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날, '백령도식 랭면 한 그릇'에 '짠지떡' 한 덩이
한국의 음식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을 들자면 첫 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아마 한국전쟁이라 할 수 있다. 전쟁 중에 무슨 음식점이 영업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전쟁의 포화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간 피난민들이 생계를 위해 시작한 가장 쉬운 일이 '집에서 먹던 음식'을 만들어 파는 것이었고 이런 음식들이 백반집의 시작이었다. 전쟁이라는 재앙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선물한 아이러니한 선물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한국전쟁으로 인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음식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냉면이다.
우리나라의 평양냉면은 사실 피난민의 역사와 그 길을 같이한다.
전쟁을 피해 남한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전국 곳곳에 냉면집을 열기 시작하면서 평양냉면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 그중 일부(황해도 사람들)는 백령도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메밀을 심고 냉면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백령도 냉면의 시작이다. 백령도 냉면은 처음에는 꿩고기로 육수를 내다가 돼지뼈로 육수 재료를 바꿨고 요즘은 소뼈로 육수를 낸다고 한다. 여기에 까나리액젓으로 간을 하는 것이 특징.
이북의 냉면이 백령도로 들어와 지역과 환경에 적응하며 변화를 이뤘으니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한자 성어가 말 그대로 적용된 듯하다.
매서운 겨울 날씨가 자신의 존재감을 과감하게 드러내던 어느 날,
급 평양냉면이 먹고 싶다는 마눌님을 모시고 인천 제물포역 인근의 백령면옥을 찾았다. 정통 평양냉면과는 조금 다르지만 '꿩대신 닭'이라고 할까? 아니 '소'인가?
백령면옥은 전철 1호선 제물포역과 가깝다. 2번 출구를 나와 대로변으로 나서서 정부 인천지방 합동청사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바로 건너편에 자리한다. 서둘러 자리를 잡으니 면수가 담긴 주전자를 테이블에 얹는다.
메밀향이 눅진히 피어오르는 면수를 앞에 두니 심장의 박동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그런 마음과 같다 해야 할까? 마음은 점점 조급해져 오는데 시간은 더디 흐른다. 도대체 이깟 냉면 한 사발이 뭐라고. 더디 흐르는 시간을 재촉하듯 김치 한 조각을 집어든다.
'어? 의외로 김치 맛이 좋다'
백령도 바닷물에 배추를 절여 만든 김치라지만 사실 그 미세한 맛까지 식별할 능력은 내게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치류의 기본적인 맛은 꽤 높은 수준. 인천지역의 노포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조금은 생소하지만 깊은 맛이 매력적인 김치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이 집의 김치도 그런 김치에 속한다. 초빼이는 '인천식 김치'라 부르는데 이는 아마 김치에 쓰는 젓갈의 차이에서 오는 듯.
드디어 나온 냉면 한 그릇.
탈피한 메밀가루를 쓰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메일면의 색이 짙다. 게다가 구수한 향과 맛이 나쁘지 않다.
보통 메밀의 껍질을 벗기지 않고 제면을 하는 집들에서 짙은 검은색에 가까운 면을 볼 수 있는데, 이 집의 면은 탈피를 한 메밀을 쓰는데도 꽤 짙은 색을 유지한다. 이 집만의 특징이랄까?
어쩌면 따로 넣는다는 '메밀 씨눈'이 이 집 메밀면의 색상과 구수함의 비밀일 수도 있겠다 싶다.
초빼이는 이 집의 냉면을 받으면 일단 그릇째 들고 육수 한 모금을 마시는 것으로 시작한다. 잘 우려낸 소뼈 육수에 동치미를 섞어 상큼함을 더하고 거기에 까나리 액젓으로 약간의 간을 더한 육수이다. 한 모금 식도로 넘기면 조금 전까지의 추위를 금세 잊을 수 있다. '이열치열, 이랭치랭'이랄까?
그리고 고명을 육수에 흩트리고 젓가락으로 면을 풀어 다시 한 모금. 그리고 난 후 한 젓가락 면을 들어 올린다. 쏟아지는 햇빛을 온몸에 품은 메밀면이 환희 빛나기 시작한다.
추운 날씨로 움츠러든 몸을 메밀면 한 젓가락으로 다시 곧게 편다. 그리고 다시 한 젓가락.
이내 테이블 위에 올려진 까나리 액젓을 손에 쥐고 그릇의 가장자리를 따라 한 바퀴 휘 두른다.
여기서부터가 '강남의 귤이 강북으로 와 탱자가 되는' 시간.
희한하게도 백령면옥의 냉면은 육수에 까나리 액젓을 붓고 나면 소주 생각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정통파 평양냉면 애호가들에게는 이런 행위가 약간은 '키치(kitsch)'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초빼이는 냉면 육수와 까나리 액젓의 이 '숭고한 조합'도 품은 지 오래. 본격적으로 냉면을 즐기는 시간을 위해서는 과감히 선주후면의 상식도 져버릴 수 있다.
소주 한 병을 주문하며 겨울철에만 먹을 수 있는 '계절 한정 메뉴인' 이 집의 별미 '짠지떡'도 함께 청한다.
이름부터 생소한 음식인 이 '짠지떡'은 간단히 정리하자면 '백령도식 김치떡(또는 만두)' 메밀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어 찐 후 밀가루와 소금을 넣고 말랑하게 반죽하여 피를 완성하고, 김치와 굴 그리고 다른 조개류들을 함께 넣어 속으로 만든다. 적당히 익히고 나면 겉면에 들기름을 발라내는 음식. 초빼이의 생각엔 왠지 떡보다는 만두에 가까운 음식이 아닐까 싶기도.
보기에도 두터운 메밀 피 아래에는 소금에 잘 절여서 물기를 뺀 굴의 향과 조개류들의 독특한 식감이 잘 익힌 김치와 함께 숨어있다. 손바닥만 한 떡 한 덩어리 안에 서해 바다가 춤추고 있는 듯한 느낌.
이래서 음식이란 장르가 매력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딱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들기름을 조금 더 좋은 녀석으로 썼다면 그 맛과 향이 수십 배는 더 좋아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 정도? 뭐 그래도 이 정도 가격에 이런 음식이라면 거의 흠잡을 데 없는 음식이라고 생각.
이렇게 가볍게 낮술을 즐기다가 조금 흥이 모자란다 싶으면 다른 메뉴들도 주문이 가능하다.
깔끔하게 잘 삶아낸 삼겹살 수육과 녹두전도 소주 한잔 곁들이기엔 모자라지 않는 안주거리들. 너무 튀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딱 적절한, 그런 수준의 '중용의 도'를 음식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을 찾은 날, 일찍부터 어르신들이 자리를 채우더니 과감하게 '아침술(또는 낮술)'을 시작하신다.
가장 기억에 남는 어르신은 굉장히 깔끔하게 차려입고 오셔서 냉면 한 그릇과 짠지떡 하나를 시켜 놓고 소주 한 병을 음미하듯 드시던 분.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음식을 조심스레 드시면서 조미료처럼 소주 한 잔 탁 들이켜는 모습을 보니 '인생의 여유'란 저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 왠지 초빼이의 노년의 모습도 저랬으면 하는 그런 생각까지 들게 했던 분.
인천의 오래된 노포 냉면집에서 초빼이의 노년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 본다.
[메뉴추천]
1. 1인 : 냉면 한 그릇(물, 비빔, 반냉은 기호에 따라 선택) + 소주 +(식사량이 가능하다면) 짠지떡(정말 강추)
2. 2인 이상 : 냉면(인수대로) + 소주 + 짠지떡(겨울에만 가능. 다른 계절이라면 수육이나 빈대떡을 추천)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이 집은 주차장이 넉넉하다. 매장 건물 주변에 주차도 가능하고 전용 주차장도 따로 마련해 두었다.
2. 제물포역 2번 출구(북쪽)에서 대로변까지 나온 후 오른쪽 정부인천종합청사 쪽으로 걸어오면 됨
3. 가깝지는 않지만 인천 해장국의 지존 송림동 '해장국'이 인근에 있고, 인천 지역의 노포로 유명한 가든
'숭의 갈비'는 제물포역 1번 출구 쪽에 있다. 그리고 인천의 유명한 기사식당이자 오징어 찌개가
유명한 '송림기사식당'도 인근에 있음.
4. 11시 오픈하여 21시까지 영업. 15:40분에서 16시 30분까지 브레이크 타임
5. 곱빼기를 주문하면 정말 면사리 두 덩어리를 넣어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