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있을지언정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는 식당
코로나의 광품이 전국을 휩쓸고 지난 후 조금씩 잠잠해지던 시기, 전라도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담양에서는 채상장 명인을 찾았다가 대나무 부채를 만드는 곳도 찾기도 했었다. 이후 나주에 들러 부러 국가 무형문화재 나주반 장인이신 '김춘식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나주반전수교육관'을 찾았다. 초빼이가 좋아하는 나주반의 역사와 유래를 공부하고 작품도 보기 위함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찾아오는 사람도 뜸했던 시기, 거의 1년여 만에 외지 사람이 찾았다며 직접 반겨주시며 나주반을 알려주시던 김춘식 선생님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소반'문화는 고려 시기의 기록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이전까지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탁자와 의자를 사용하였으나 중국 한나라 시기의 '소조(다리가 짧은 상)'와 비슷한 형태의 소반을 사용하다 조선 중기에 와서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소반(다리의 길이가 긴)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소반은 초기에는 조선의 양반들이 사용하던 '상'이었다. 유서 깊은 양반집에서는 스무 개 이상의 소반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고, 가세가 기운 양반집도 최소 세 개 이상의 소반은 가지고 있어야 인정을 받았을 정도라고 한다. 격식에 맞게 좋은 재료로 만든 소반은 양반집의 기품을 나타내기도 했다. 특히 이 중에서 '해주반, 나주반, 통영반'이 가장 인정을 받았던 소반이다.*
김춘식 선생님의 가장 눈에 띄는 업적은 1930~40년대 이후 명맥이 끊긴 나주반을 오롯이 개인의 노력만으로 다시 살려내신 것이다. 나주반을 공부하기 위해 전라도 일대를 떠돌며 오래된 '헌 상'을 수리해 주며 '나주반'의 특징을 찾아내어 기록하고 상의 제작에 사용된 기법을 독학하셨다고 한다. 나주반 제작 기술을 전수해 줄 사람을 찾지 못해 옛 것에 남은 흔적을 공부하여 그 본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갔던 것이다. 선생은 이런 노력은 뒤늦게 국가의 인정을 받아 201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99호 소반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다행히 지금은 김춘식 선생님의 뒤를 잇고 있는 후계자도 양성한 상태. 다행히 한 세대는 더 나주반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김춘식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감동한 나머지 초빼이는(물론 마눌님의 은총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의 작품 두 점을 바로 구입하였다. 조그만 상을 사는 금액으로서는 굉장히 비싼 금액이었지만, 그분의 평생에 걸친 노력과 열정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한 금액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초빼이와 같은 보통의 서민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가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의 작품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조선조로 치면 왕에게 진상하는 수준의 물건을 평민이 소유하는 것과 진배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소반을 구입하며 김춘식 선생님께 몇 번이나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은 "내가 만든 작품이라고 장식장이나 벽에 걸어놓고 감상만 하면 상은 금세 망가지니 물 한잔을 마실 때도 소반에 올려 마시고 라면 먹을 때도 이 상을 쓰라"는 것이었다. 목물(木物)이다 보니 사람 손 때를 타야 하고, 가끔 행주질도 해서 건조해지지 않게 닦아줘야 한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날부터 초빼이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하나 늘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물 잔이나 라면 냄비를 올려야 하지만 사실 그러지 못했다. 초빼이에게는 우리나라에서 나주반을 제일 잘 만드시는 분이 만든 작품으로만 느껴져 선생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던 장식물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이 나주반에 올려 먹을 수 있는 멋진 음식을 찾아야겠다'라는 새로운 목표도 생겼다.
오랜만에 지인과 약속이 있어 무교동으로 향했다. 퇴직 이후의 삶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을 마친 지인과 만나는 자리. 고액 연봉을 받는 대기업의 마케팅 담당으로 있으면서도 항상 미래를 준비하며 시간을 가치 있게 쓸 줄 아는 양반이라 항상 자극이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친구였다. 다행히 두 시간 일찍 퇴근하여 5시부터 술자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날의 행선지는 서울시청 본관 뒤편의 부민옥이었다. 그동안 힘든 공부 하느라 고생한 사람에게 소주 한 잔 사주겠다고 호기를 부렸다.
정확히 5시 10분에 들어선 부민옥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예전 광화문에 근무하던 시절 점심식사를 위해 한두 번 찾았던 적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육개장을 먹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서울식 육개장의 깔끔한 맛에 꽤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날은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위해 만난 자리여서 술안주에 어울리는 메뉴를 골라야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양무침. 안주가 준비되기 전에 미리 찬이 깔렸다. 굉장히 정갈하고 때깔 좋은 반찬들이 마음에 쏙 들어왔다. 요즘 인스타그램에 떠도는 수 십 가지의 찬을 내주는 곳보단 서너 가지의 찬이지만 제대로 된 찬을 내주는 이런 식당들이 더 마음을 끈다. 눈길을 끌기 위한 화려한 겉치장보단 내면의 가치를 조금 더 중시 여기게 되었다. 어쩌면 초빼이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얻게 된 안목이리라.
마늘절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초와 장을 머금어 본래의 색보다 조금 더 짙어진 색상이 딱 좋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다. 마늘 한 톨 집어 입에 넣으니 역시 예상했던 그대로의 맛이다. 식욕을 돋울 만큼만 시큼한 맛이 굉장히 기분을 좋게 만든다. 게다가 파삭거리는 식감도 더할 나위 없다. 보통의 식당에서 많이 내놓는 제품(공장에서 만드는) 마늘절임과는 맛의 수준이 확연히 다르다. 고추장 멸치볶음도 마산에 계신 어머니가 해 주시는 것과 외형과 맛이 똑같아 놀라웠다. 진득한 고추장과 물엿으로 질 좋은 멸치를 잘 버무려 고향의 어머니 밥상을 생각나게 한다. 초빼이의 어머니는 이 고추장 멸치볶음을 만들 때 멸치를 따로 세척하거나 다듬지 않고 사 온 그대로 양념을 하고 볶아 주셨다. 그래서 어머니의 멸치볶음은 강렬한(비린내가 아닌) 멸치향이 정말 좋았던 기억이 난다.
소맥 한 잔을 냉큼 들이켠다. 약속시간 전 다른 노포에 취재차 들려 이미 소주 한 병을 마신 상태지만 이 좋은 찬에 술 한 잔 곁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음식을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 잔이 된다. 양무침이 나오기 전에 이미 맥주 한 병을 비웠다.
소의 양은 네 개의 위 중 첫 번째 위 부위를 지칭하는 말이다. 소 위의 85%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큰 부위인데 두툼하고 쫄깃한 식감이 좋은 부위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양깃머리는 양의 근육조직(융모를 덮어 싸고 있는 부분)을 말하는데 근육이 발달하여 탄탄한 식감이 정말 좋은 부위다.
부민옥의 양은 이 양의 융기가 있는 부분을 사용하는데 위의 안쪽이라 생각하면 된다. 부드럽지만 쫄깃하다. 조금은 변태적인 그 식감의 재료에 재료 본연의 맛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양념을 했다. 거의 느낄 수 없는 수준이다. 촉감은 초빼이가 과하게 좋아하는 노루궁둥이 버섯의 촉감처럼 바스스하게 부드럽지만, 식감은 양깃머리보다 덜한 쫄깃함을 품고 있다. 그런 재료를 아끼지 않고 듬성듬성 큼직하게 잘라 놓았다. 양만 많아 보이고 재료를 아끼기 위해 가늘고 길게 썰어 제대로 된 식감조차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양을 내는 다른 집들과는 마음 씀씀이가 다르다. 이미 이 차이에서 승부는 끝났다. 지금까지 먹어본 양무침 중에서는 최고의 수준. 술이 술을 부르고, 양무침이 술을 부른다.
소주병의 개수가 늘어나며 국물이 필요해졌다. 곱창전골을 주문했다.
부민옥에는 다른 국물안주도 많았지만 곱창전골을 먹어보고 싶었다. 육개장도 좋았고 술국도 사람들이 많이 찾았으며 선짓국은 리필도 많이 해주셔서 많이 찾았지만 그래도 곱창전골을 택했다. 양무침을 먹어보니 이 집에서는 제대로 된 맛있는 곱창전골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좋은 사람과 하는 자리인데 좀 더 좋은 음식을 같이 하고 싶은 욕심도 앞섰다.
사실 처음엔 조금 당황했었다. 투명한 냄비 뚜껑으로 보이는 곱창이 냉동이었던 것. 소곱창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곱창전골은 나름 찾아서 먹는 편이어서, 냉동으로 나오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전골냄비 속을 소곱창과 새우, 떡국 떡과 두부 그리고 버섯과 쑥갓 외의 다양한 채소들 홍콩의 건물들처럼 빽빽이 채우고 있다. 한뿌리에 875원이라는 대파도 아낌없이 넣었다. 전골이 끓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조금은 투명하게 고여있던 육수가 사나운 짐승처럼 냄비 안에서 으르렁거리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아직은 손을 댈 시간이 아니다. 한소끔 전골이 끓어오르면 국자로 잘 휘저어 준다. 그리고 불을 줄인 후 다시 기다린다. 적어도 '온 세상 정글의 호랑이가 모두 녹아버려 버터가 되어버릴 만큼'의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가볍게만 보이던 전골 국물이 자발적 돼지인 초빼이의 몸무게처럼 조금씩 무게를 더하기 시작한다. 새털처럼 가볍던 육수가 화산 속 마그마처럼 '위태롭게' 끓어오른다. 이제야 기다림은 끝이 났다. 세상 어떤 국물요리가 오래 끓이면 진해지지 않을까만은 부민옥의 곱창전골에 이르러서는 그 정도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제법 깔끔함을 지켜내고 있는 것은 어쩌면 저 큼지막한 새우 몇 마리가 제 역할을 다 해냈기 때문인 듯하다. 여느 집의 곱창전골과는 차이가 분명히 있었다.
부민옥의 이름은 부산의 부민동이라는 곳의 지명을 따 왔다고 한다. 이북 분이시던 2대 사장님의 부친께서 부산으로 피난 와 부민동에서 살던 분과 결혼하여 영업을 시작하였고 서울로 올라오게 된 케이스. 이북 출신의 어르신이 파는 부산 음식이라니! 퍼뜩 나주반을 사며 고민했던 작은 목표가 떠 올랐다. 소박한 크기의 나주반에 어울리는 한 접시의 음식을 드디어 찾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피난민이었던 현재 사장님의 아버님과 결혼하신 부산 출신의 1대 사장님이 만들어 낸 '부산식 양무침'을 나주 출신의 국가무형문화재 장인이 만드신 나주반에 올리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남과 북이 만나 부부가 되고, 음식과 도구는 경상도의 것과 전라도의 것이 만나게 되니 더할 나위 없다. 그야말로 부민옥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남과 북이 만나고 동과 서가 함께 한다. 드디어 몇 년간 끌어 온 어려운 숙제를 하나 끝마쳤다. 다시 소주 한 잔.
부민옥을 나오며 몇 병의 술을 마셨는지도 기억에 나지 않는다. 게다가 영수증도 그냥 버리고 나왔으니 확인할 길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집으로 가는 전철에서 다시 잠들어 버렸다는 것과 다시 인천역의 그 익숙한 얼굴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인천역에 전용 택시도 만들어야 할지 고민도 해봐야 할까?
* 주영하,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서울 : (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 2018년 1월 10일, p.61~101, 참고 및 요약
[메뉴추천]
1. 1인 방문 시 : 육개장, 선지국 또는 비빔밥 + 소주
2. 2인 이상 방문 시 : 육개장, 선지국 또는 술국 + 양무침(소) + 소주
3. 3인 이상 방문 시 : 양무침(중) + 곱창전골(소) + 소주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가게 앞 주차공간이 있다. 단 옆 매장과 공용으로 쓰는 곳이라 자리가 없을 수 있음. 인근 공영주차장 이용.
2. 월~토 11:00~22:00 / 정기휴무 매주 일요일 / 브레이크 타임 15:00~17:00 / 라스트 오더 21:00
3. 참고
- 육개장, 비빔밥, 양무침, 곱창전골은 필수.
- 부산찜은 부산식 해물찜이다.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인천집, 대원집, 용금옥, 북어국집, 남포면옥, 참숯골, 오륙도, 도리방, 청송옥, 송옥, 현대
칼국수, 초류향, 이북만두, 낙동강, 을밀대, 도리방 등
- 2차는 인근 무교동과 다동의 노포들을 추천한다. 서울에서 몇 남지 않은 노포의 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