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천 노포 경양식 집에서 추억을 먹다
경양식(輕洋食).
가벼울 '경(輕)'자와 '양식(洋食)'이라는 단어를 덧붙여 만든 단어로 뜻을 풀자면 '가벼운 양식'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경양식의 기원은 일본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일본에서 현지화 한 서양요리인 '요쇼쿠(洋食, ようしょく)'가 우리나라로 들어와 다시 우리 사정에 맞게 변형되어 정착한 서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요쇼쿠 협회는 '요쇼쿠'를 "쌀밥을 먹는 일본에 맞게 독자적인 진화를 이룬 서양 요리"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쌀밥을 먹는'이라는 부분이다. 서양의 식사에 쌀밥이 가미되었으니 서양식 음식은 부재료나 반찬의 역할을 하게 된다. 게다가 서양인들이 사용하는 식재료를 모두 구할 수 없었으니 일본에서 나는 식재료로 대체하거나 생략하기도 했다. 이렇게 생겨난 요리들이 "돈카츠(포크커틀릿), 카레라이스, 고로케, 에비프라이(새우튀김), 오므라이스"와 같은 요리다.
서양인이 운영하던 '서양인을 위해서 만들어진 식당'에서 시작한 일본의 '서양요리'는 이곳에서 일하던 일본인들이 독립하여 자신들의 가게를 세우며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고, 체구가 작은 일본인의 체질 개선을 한다는 명목하에 군대의 급식과 야전 식량에도 서양식을 도입되게 되며 대중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일본은 1천 년 가까이 유지되어 온 톈무 천황의 '육식금지령'으로 인해 육식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던 곳. "고기도 먹어본 놈이 고기 맛을 안다"는 말처럼 육식금지령이 해제되었어도 한동안은 고기에 대한 수요가 높지 않았다. 이에 메이지 유신 정권이 직접 육식을 장려하고, 메이지 천황이 직접 나서 고기를 먹는 퍼포먼스를 보인 후에야 서서히 육식을 시작하였다고 하니 일본에서도 서양요리가 자리를 잡아나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배경을 가진 '요쇼쿠'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 개화기 시절 하나씩 생겨나던 서구식 호텔의 양식당과 1925년에 문을 연 한국 최초의 경양식 식당인 서울역(당시 경성역) '그릴(Grill)'이 생겨나면서 우리나라의 경양식 역사는 첫 발을 떼기 시작한다. 물론 당시에는 일본을 뜻하는 '화(와)'자가 붙어, '화(和)양식'이라고도 불렸으나 5~60년대에 접어들며 곧 '경양식'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경양식이 우리나라 외식시장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는 7~80년대이다.
초빼이가 처음 '경양식'을 접했던 것도 그때쯤인데(70년대 말 또는 80년대 초), 마산 창동에 있던, 유일의 백화점인 '한성 백화점' 지하 '한성 경양식'에서 '함박스테이크'를 먹었던 경험이다.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무려 5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이유는 난생처음 맡아본 고급스러운 음식의 향과 맛 때문이었다. 때마침 '한성 경양식'을 운영하던 대표가 초빼이와 나이 차이가 많은 친척 누님이어서 부모님과 함께 개업 축하 인사를 위해 찾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빼이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에게는 '경양식'이라는 음식에 대한 교집합과 같은 추억이 있다.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서양식 식사에서 느낄 수 있는 고급스러운(이라 여겨지는) 맛과 향, 그리고 남들은 쉽게 먹지 못하는 비싼 음식을 먹어 보았다는 경험일 것이다. 왜 오래된 한국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씬(scene)이라 할 수 있는 '경양식 집에서의 외식'과 같은 것 말이다. 시간이 흐르며 '경양식'은 점점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1989년 해외여행의 자유화 조치 이후 '진짜 서양식'을 경험해 본 사람이 늘어나며 그 희소성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8~90년대 유행했던 피자 레스토랑과 패밀리 레스토랑 그리고 스테이크 하우스도 경양식업의 쇠락에 손을 보탰다. 또한 경양식 집의 대표적 메뉴였던 돈까스나 함박스테이크, 생선까스는 경양식 집 메뉴에서 떨어져 나와 '김밥천국'과 같은 분식집의 대표 메뉴가 되며 '특별한 음식'에서 '일상의 음식'으로 새로운 자리로 옮겨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경양식' 집의 돈까스나 '정식' 메뉴가 한 번씩 그리울 때가 있다.
'루'를 써 주방장이 직접 만들었던, 모 대기업의 제품을 써서 만들었던 상관없다. 야채수프가 하얀 수프 그릇을 넘칠 듯 담겨 나오고, 경양식 집에서만 볼 수 있던 '후추통'을 집어 잘 섞일 것 같지 않은 후추를 마구 뿌린 후 큼지막한 수저로 떠먹을 때 느낄 수 있던 그 희열이 그립기도 하다. 거기에 조금은 언밸런스 한 보우타이를 멘 직원이 다가와 "밥으로 하실까요? 빵으로 하실까요?"하고 묻던 그 장면도 다시 겪어보고 싶은 기억 중 하나이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며 고급스러운 '맛과 향의 기억'이 점점 경양식 집 특유의 '분위기'에 대한 그리움으로 바뀌었다.
이런 욕구가 일 때마다 초빼이는 동인천역으로 향한다. 인천 경양식 노포 중 하나인 '잉글랜드 돈까스'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초빼이가 사는 아파트 상가의 2층에도 '국제 경양식'이라는 관록 있는 노포 경양식 집이 있지만 그 집에서는 이젠 이런 느낌을 기대하기 힘들다. 요즘의 현대식 식당과 같이 너무 세련되고 깨끗하게 바뀌었기 때문. 그래서 경양식이 그리울 땐 굳이 멀리 동인천의 잉글랜드 돈까스를 찾는다.
7~80년대 우리나라의 외식 시장은 '경양식과 중식'으로 함축할 수 있었다. 1981년에 개업한 잉글랜드 돈까스는 '경양식'이 우리 외식업계를 대표하던 시절 개업했던 것. 그런 시대의 트렌드를 고려하면 '동인천'이라는 선택도 꽤 적절하였다. 동인천과 인천역 인근은 오래된 노포 중식집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며 당시 인천의 최고 번화가이기도 했다. 코로나 기간 잉글랜드 돈까스는 대대적으로 내부 수리를 진행하며 예전의 분위기는 그대로 살린 체, 노포에서 느껴지던 묵은 내와 진득거림을 한 번에 빼 내버렸다. 그리고 좌석도 늘렸다. 아마도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코로나 시기가 끝난 이후 대기줄은 더욱 길어졌다.
오랜만에 경양식 집의 수프와 후추향이 그리워진 어느 날 잉글랜드 돈까스를 다시 찾았다. 아침 일찍 서두른다고 했지만 도착해 보니 20여 분 대기. 예전보다 손님이 더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다. 서둘러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주문을 위해 메뉴판을 뒤적인다. 돈까스와 생선까스가 함께 나오는 '반까스' 2인분이 오늘의 선택. 함께 찾은 마눌님도 옛 경양식 집의 추억에 빠진 듯 고개를 가만히 두지 못한다. 두리번거리며 자리에 앉아 있으니 직원분이 다가와 수프와 샐러드는 셀프바에서 직접 들고 와야 한다고 안내해 준다. 내부 수리 이후에 달라진 점이다. 요즘 직원을 구하기 쉽지 않으니 이런 수를 낸 듯하다.
수프 그릇이 넘칠 만큼 수프를 담고, 양배추 샐러드도 접시 높이보다 더 높게 올려 담았다. 그리고 염원한 대로 수프에는 후추를 가득 끼얹고 양배추 위로 경양식 집의 대표적 드레싱 소스인 케요네즈(케쳡과 마요네즈의 혼합. 서전 아일랜드 드레싱의 일종)를 흩뿌린다. 이미 이 비주얼에서 레트로는 절반 이상 완성되었다. 잉글랜드 돈까스가 특이한 것은 단무지와 깍두기도 제공한다는 점. 아마도 느끼한 경양식이 조금은 생경스러웠던 80년대의 고객을 위해 준비했던 초기의 서비스가 이젠 전통으로 굳어진 듯하다.
세상에는 많은 논쟁거리가 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논쟁거리 몇 개가 경양식 집에는 아직 있다.
우선 수프를 먹을 때 숟가락 질 하는 방법에 대한 논쟁이다. 우리가 밥 숟가락을 놀리듯 수저의 바닥이 몸 쪽을 보게 하면서 안으로 퍼 올리면 안 된다. 숟가락의 등이 내 몸 쪽으로 향하게 하여 바깥쪽으로 놀리며 수프를 떠야 제대로 된 격식이라는 논쟁. "이게 맞니, 그런 건 상관없니"하며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숱하게 논쟁하던 기억도 떠 오른다. 사실 무엇이 맞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도 아직 모른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다. 음식을 맛있게 즐길 수만 있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기대한 대로 보우타이를 멘 직원이 다가와 주문할 음식을 묻고, "밥으로 하실까요? 빵으로 하실까요?"라고 덧붙인다. 몇십 년이 지나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되풀이하는 질문이다. "밥 하나, 빵 하나요" 전형적인 질문에 전형적인 대답이 돌아간다. 직원분은 주문 사항을 적은 후 주방으로 돌아가 주문을 넣는다. 수프 그릇을 다 비울 때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테이블 위로 추억이 채워진다. 널찍한 돈까스 한 장이 접시의 2/3을 채우고 그 옆으로는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생선까스 두 조각이 올려져 있다. 다시 그 위로 슬라이스 한 레몬 한 조각과 타르타르소스를 담은 작은 종지가 자리를 잡았다.
경양식 집에서 유명한 또 다른 논쟁은 접시에 넓게 펴서 나온 밥을 먹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수저로 퍼먹거나 포크를 수저처럼 사용해 떠먹는 것도 예전엔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포크를 든 체 포크의 등을 밥 위에 놓고 지그시 눌러 밥이 떨어져 나온 만큼 먹는 게 배운 사람들의 방법이라 인정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자면 밥 자체를 먹지 않는 서양인들이 포크로 밥을 먹을 일이 어디 있었을까? 양식에 밥을 곁들이는 것은 일본과 우리밖에 없었을 테니 아마도 두 곳 중 한 곳에서 만들어 낸 허세가 아닐까?
따끈하게 데워 나온 모닝빵의 향이 이 날따라 무척 마음에 들었다. 생선까스의 포슬포슬한 향과 촉감도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경양식 집 특유의 타르타르소스의 향이 이 날따라 더욱 강렬했다. 보통 생선까스와 돈까스가 함께 나오면 돈까스를 다 먹은 후 생선까스에 손을 대는 편인데, 이 날은 순서를 바꿨다. 생선까스의 향이 워낙 좋아 돈까스의 향을 압도했기 때문. 포크로 고정하고 나이프를 대면 '서걱'하는 소리와 함께 바스러지는 생선까스의 촉감이 생경스러울 정도로 잘 튀겨졌다. 포크로 타르타르소스를 조금 떠 생선까스에 바른 후 입에 넣는다. 바삭거리는 튀김가루의 식감은 순식간. 뜨거운 흰 살 생선의 맛과 향이 바로 치고 올라온다. 그 뒤를 바치는 타르타르소스의 기름진 맛까지 합이 좋다. 역시 튀김옷이 바삭할 때 먹는 생선까스의 맛이 좋다. 돈까스의 순서를 뒤로 미룬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
돈까스로 나이프를 옮긴다.
얇게 편 등심을 빈틈없이 튀김옷이 감싸고 있다. 생선까스에 집중하느라 튀김옷이 눅눅해졌을까 조금 걱정했지만 나이 든 아재의 기우였다. 적당히 소스를 머금은 돈까스의 맛은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옛날 돈까스의 맛과 일치한다. 한 조각 한 조각 잘라내 입으로 넣는다. 예전엔 돈까스 집에서 소주도 많이 마셨던 기억도 난다. 돈까스 조각과 양배추 샐러드를 반으로 가른 모닝 빵에 넣어 미니 버거로 만들어 먹는 이들도 보인다. 가끔 상상도 못 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는 친구들이 있다.
접시를 다 비우지 않았어도 사실 이 집을 찾은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
경양식 집의 수프와 후추향을 이미 맡았고, 보우타이의 직원에게 "To Be or Not to Be"보다 더 중요한 '밥이냐 빵이냐'의 선택을 요구받았다. 경양식집은 적어도 초빼이에겐 맛보다는 추억의 영역이었던 것이었다. 배운 사람답게 수프를 떠먹을 때도 교양 있게 해 보았고, 접시에 담긴 밥도 포크로 지그시 눌러 먹었다. 게다가 이 집 잉글랜드 돈까스의 음식 맛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니 더 이상 무얼 바랄까?
화려했던 시간을 잊어가는 동인천역 인근 옛 동네에서 조그만 노포 경양식 집이 홀로 이렇게 빛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추억 한가득 배불리 먹었다.
[메뉴추천]
1. 1인 이상 방문 시 : 메뉴 중 선택(인원 수대로)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전용 주차장은 없다. 가장 가까운 주차장은 용동 공용주차장과 동인천 1번 주차장이다.
2. 화~일 11:30~20:30일 / 월요일 정기휴무 / 브레이크타임 16:00~17:00 / 라스트 오더 15:00, 19:30
3. 참고
- 주말은 무조건 오픈런해야 한다.
- 주말에는 재료소진으로 인해 일찍 문을 닫는 경우도 있다.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다복집, 대전집, 인천순대, 행복식당, 늘봄식당, 중앙옥, 명월집, 중화방, 해청갈비탕, 일미정,
신포주점, 경인면옥, 용화반점, 신신옥, 명동식당, 삼강옥, 덕적식당, 맷돌칼국수, 마냥집, 중화루, 등대
경양식, 토시살숯불구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