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가 주렁주렁 열리는 시간이 오면 빛나는 백령도식 냉면집 하나.
사람의 기억이란 것은 참으로도 신비한 영역이다. 그 와중에 초빼이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주 정작 기억해야 할 것들은 쉽게 기억하지 못하는 반면,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쉽게 기억하기도 한다. 또한 사물의 본질에 대한 기억보다는 부수적인 요소에 대한 기억을 더 깊게 각인하는 등 좀처럼 어떤 메커니즘이 작용하는지 종잡을 수 없다. 노포를 기억하는데도 실제 음식보다는 음식점의 외부적 요소를 더 잘 기억하는 곳이 있는데 오늘은 그 집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이 집을 처음 찾았던 것은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던 어느 여름날의 낮이었다.
도저히 음식점이 있을 것 같지 않던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의 오래된 주택가에 자리 잡은 이 집은, 보자마자 그 외형으로 초빼이의 눈길을 사로잡아 버렸다. 한 때는 마당으로 쓰이던(지금은 주차장인) 곳을 가득 덮고 있는 청포도 넝쿨과 주렁주렁 매달린 청포도가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 한적한 시골집이 아닌 도심의 주택가에서 이런 청포도 넝쿨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터라, 굉장히 인상 깊게 기억하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 초빼이의 마산 고향집에 있던 포도넝쿨이 자연스레 오버랩되었다. 그 시절에도 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우물가 포도 넝쿨 밑에서 '등목'(요즘 젊은 세대는 잘 모르는 말일 듯)을 하고 어머니가 내 주신 시원한 비빔국수를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아마도 40여 년 전쯤 일이지 싶다.
인천 주안동의 '옛 시민회관 사거리' 뒤편 좁은 도로를 따라 한참 걸어 올라간다.
양쪽으로 주차된 차를 이리저리 피하며 올라가다 보면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있는 집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하늘을 가릴 듯 무성한 청포도 넝쿨 밑에서 웨이팅 하고 있는 손님들이 잔뜩 달아오른 한낮의 뜨거운 열기를 피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오늘 소개할 집이다.
변가네 옹진냉면.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다 호출을 받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입안 가득 면을 흡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모습 또한 굉장히 재밌지만 초빼이도 곧 저 대열에 합류할 테니 섣부른 감정표현은 자제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무심하게 면수를 따라주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린다. 따뜻한 면수 한 잔 하면서 메뉴를 고르라는 이 집의 루틴과 같은 것. 면수를 낸다는 것은 여타 평냉집과 다른 백령도식 냉면집만의 특징 중 하나. 주방에서 직접 면을 뽑아 냉면을 만들기에 항상 신선한 면수를 제공할 수 있다. 조금은 미끄덩한 식감의 면수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며 어젯밤 격했던 음주의 흔적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준다.
면수를 한 모금 들이키고 바로 주문을 시작. 냉면 곱빼기 하나와 보통 하나, 그리고 녹두부침 하나.
이 집의 녹두부침은 녹두를 곱게 갈아 두텁게 부쳐내는데 항상 윗면에는 조그만 삼겹살 조각을 올려서 낸다. 정확하게 네 등분으로 나눠 먹기 편하게 내주는데 이 녹두부침의 맛이 솔찬히 좋다. 예전의 녹두부침처럼 돼지기름을 녹여 무쇠 솥뚜껑에 지져내지는 않지만 그 돼지기름의 고소함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도록 삼겹살 조각을 함께 올려 지져내는 듯하다. 요즘 젊은 세대들의 말처럼 '겉바속촉'이라는 식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음식.
이내 냉면이 테이블에 오른다. 이 집 냉면은 굉장히 복잡한 맛을 가진 팔색조와 같다.
특히 냉면의 육수가 참 매력적인데 약간은 거무스레한 육수가 포인트. 한우사골에 고명으로 올라오는 돼지 등심을 함께 넣어 우려내는데 그 맛이 참 오묘하다. 일반적으로 평양냉면집들이 고기육수를 많이 사용하는 반면 백령도 냉면은 사골육수를 사용하여 육수를 내는 것도 하나의 차이라고 한다. 게다가 시원하면서 달콤함마저 느낄 수 있는 이 집의 냉면 육수는 이 집만의 특색이기도 한데 한약재 재료인 '감초'를 함께 넣고 육수를 내기 때문. '약방의 감초'가 냉면 육수에도 쓰인다니.
백령도식 냉면을 먹을 땐 나름 먹는 법이 따로 있다. 처음엔 냉면 육수를 절반정도 마시다가, 육수를 조금 더 추가한다. 그리고 까나리 액젓을 청하여 육수에 한 바퀴만 두르고 다시 맛보면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아마도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는 마치 공중파 TV의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역대급 반전 수준일터.
처음 나온 육수와 까나리 액젓을 첨가한 후 육수의 맛은 정말 천양지차이다.
그리고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비린 까나리 액젓을 육수에 부으면 까나리 액젓 특유의 비릿한 맛과 향은 모두 사라지고 냉면 육수의 감칠맛이 극대화되어 굉장히 풍성한 맛을 가지게 된다는 것. 그래서 초빼이는 백령도식 냉면을 먹는 분들에게 식초와 겨자 대신 까나리 액젓을 적극 추천한다. 까나리 액젓의 마약과 같은 중독성은 처음 시작이 어렵지 한번 시작하면 쉽게 버릴 수 없기 때문.
게다가 이 집 냉면 면발은 메밀껍질까지 거칠게 빻아 넣어 굉장히 짙은 색상을 가지고 있다.
면의 색상만 보면 마치 한때 유행하던 칡냉면의 면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 입안에 넣으면 까칠한 식감과 함께 조금은 질긴 듯한 메밀껍질이 그대로 씹히는데 한 번씩 이 메밀껍질을 씹을 때마다 메밀향이 입안에서 폭발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거친 식감은 고명으로 올려진 부드러운 돼지 등심과 함께 입에 넣으면 굉장히 극대화되는데 이 또한 변가네 옹진냉면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집의 냉면 곱빼기는 서울의 여느 냉면집처럼 냉면 한 그릇값에 육박하는 추가금을 받으며 냉면 한 움큼 더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보통 냉면에 들어가는 면타래 한 덩이를 그대로 더 올려주는 것이라 평소 비싼 냉면값과 양에 불만을 가진 많은 면덕후들에게는 굉장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먹다 보니 모든 그릇은 바닥을 비운 상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수육도 한 접시 추가.
녹두부침과 함께 이 집의 수육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단골 메뉴인데 적절히 기름기가 빠진 수육을 깔끔하게 접시에 담아내는데 도저히 소주를 시키지 않을 수 없는 비주얼. 삼겹살과 살코기가 적정한 비율로 배분되어 부드러운 식감과 맛으로 굉장히 좋은 안주거리가 된다.
게다가 이 집의 무김치(?)에 수육 한 점 같이 집어 먹으면 그 맛이란.
그래서 이 집에는 점심부터 반주를 함께 하는 어르신들을 꽤 많이 볼 수 있다.
이 집은 1977년에 영업을 시작하여 이미 46년째 영업 중인 노포. 그러면서 1대 창업주의 손을 거쳐 지금은 2대째 사장님이 영업을 이끌고 있다. 요즘은 그분들의 자제분들까지 나와 손을 거들고 있는 듯한 느낌.
한 10여 년 정도 다니다 보니 누가 가족이고 누가 일하시는 분인지 이제야 구분이 되더라. 46년이라는 시간 중 10여 년을 함께 했으니 나름 단골이라 자칭해도 욕은 먹지 않을 듯싶다.
게다가 코로나가 한참 기승을 부리던 2022년에도 마스크로 꽁꽁 싸매고 찾았으니 이 집 냉면에 완전히 중독된 수준인 것도 맞는 듯하고. 항상 이 집에 올 때마다 드는 생각은 청포도 넝쿨 아래에 테이블 몇 개 꺼내 놓으시면 머리 위로 주렁주렁 달린 청포도를 두고 냉면과 수육에 소주 한 잔 하는 신선놀음도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것.
옹진냉면의 갈증을 이번에 해결했으니, 청포도가 활짝 열릴 7~8월에 다시 청포도 그늘을 찾아야겠다 싶다.
[메뉴추천]
1. 1인 방문 시 : 냉면 + 녹두부침 또는 수육 + 소주
2. 2인이상 방문 시 : 냉면 + 녹두부침 + 수육 + 소주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이 집의 위치는 조금 애매하다. 주안역에서 내리면 발품을 조금 팔아야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참 애매한 거리. 인천 2호선 시민공원역에서 가깝다. 주소는 아래와 같다.
- 변가네 옹진냉면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509-13
2. 주차장은 꽤 넓으나, 주말에는 이마저도 부족한 경우가 있다. 자체 주차장이 만석일 경우 인근 공영
주차장을 안내해 주거나 주차할 수 있는 장소를 알려준다.(주차 관리요원 별도 운영)
3. 이 집의 심벌마크와 같은 청포도는 7~8월에 절정이다.
4. 단 이 매장 인근이 재개발 중이라 주변에 건물 리모델링이나 신축 공사가 꽤 많은 편.
주차 시 유의해야 한다.
5. 인천 맛집 투어를 계획 중이시라면 거리가 조금 있지만 석바위역의 '청해김밥'(쫄면과 김밥)과 진한 육개장
이 유명한 노포인 '풍전 식당'을 코스로 넣을 수 있다.
6. 인근의 수봉공원은 차를 잠시 세워두고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산책로도 굉장히 잘 정비된 상태.
특히 수봉공원은 인천에서는 숨겨진 벚꽃명소로도 유명하다.