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기슭에서 매일밤 펼쳐지는 이상한 해산물 축제
처음 이 집을 알게 된 것은 한참 산에 미쳐 다니던 2007년도 어느 날이었다.
예전 함께 산을 다니던 서울 토박이 형 한 분이 자신이 다니는 애정하는 집이라 소개해줬는데 나 또한 첫 번째 방문 이후 바로 이 집의 팬이 되어 버렸다. 초빼이와 10년을 넘게 한 지붕을 이고 살고 계시는 마눌님과의 첫 데이트 장소로 1차 필동냉면, 2차 필동해물을 선택했을 만큼 좋아하는 집이 되어 버렸다.
충무로역 4호선 1번 출구로 나와 대한극장 옆 신한은행을 끼고 오른편으로 돌아 남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작은 삼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몇 걸음만 더 올라가다 보면 필동해물을 만날 수 있다. CJ인재원이 들어오면서 동네의 분위기는 예전과 확연히 다르게 변하였지만, 도로보다 더 낮을 것 같은 지붕을 이고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나지막한 건물이 눈에 띄기 시작하면 그곳이 바로 필동해물. 매번 이곳을 찾을 때마다 느끼지만 세월의 무게에 눌려 점점 더 가게의 천정이 낮아지는 듯한 느낌이랄까?
사실 이 집은 필동면옥에서 냉면과 만두, 그리고 제육에 1차를 하고 부담 없는 2차를 위해 들리는 초빼이만의 '필동 투어'코스 중에 하나이다. 조금은 작아 보이는 흰색 에나멜 접시에 쑥갓이나 미나리를 바닥에 깔고 갖가지 해산물이 듬뿍 올려 나오는데 이곳이 서울 한복판 남산 기슭에 자리 잡은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선도 좋은 해산물을 낸다.
게다가 서비스로 내놓는 홍합탕 한 그릇에는 90년대 종로와 을지로 일대를 가득 메웠던 포장마차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나기도 한다. 괜스레 꼰대 같아 보일까 봐 쓰고 싶지는 않지만 '라떼는(나 때는)' 포장마차에 가면 홍합탕은 입장과 동시에 테이블에 자동으로 올라오는 그런 기본 안주였었다. 게다가 돼지껍데기도 단골을 위한 서비스 안주에 반드시 포함되었던 항목이던 시절이었으니, 요즘의 포장마차와 예전의 포장마차 사이에는 확연히 느껴지는 간극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
이 필동해물도 처음엔 작은 노점 포장마차에서 시작했던 가게라고 이 집을 소개해준 형에게 들었다.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자주 찾았던 집이라나? 홍합탕을 아직도 기본 안주로 내는 것은 아마도 포장마차였던 초기의 그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하게 된다.
홍합도 꽤 물이 좋은 녀석들로 골라 선도도 좋고 손질도 꼼꼼히 잘하셔서 입에 넣어도 거슬리는 것이 없다.
게다가 홍합을 삶은 국물에 딱 소금간만 하여 홍합의 향과 맛을 극대화시켜 뽑아내는데, 사실 이게 뭐 어려울까 싶지만 기본을 잘하는 집을 찾기 힘든 것도 현실이니. 여하튼 이 홍합탕 한 그릇이면 그 자리에서 소주 1병은 그냥 비울 수 있을 정도. 홍합을 더 원한다면 추가로 요청할 수 있다.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주문을 하면 되지만,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둠을 많이 주문하는 편이다.
메뉴에 있는 다양한 해산물(해삼, 소라, 멍게, 오징어, 생굴, 개불 등)을 먹기 좋게 손질하여 내주시는데 웬만한 횟집 부럽지 않다. 게다가 2차로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볼륨감이 적은, 다양한 해산물을 안주로 술을 곁들일 수 있어 좋은 선택이기도 하다. 계절에 따라 나오지 않는 메뉴도 있으니 이 점은 반드시 참고할 것.
해물에 매운 고추나 마늘을 집어 들고 함께 나오는 초장에 찍으면 필동해물 유니버스는 시작된다.
해산물의 비린내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적어도 이 집에서는 걱정을 내려두어도 된다. 적어도 스무 번은 넘게 찾았던 초빼이의 경험상 이 집 해산물의 선도에 대해서는 확실히 보장 가능. 매운 고추나 마늘을 함께 곁들이면 입이 개운하게 할 수 있고 바닥에 깔린 쑥갓이나 미나리를 함께하면 좋은 향과 함께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가끔 이 집을 생각하다 보면 중국 둔황의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 월아천(月牙泉)이 떠 오른다.
모든 것이 메말라 버린 사막의 한가운데, 초승달 연못은 아마도 언제 여정이 끝날지도 모를 실크로드의 긴 여정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축복과 같은 의미를 지닌 곳이었을 터. 필동해물도 이와 다를 것 없을게다.
고향을 떠나 연고도 없는 거대한 도시의 메마른 대기 속을 매일매일 목적지도 모른 체 뛰어다니는 요즘 사람들에게 잠시 함 숨 돌릴 수 있는 안식처와 같은 곳. 바다가 아닌 '서울의 진산'인 남산기슭에서 바다의 축복받은 산물을 풍족하게 내어 주는 곳. 육신과 영혼이 안도할 수밖에 없는 장소이다.
거나하게 취한 취객의 발길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이 집으로 향한다.
기분 좋은 신선한 해물안주가 홍합탕 향과 어우러져 자신들만의 이야깃거리를 끊임없이 내놓고 있다. 마치 유럽 전역을 떠돌던 중세의 이야기꾼이나 음유시인들처럼 모두가 큰소리로 떠벌리고 흥겹게 술을 청한다.
게다가 어느 유명한 바닷가의 횟집보다 훨씬 더 저렴한 가격으로 해산물 안주에 소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이 집을 찾는 이들만 가능한 경험. 갈수록 얄팍해지는 직장인들의 주머니 사정도 이곳에서는 그리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매일 밤 남산 한 기슭에서는 신선한 해산물 축제가 흥겹게 열리는 것이 가능하다.
주머니가 가벼운 도시의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파티다.
[메뉴추천]
1. 이 집도 혼자서 방문하는 분은 한 번도 못 보았다. 가끔 혼자 찾아가 소주 한 잔 하고 싶기는 하다.
2. 2명 방문 시 : 모둠 해물 + 소주
3. 3명 이상 : 모둠 + 소주 + 선호하는 해물 메뉴 추가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주차는 어려운 편이다. 곳곳에 주차단속 카메라가 잔뜩. 인근에 민간 주차장이 여러 곳 있으니 그곳을 이용
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2. 초빼이의 필동투어 코스를 소개하자면, 1차 필동면옥 > 2차 필동해물 > 3차 필동분식 정도의 코스이다.
이 코스로 움직이면 전철 마지막 정류장에서 깨어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3. 충무로와 을지로를 연계한 노포투어가 가능하다. 인근에 필동면옥, 사랑방칼국수, 동원집, 영덕회 식당,
황평집, LA갈비 골목, 인현시장 등 다양한 음식을 제공하는 노포를 찾을 수 있다.
4. 여행 및 관광정보
- 남산길을 거닐어 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충무로역에서 필동해물 방향으로 쭉 올라가면 오래된 저택이
듬성듬성 서 있고 남산 공원길을 만날 수 있다.
- 인근에 한국의 집, 남산골 한옥마을 등도 들러볼 만하다.
- 대한극장 건너편으로 신성상가, PJ호텔, 세운상가를 따라 걷는 길도 추천한다. 특히 노을이 지는 시간에
걸으면 참 좋다. 사실 세운상가 2층의 다전식당에서 삼겹살을 구우며 보던 노을이 참 멋있었다.
참고로 다전식당은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는다.
- 책과 철학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세운상가 2층 철학서적 전문 서점 '소요서가'를 방문해 보는 것도 추천.
주변에 다양한 카페와 펍들이 있어 책 한 권 들고 시간을 보내기 좋다.
- 오디오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세운상가의 오디오 가게들들 들러보시는 것도 권장. 다리품을 조금만
팔면 꽤 괜찮은 구제나 빈티지 오디오도 구입 가능하다.
- 석양 무렵 청계천 길을 걷는 것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