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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빼이 Jul 04. 2024

초빼이의 노포일기[전남 목포시 상락동 해남 해장국]

먼 곳에서 찾아오시는 손님에게 올리는 정성스러운 끼니 또는 술국.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짧은 기간 안에 급속도로 늘어났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58.7세이던 남자들의 평균 수명은 2020년에는 80.5세까지 늘어났다. 50년 만에 평균 수명이 21년이나 늘어난 것. 그 당시 40대 남자 어른은 거의 할아버지 대우를 받았고 60세를 넘으면 장수(長壽)한 축에 들었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신 친할머니는 84세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당시에는 굉장히 희귀한 사례 중 하나였다. 


오후반 수업 중에 교무실로 불려 가 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창원군(당시 창원은 군(郡)이었다. 1980년도에 시(市)로 승격되었다.)에 있던 할머니의 댁으로 갔다. 사실 그때는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다. 굉장히 넓었던 할머니 댁 마당에는 널찍한 가마니가 깔려 있었고, 그 위로 두터운 흰색 천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할머니 댁을 찾을 때마다 숨겨둔 사탕을 꺼내주시던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마당에 잔뜩 깔린 상에는 얼굴도 모르는 친척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할머니 댁이 있던 동네는 일가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이어서 동네 사람들의 얼굴도 모두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찾을 때마다 누런 색 '베’로 만든 두건과 상복을 입고 있던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큰 소리로 울며(곡을 하며) 손님을 맞았다. 새끼로 꼬은 줄을 두른 굴건과 한복이 입고 싶어 “나도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썼던 기억도 난다. 


‘초상(初喪)’이라는 표현으로 함축할 수 있었던 할머니의 장례식은 시신을 모신 '꽃상여'를 많은 사람들이 어깨에 이고 동네 뒷산(선산)에 매장하고 오는 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초빼이는 할머니를 보내는 길에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새벽 3시경 출발했던 할머니의 상여길을 결국 따라가지 못했다. 5일장인지 7일장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며칠 동안 많은 분들이 그 시골까지 찾아오셨다. 먼 길을 찾아오는 분들을 위해 마당 한편에서 돼지를 잡았다. 동네의 친척 형 몇몇이 손을 더했다. 그 옆에는 큰 가마솥이 끓고 있었고 머리 고기와 수육, 그리고 칼칼하게 끓인 돼지고기 국이 손님들의 상에 올랐다. 손님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 장례 중간 돼지 한 마리를 더 잡기도 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그야말로 호상(好喪)이자 축제였다.   


우리나라의 장례식에서는 음식을 제공한다. 장례 문화가 현대화된 요즘의 장례식장에서도 음식을 먹는 공간을 별도로 제공하고 심지어 음식을 판매하기도 한다. 망자의 시신을 모시고 습(襲)하고 염(殮)하여 매장하는 일까지 망자의 집에서 이뤄진 경우가 많았던 옛 장례식에서는 가족들이 직접 음식을 해 조문객들에게 제공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각 지역 고유의 향토 음식들이 상가나 잔치집에서 상에 올랐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고기국수나 돔베고기는 제주에서 큰 일을 치르던 집에서 내던 음식이었다. 경상도의 소고기 국도, 서울의 육개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목포에서 찾았던 해장국집의 뼈다귀 해장국도 전남 진도지역에서 애경사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내던 음식이라 했다. 오늘 소개할 집은 목포의 해장국 노포 '해남 해장국'집이다.   

이 집을 찾기 위해선 반드시 전제 조건이 있다. 

이 집을 찾기로 한 전날 반드시 술을 마셔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입은 바짝 말라있고, 입에서는 어젯밤의 술냄새가 솔솔 풍겨 나오고 온몸이 누군가에게 맞은 듯 힘을 쓸 수 없는 그런 상태여만 한다. 초빼이도 그런 상태를 겨우(?) 만들어 숙소를 나섰다. 운 좋게 딱 차 한 대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하여 바로 차를 세우고 대기줄에 섰다. 유리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해장과 식사를 위해 찾은 사람이 가득이다. 대체로 어른들의 얼굴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것이, 이미 어젯밤부터 전제 조건을 달성한 사람들이다. 이 집의 해장국을 먹을 자격이 충분하다. 네댓 팀이 나오고 나서야 겨우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집의 메뉴는 단 두 가지. 원조 돼지뼈해장국과 전복 콩나물해장국이 전부다. 

앞서 언급했듯 돼지뼈해장국은 진도의 장례나 잔치집에서 나오던 음식이었다. 분명 돼지 한 마리를 잡았을게다. 돼지를 삶은 육수에 머리와 살코기를 따로 모아 수육으로 내고 목뼈와 등뼈를 더 고아 국으로 만들었다. 뼈에 붙은 살코기에 인색하지 않았다. 보통의 장사집들은 '칼끝에서 돈이 나온다'는 정육업계의 룰을 따라 거대한 뼈 곳곳에 붙은 살을 알토란같이 발라내겠지만, 상가나 잔치집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 국을 먹는 사람들은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이거나 친인척들이었기 때문이다. 살코기 덩어리의 크기만큼 감사의 마음을 담았을게다.   


당연히 원조 돼지뼈해장국을 주문했다. 음식을 맞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함께 내주는 반찬은 5찬. 서민의 밥상이다. 깍두기와 김치, 콩나물, 매운 고추와 양파, 그리고 된장까지 총 다섯 가지. 깍두기는 잘 익어 입에 착착 감기고, 콩나물도 좋다. 생양파를 집어 먹다가 작은 조각은 국물에 넣어 버린다. 조금 두면 양파의 단맛도 우려 나올 터. 한눈에도 매워 보이는 고추를 겁 없이 베어 물다가 진정시키는데 꽤 고생했다. 이런 매운 고추는 요즘 만나기 힘든데, 이 집에 있었다. 유난히 매운 고추를 좋아하셨던 돌아가신 외삼촌 생각도 난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접에 담긴 뼈다귀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서울의 애정하는 '동원집' 감잣국에서나 떠 올릴 수 있는 메머드급 존재감. 이 정도의 뼈다귀라면 젓가락보다는 손을 사용하는 것이 낫다. 물티슈로 깨끗하게 손을 닦고 뼈다귀 하나씩을 잡은 후 해체작업을 시작한다. 파란색 라텍스 장갑만 낀다면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도 부럽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다.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는 부분은 젓가락을 들어 더 집요하게 파고든다. 관절로 연결되어 있는 부분은 손에 조금만 힘을 주고 역으로 꺾으면 쉽게 분리된다. 딱 손으로 먹기 좋을 만큼 제대로 삶았다. 살코기 향을 참지 못하고 가끔 입으로 그냥 뜯기도 한다. 


담백하면서도 육향이 살아있다. 보통의 감자탕이나 뼈다귀 해장국에서 찾을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진득하고 칼칼한 양념 대신 담백함을 살결에 담았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색다름이 더욱 집요하게 뼈다귀에 집착하게 한다. 앞접시에 모아둔 살코기가 산처럼 쌓이면 몇 점을 집어 먹다 다시 해장국 국물이 가득한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았다. 국물을 다시 머금게 해 부드러운 식감을 살리려는 의도. 당연하다는 듯 공깃밥을 국물에 투하한다. 그리고 후추와 고춧가루도 조금씩 첨가한다. 한 수저에 올라오는 밥 알갱이와 돼지 살코기가 잘 어울린다. 이질적인 식감의 두 식재료가 입안에서 만나 비로소 조화를 이룬다. 입안 가득 채운 살코기에 이 음식은 해장국이 아니라 술국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하게 된다. 어차피 먼 길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음식의 명칭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밥때 내면 끼니가 될 터이고, 술을 곁들이면 술국이 되고, 새벽 녁에 내면 해장국이 되었을 테니 의미 없는 용도의 구분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배를 든든하게 하고, 지난밤 술에 시달린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면 그걸로 그만인 것을.  


뼈다귀 해장국 국물도 범상치 않다. 참으로 담백하고 슴슴하다. 그리고 시원하다. 일반 뼈다귀 해장국들이 함흥냉면과 같은 양념을 끼얹은 냉면이라면 이 집의 해장국에서는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는, 슴슴한 평양냉면과 같은 느낌을 얻을 수 있다. 한두 수저 뜨는 국물에 하루종일 이 국물만 마시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간이 세지 않으니 어떤 첨가물 없이 돼지고기를 삶았을 때 맡을 수 있는, 그런 향이 난다. 이 향에서 호불호는 갈릴 수 있을 듯하다. 돼지고기 본연의 향과 오랜 시간 보관한 고기에서 나는 누린내는 다르다. 뼈다귀와 파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넣지 않은 '국'이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반칙이다. 돼지머리와, 다리, 갈비 등을 함께 끓여 국물을 내고 소금 간만 슬쩍한 국이 이런 맛을 내다니.      

음식을 먹는 속도를 늦췄다. 오랜만에 만난 맛있는 음식을 급하게 먹으며 허투루 대할 수 없었다. 목포에서의 마지막 음식이기도 했다. 실낱같은 맛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까 조심하며 입에 넣었다. 한점 한점 살코기를 씹다 보니 소주 생각이 났다. 초빼이에겐 이 집의 음식이 해장국이자 술국처럼 느껴졌다. 아침 식사를 위한 한 끼라는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이 집에서 열차시간 전까지 술을 마시다 항상 급하게 나간다는 내용을 담은 지역 방송의 다큐멘터리가 떠 올랐다. 이제야 충분히 공감되었다. 음식의 목적이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의지를 벗어나 먹는 사람의 용도에 맞춰진다. 이 집을 끝으로 창원으로 향하는 길이라 술을 곁들일 수 없는 것이 정말 아쉬웠다. 옆 테이블의 가족들은 호불호가 나뉘는 것 같았다. 중년의 부부는 마음에 들어 하는 반면 20대로 보이는 딸 두 명은 조금 꺼려하는 눈치다. 저이들에겐 아마도 돼지고기 육향이 낯설게다. 강한 양념과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요즘 젊은 친구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다.  


해남 해장국은 1972년 현재의 매장 바로 옆에서 장사를 시작하여 무려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뼈다귀 해장국만 냈다. 1대 사장님께 물려받은 매장을 지금은 2대 사장님이 직접 운영하신다. 한동안 아버지의 음식맛을 내지 못해 손님들에게 많은 욕을 먹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고개를 들어 주방을 보니 다큐멘터리에서 본 2대 사장님이 바삐 오가며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직접 관여한다. 이런 집은 인정해줘야 한다. 많은 가게들의 사장님들이 방송 출연이나 사회적 관계망에 알려지며 소위 '대박이 나면' 일선에서 물러나며 음식에서 손을 떼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많은 경우 그 시점부터 음식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초빼이는 자주 보았기 때문에 주의 깊게 보는 점 중의 하나이다. 그런 집들의 영화(榮華)는 몇 년을 가지 못하는 것이 자명하다. 이 집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안도와 안심, 그리고 육체의 위안까지 덤으로 얻은 노포다. 다음엔 차를 버리고 목포로 와 열차시간 직전까지 꼭 소주를 마시고야 말겠다. 

 

[메뉴추천]

1. 1인 이상 방문 시 : 원조 뼈다귀해장국(또는 전복콩나물해장국 인원수대로) + 보해 잎새주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전용 주차장은 없다. 매장 근처에 주차를 하거나 길 건너편 목포역 공영주차장에 주차해야 한다.

2. 월~일 07:00~22:00 / 휴무일 매달 1,3째 화요일 / 브레이크타임 14:00~17:00  

3. 참고

    - 목포역을 등 뒤로 두고 왼편에 있다. 

    - 원조뼈다귀해장국은 꼭 드셔보시길. 이 집의 대표 메뉴이다. 

    - 웨이팅을 꺼리시는 분은 바로 옆집 '은지네해장국'으로 가셔도 된다. 대기가 길어지자 몇몇 분들은 

      그곳으로 가시는 분도 있었다.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김정림 선지해장국, 선경준치횟집, 유달콩물, 코롬방제과, 대청, 영암갈비, 중화루, 청자횟집, 

      동궁가물치, 원조제일돌곱창, 너구리식당, 태동식당, 독천식당, 만선식당, 영암식당, 덕인홍어집, 섬마을

      식당, 춘광식당, 장터식당, 영암떡갈비, 명신식당, 삼학복집  등 

    - 목포역에서 조금만 걸어내려 가면 목포시 무안동(구 도심)에 갈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노포들 거의 

      절반 가까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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