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난 기억되지 않지만, 매일 만들어 낸다.
디자인을 시작한지 벌써 수년째다. 그 동안 정말 많은 것들을 만들었다. 홈페이지도, 앱도, 광고배너도, 카드뉴스도, 피치덱도... 내가 만든 디자인들은 사람들의 핸드폰에서 스쳐 지나가고, 어떤건 광고 클릭률을 올렸고, 어떤건 투자 유치 슬라이드의 1페이지로 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이름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는 않았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다 보면, 정말 많은 디자인들이 아주 빠르게 세상에 나온다. 그 속도에 맞춰 시안을 만들고, 회의에서 수정 방향을 조율하고, 개발이 반영된 결과물을 보며 또 미묘한 디테일을 맞춘다. 그렇게 하나의 화면이 완성되고, 한 장의 이미지가 세상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그게 '내 디자인'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애매할 때가 많다. 누가 기획했고, 누가 피드백했고, 누가 마지막에 결정 했는지에 따라 모두가 조금씩 다르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정말 아끼는 시안을 만든적이 있다. 톤앤매너도, 브랜드 컬러도, 마이크로 인터랙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만든 시안이었다. 하지만 회의에서 바뀌었고, 또 바뀌었다. 결국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됐다. 최종 결과물은 나쁘지 않았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냥... 평범했다. 그 시안은 슬랙에서 묻혔고, 'v3_final_real_final(진짜최종).figma' 속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디자이너는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는 직업이 아닐까? 이름 대신 브랜드를 남기고, 사인을 남기기보다 흐름을 만들고, 자기 스타일 대신 팀의 목소리를 담는다. 어쩌면 그게 디자인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니라 사용자에게 어울리는 것을 만드는 일. 그래서 누군가 '이 화면 좋아요'라고 말할 때, '제가 만들었어요'라고 말하진 않아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건 분명하다.
물론 가끔은, 정말 가끔은 내가 만든걸 누가 기억해줬으면싶을 때도 있다. 누군가 '이거 되게 잘 정리됐다'라고 말해줄 때, '이건 딱 우리 브랜드 같아요'라는 말을 들을 때, 혹은 디자이너끼리 '와 이거 되게 결있다'라는 이야기를 나눌 때. 그럴때면, 그래 나 아직 괜찮게 하고 있구나 싶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씩 생각이 바뀌고 있다. 이름이 남는게 중요하진 않지만, 함께 만든다는 느낌과 존중받는 과정, 그게 바로 디자인을 계속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앞서 여러차례 언급한 외부 파트너사d이자 디자이너 구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넥스트인(NEXTIN)과 협업할 때에도 그런 감정이 유지되는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있다. 마치 같이 브랜드를 키워가는 사람처럼, 작업 요청을 넘기면 그 안의 맥락을 이해하고, 톤을 맞추고, 때론 먼저 아이디어를 제안해주기도하는데 그럴 때마다 함께 만든다는 것의 의미가 더 도드라지는것 같다.
디자이너는 스포트라이트보단 무대를 만드는 사람에 가깝다. 모두가 그 위에서 잘 움직일 수 있도록, 사용자와 브랜드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그 흔적이, 내 이름이 아니더라도 그 브랜드 안에 어딘가 깊숙이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한 주 고생 많으셨어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