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의 오삼 주물럭보다 강력한 제주의 한삼 주물럭
솔직히 말하자면 초빼이는 오징어와 한치의 구분을 못한다. 일단 동해안에서 잡은 것이면 오징어, 제주도에서 잡은 녀석이면 한치라는 정도의 구분만 할 수 있는 것만 가능한 정도이다. 초빼이가 제대로 된 한치를 처음 본 것은 제주도 올레길을 걷던 중 달리 보리밭을 나와 해안길을 걸으며 바닷가에서 건조 중인 것을 보았던 것이 처음이었고 그 후 점심 한 끼 때우기 위해 들렸던 어느 식당에서 한치물회를 먹었던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인천의 어느 노포에서 내는 '한치 보쌈'을 맛본 것이 거의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초빼이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치와 오징어는 식감과 맛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한치가 오징어에 비해 단맛이 좋고 조금 더 짙은 맛이 난다고 할까? 그 외에는 구체적으로 한치와 오징어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어떤 특성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제주도에는 '한치가 쌀밥이라면 오징어는 보리밥이고, 한치가 인절미라면 오징어는 개떡이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제주에선 '한치'를 오징어보다 더 값어치 있게 쳐준다는 의미일 게다. 이는 한치가 제주도의 대표적 어종 중의 하나이기에 가능한 일. 그래서 보통 한치를 '제주 한치'라 부르기도 한다.
외형상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오징어와 생김새가 다른데, 한치는 몸통이 길쭉하고 다리가 짧은 편이라고 한다. 또한 머리 지느러미의 시작점과 모양도 다르다. 본래의 이름은 '창꼴뚜기'. '한치'라는 별칭은 워낙 다리가 짧아, 다리 길이가 '한치(一寸)'밖에 안된다고 해서 붙었다고 하니 이런 비극이 또 없다. 대신 몸통은 보통 40cm까지 자라는데 암수의 모습이 다른데 암컷은 통통해서 마치 동해에서 잡히는 오징어와 비슷하게 보인다. 동해에서 잡히는 화살꼴뚜기(동해한치)와 제주와 남해안에서 잡히는 창꼴뚜기(제주한치)는 어부들도 구분하기 어렵다고 한다.
초빼이가 제주의 식당을 선택했던 가장 큰 기준은 육지에서 먹어볼 수 없는, 제주도만의 향토 음식을 위주로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시식당'을 찾았고, '골목식당'의 꿩구이를 찾았으며 '삼보식당'의 자리물회와 '삼대 전통 고기국수'를 찾게 되었다.
어느새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밤. 무언가 부족한 하나가 손가락에 박힌 가시처럼 계속 신경 쓰였다. 결국 제주도의 노포 리스트를 다시 들여다보던 중 '한치 주물럭'이라는 메뉴에 시선이 꽂혔다. 긴 고민은 오히려 쓸데없는 결과를 부르는 법.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호텔을 나와 바로 택시를 탔다. 제주시의 노포는 동문시장과 서문시장 등 옛 제주읍성이 있던 제주의 구도심에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밤이었고, 한치 주물럭이라는 기가 막힌 음식이 기다리고 있으니 당연히 마눌님과 제주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할 요량으로 호텔에 렌터카를 버려두고 나섰다. 오래된 건물의 고즈넉함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조금은 익숙지 않은 풍경의 거리에서 택시가 멈췄다. 서문사거리 한편, 건물의 두 면에 빨간색 간판을 큼직하게 붙여놓아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을 듯했다. 빨간 '태광식당'의 간판에서 이미 식욕은 동하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두 테이블만 비어 있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수수한 옷차림의 현지인들이 거의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비어있는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치 주물럭과 돼지고기 주물럭을 각각 하나씩 주문했다. 그리고 제주도 지역 소주인 한라산과 맥주도 한 병씩 주문. 기본찬들과 술이 먼저 나왔다. 깔끔하지만 간단한 찬들. 콩나물 무침과 오이소박이에 이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듯한 양배추 샐러드가 테이블을 채운다. 요즘은 시장의 통닭집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그 양배추 샐러드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소맥으로 먼저 잔을 채운다. 제주도 노포 취재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여행도 못하고 사육당하듯 하루에 네 끼씩 억지로 먹었던 마눌님을 위해 감사의 건배를 먼저 올렸다.
제주도 지역소주인 한라산 소주가 꽤 입에 감긴다. 가급적 지방 취재를 가면 해당 지역의 소주를 찾는 편인데 가장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낸 것이 한라산 소주인 것 같다. 요즘의 한라산 소주는 서울의 두꺼비나 이슬에 비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좋아졌다. 옛 한일소주를 생각하면 정말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맛있는 소주가 되었다. 뒤이어 철판에 담긴 돼지고기 주물럭이 나왔다. 초빼이가 갔을 때는 모든 고기를 직접 직원분들이 구워주셨다. 테이블용 브루스터에 불을 올리며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돼지고기 주물럭이 익는 속도가 더 오래 걸리기 때문에 먼저 불에 올려 적당히 익힌 후 한치 주물럭을 나중에 올린다고 설명해 주신다. 주철판이 뜨겁게 달궈지기 시작하면서 빨간 양념들이 테이블 위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조금씩 고기가 익어가면서 익숙하지만 언제나 기분 좋은 고기 굽는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양념된 고기는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타버리거나 눌어붙는다. 직원분이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초빼이가 집게를 들고 몇 번을 뒤집었다. 옆에서 보면 조금은 참을성 없는 사람같이 보일만큼 수시로 뒤집어 줘야 한다. 큼직하게 썬 깻잎과 대파 그리고 팽이버섯이 슬며시 주물럭에 녹아들며 양념의 채도가 낮아진다. 양념의 농도가 점점 짙어지며 더욱 강하게 향을 피우기 시작한다. 테이블 한편에 놓인 한치 주물럭 접시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횟수가 늘어나자 직원분이 '조금 더 기다려야 해요'라며 강력한 경고를 날린다. 모든 것이 타이밍이다. 요리에서도 적절한 타이밍이 중요하다. 요리 전체의 흐름을 보는 안목과 동시에 디테일한 상태까지 모두 챙길 수 있어야 한다. 애꿎은 술잔만 비운다.
한치 주물럭이 드디어 자리를 찾았다. 반투명한 한치살이 금세 하얗게 변한다. 사실 이 순서까지는 육지에서 즐겨 먹던 오삼불고기(오징어 삼겹살 불고기)나 오삼주물럭과 큰 차이는 없다. 차이점이 있다면 오징어 주물럭에 비해 한치살의 크기가 좀 더 크다는 것? 귀한 한치를 아끼지 않고 큼직하게 잘라 보는 것만으로도 풍성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고추장과 고춧가루 등의 재료도 아끼지 않아 매운 내가 '훅'하고 치고 들어와 연신 재채기를 해 댄다. 제주의 음식이라기보다는 매운맛을 즐기는 전라도 음식의 흔적을 조금 엿볼 수 있는 부분.
태광식당의 사장님은 목포가 고향인 분이라 한다. 한 때 제주도에 전라도 지역의 분들이 많이 이주한 적이 있다고 들었었는데 아마 그 시기 즈음 제주도에 자리를 잡은 듯하다. 1982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태광식당은 전라도 음식의 고향이라는 '목포'의 손맛으로 제주의 특별한 재료를 활용해 음식을 만들어 왔다. 물회에도 돼지고기에도 기존 제주의 방식과 차별화하여 맵고 빨간 양념을 주로 사용했고, 한치도 주물럭으로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주도의 향토음식이라 치부해도 될 정도로 음식 맛 하나로 '제주도화' 되었다. 전라도 음식의 플랫폼에 제주도만의 재료를 담아 만들어 새로운 장르가 되었다.
허기진 배와 아쉬운 마음에 허겁지겁 젓가락을 놀렸다. 치명적인 '맵단'의 유혹이 범상치 않다. 게다가 제주도 돼지와 한치를 잘 버무렸으니 바닥을 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돼지고기와 한치가 품은 서로 다른 단맛이 입안에서 요동을 친다. 게다가 탄탄한 살결의 돼지고기 주물럭과 점점 조직을 단단하게 만들어가는 한치의 식감도 이질적이지만 잘 어우러져 기가 막히다. 돼지고기와 한치 주물럭이 주철판 위에 있다가 없어졌다!
순간 잠깐 고민했다. 많은 분들이 추천해 준 방법을 따르기로 했다. 국수사리를 주문했다. 금세 삶아 내온 국수사리를 남은 재료와 함께 섞고 조금 기다렸다. 국수면이 양념을 머금을 시간이 필요하다. 양념이 다시 한소끔 끓어오르자마자 앞 접시에 국수를 덜었다. 진득한 고추장 양념이 입술 사이를 통과하며 스르륵 매콤한 옷을 벗는다. 양 입술 위로 돼지와 한치 주물럭의 모든 엑기스가 녹아 립글로스처럼 발라져 있다.
새로운 한라산의 뚜껑을 열었다.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이었고, 차는 호텔에 있었으며, 내일 아침은 '우진'의 고사리 해장국이 기다리고 있다. 초빼이에게는 이미 '큰 계획'이 있다. 입도 전부터 치밀하게 짜 놓은 음주와 해장 스케줄이 탄탄하게 받치고 있어 두려울 게 없었다. 국수 가닥의 흔적이 희미해질 즈음 마무리 볶음밥을 부탁드렸다. '초빼이도 참 돈 안 되는 손님이다'라는 자책도 잠시 했지만 이런 양념에 밥을 볶지 않는다는 것은 일은 벌여 놓고 마무리를 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맛있는 고춧가루와 고추장으로 만든 양념으로 밥을 볶을 때는 반드시 좋은 김가루가 필요하다. 잘 생각해 보면 이런 양념을 다루는 음식점의 볶음밥에는 항상 김가루를 토핑처럼 얹어준다. 볶음밥에 쓰는 김가루는 사실 소금 양념을 하지 않고, 기름을 바르지 않은 '맨김'이나 '살짝 구워낸 김'이 가장 잘 어울린다. 다른 양념이 가미가 되면 너무 간이 강해져 진정으로 맛있는 볶음밥을 맛보기 힘들다. 김 본연의 향과 맛이 잘 살아있는 김은 가격이 비싸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게에서는 볶음밥 전용으로 판매하는 제품 김가루를 사용한다. 이런 사소한 차이에서 맛의 수준 차이가 나게 된다. 태광식당의 그것은 극상품은 아니었지만 소금이나 기름이 가미되지 않은 김이라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국수사리와 볶음밥 하나로 소주 한 병을 다시 비운다.
제주의 시간은 육지의 시간에 비해 유난히 빨리 흐르는 것 같다. 제주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시간의 흐름이 빨라지기 시작된다. 마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다른, 또 하나의 세계로 이어진 게이트와 같다. 빠른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니 소주병을 비워가는 속도도 상대적으로 빨라진다. 이는 결코 초빼이가 술을 급하게 마셔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제주의 음식과 시간이 함께 만들어 낸 결과다. 내일이면 다시 일상의 시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메뉴추천]
1. 2인 방문 시 : 한치 주물럭 + 돼지고기 주물럭 + 국수사리 + 볶음밥 +소주
2. 3인 이상 방문 시 : 한치 주물럭 2 + 돼지고기 주물럭 1 + 물회 + 국수사리 + 볶음밥 +소주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전용 주차장 있음(2~3대). 매장 인근 골목 주차.
2. 월~토 10:30~21:40 / 정기휴무 매주 일요일 / 브레이크 타임 15시~17시 / 라스트 오더 20:40
3. 참고
- 한치 주물럭이라니. 돼지고기 주물럭과 함께 먹는 그 맛은 정말 별미다.
- 이곳의 물회는 다른 곳과 조금 다르다고 한다.(본문 참조) 물회에 대한 평도 좋다.
4. 여행 및 관광정보
- 인근 노포 : 평화가든, 송림반점, 돌하르방식당, 호근동, 재벌식당(도령로), 송림반점(관덕로), 유리네,
삼대전통고기국수(신대로5길), 금복식당(동문시장), 만부정(사장길), 골목식당(동문시장), (이하 서귀포)
범일분식(남원읍), 영해식당(대정읍), 가시식당(표선면), 대도식당(서귀포시), 영춘반점(서귀포시), 대포
횟집(중문) 등.
- 제주도의 식당들은 제주시나 서귀포 시내를 제외하고 일찍 문을 닫는 곳이 많으니 영업시간은 반드시
확인하고 방문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