자면 풍속화의 범주에 들어갈 것임에도 불구하고, <해질녘>의 인물들이 비범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고전적인 기본기에 충실한 섬세한 인물 표현과 정교한 구성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적 소재에 고전적인 깊이를 부여하려 한 시도는 김관호 자신이 배운 구로다 세이키를 필두로 한 당시 일본 아카데미즘의 경향에 힘입은 것이기도 했다. 무비판적 방법론 수용이라는 비판도 있기는 하지만, 고전 미술과 인상주의 모두에게서 장점을 취하고자 한 그들의 방식은 초창기 서양화가의 선택으로서는 상당히 괜찮은 절충안이었다고 생각된다.



김관호는 이후 192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또 다른 누드 작품인 <호수>를 발표하고 있다. 날개옷 같은 천을 걸친 채 물가에 조용히 앉아 있는 여인을 그린 <호수>는 비록 도판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기는 하나 <해질녘>과 비교했을 때 훨씬 떨어진다는 인상을 주고 실제 그런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해질녘>이 일상적 소재를 고전적 구성을 통해 비범한 분위기로 승화시키고 있는 데 반해, <호수>에서의 뜻없이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은 훨씬 관념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나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구도 또한 안정감과 긴장감을 모두 갖춘 <해질녘>의 미덕과는 동떨어져 있다.


물론 김관호의 알려진 작품 자체가 적기 때문에 <해질녘>과 <호수>를 대조하는 것만으로 그의 화풍을 퇴보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 전성기였던 졸업과 귀국 이후 그의 작가 활동이 점차 축소되어 갔던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해질녘>을 발표했을 당시 김관호는 일본에서도 상당한 촉망의 대상이 되는 화가였다. 그러나 귀국한 해에 개인전을 연 이후부터는 작품 활동이 계속해서 뜸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귀국 후 불과 7년 뒤의 <호수>조차 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온 화가 오카다 사부로스케의 강권에 의해 겨우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주7)


활동 당시의 평가나 증언으로 보아 김관호가 당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기량의 소유자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작품이 <해질녘>을 제외하면 너무나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최고작이 현존작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김관호 신화'를 더욱 부추긴 혐의 또한 없지 않다. 그의 절필에는 물론 시대적 한계가 가장 큰 영향을 주었겠지만 그 자신 또한 작가로서 또 다른 돌파구를 도모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동양화라는 뚜렷한 제2의 기반이 있었던 동년배 작가인 고희동과 대비된다. 작가로서의 업적을 놓고 보면 고희동이 김관호에 댈 바가 못 된다는 일각의 주장이 있지만, 고희동은 일찍이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던 동양화로 전향함으로써 50년 화력(畵歷)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말년의 점진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반면 김관호는 시대적 한계에 직면했을 때 작가적 탈출에 성공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초기작이 그대로 최고작이 되는 형국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어쨌든 김관호가 <해질녘>을 통해 보여준 초창기의 업적은 우리 미술에서도 신체에 대한 서구적 관점을 도입해 뛰어난 작품을 산출할 수 있다는 뚜렷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김관호에 이어 1917년에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김찬영은 졸업 작품으로 <님프의 죽음>을 남기고 있다. <해질녘>과 달리 <님프의 죽음>은 그 존재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가 이십여 년 전에야 비로소 우리나라에 소개가 이루어졌다. 같은 서양 미술의 영향을 받았지만 김관호가 <해질녘>에서 풍속적 소재를 취한 것과는 달리 김찬영은 소재에서부터 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존재인 님프를 다루고 있어 그 차이가 뚜렷하다. 또 현실성과 환상성 사이에서 불분명한 분위기를 띠는 김관호의 또 다른 작품인 <호수>에 비해 <님프의 죽음>은 역시 관념적이기는 하지만 제목의 도움을 받아 기본적인 주제성이 한결 선명하다.


이 작품에 대해 근래에는 제목과 주제로 보아 '암울한 시대에의 상징성을 읽게 한다.'는 촌평이 이루어진 바 있다.(주8) 관념적 작품을 두고 무작정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겠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희랍 신화에서 님프는 반인반신에 가까운 존재로서 젊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죽음을 완전히 피하는 존재는 아니다. 님프는 또한 자연의 요정이기 때문에 그가 속한 자연물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님프의 죽음>에는 우물을 뒤로 한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왼쪽 인물은 한쪽 다리를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빈 접시를 내밀고 있고 오른쪽 인물은 자세가 다소 어색하기는 하나 가슴에 손을 대고 허리를 구부려 그것을 받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다. 제목인 '님프의 죽음'이란 곧 님프가 의탁한 자연물의 산실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우물의 말라붙음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잘은 모르겠으나 빈 접시는 우물물이 더 이상 길어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말라붙은 우물과 그 우물의 요정인 님프의 죽음은 곧 망국 또는 망국 이후 우리 국토의 강제적 파괴를 비유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찬영은 그의 유일한 현존 작품인 <자화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희동이나 김관호에 비하면 한결 낭만적인 화풍을 선보인 바 있다. <님프의 죽음>에서의 이국적 소재 차용 역시 이러한 낭만적 성격의 보다 직접적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님프라는 소재도 그렇지만 가령 <님프의 죽음>에서 표현된 화염문을 연상케 하는 배경 처리 역시 <자화상>의 배경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띠고 있다. 누드의 서구적 개념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김찬영은 소재의 취득이나 분위기의 설정 등에서 김관호와는 또 다른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1) 데이비드 파이퍼 외, 손효주/유시주/양건열 역, 『미술의 이해』(시공사, 1995), 22쪽.

2) 위의 책, 26쪽.

3) 19세기 불화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서는 문명대, 『한국불교회화사』(다할미디어, 2021)의 5부 3장 4절 '조선 말기의 불화' 참조.

4) 홍선표, 『조선시대 회화사론』(문예출판사, 1999), 567~580쪽 참조.

5) 오광수, 『한국 근대미술 사상 노트』(일지사, 1987), 8쪽.

6) 김희대, 「김관호의 <해질녘> 연구」, 『현대미술관연구』 제11집(국립현대미술관, 2000) 참조.

7) 배원정, 「김관호 행적의 새로운 고증과 제문제」, 『미술사학보』 제57호(미술사학연구회, 2021), 15쪽.

8) 윤범모, 『백년을 그리다』(한겨레출판, 2018), 27~36쪽 참조.


사진 출처:

(1) 작가미상 <월하춘희도> <춘행도>: 공유마당 홈페이지

(2) 김관호 <호수>, 김찬영 <님프의 죽음>: 한겨레신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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